코리안들, 유태인 본떠 미 의회 움직이다

2010. 12. 25. 17:24지구촌 소식

코리안들, 유태인 본떠 미 의회 움직이다

시사INLive | 김동석 | 입력 2010.12.24 10:41

 

새벽 2시.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 알고 지내던 AP통신 기자였다. 그는 다짜고짜 "지금 잘 때가 아니니 AP 인터넷 사이트를 열어보라"고 말했다. 한국의 연평도가 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인터넷을 보니 연평도 민가가 불타는 모습이 메인 화면에 올라와 있었다. 11월23일(미국 현지 시간)의 일이다.

곧바로 핫라인을 가동했다. 지난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비상 네트워크를 구축해놓은 터라, 한인유권자센터와 친분이 있는 연방의원과 그 비서실장에게 문자 메시지부터 날렸다. 상원·하원 지도부와 국방위원회·외교위원회 소속 의원들, 그리고 평소 친분을 유지해온 의원 40여 명이 우선 대상이었다. 의회가 먼저 포문을 열면 정부의 행동이 신속해진다는 대응 방식은 평소에 미국 내 유태인들한테 배웠다.

날이 밝고 나서는 일단 한국계 미국 시민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냈다. '미국 시민인 한인들(Korean American)은 다수의 사상자를 낸 북한의 연평도 공격 행위를 강하게 규탄하며 비난한다. 북한의 만행은 미국을 공격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한인유권자센터는 이 성명서를 상원·하원 의원 50여 명에게 보냈다. 특별히 지난 5년간 한인들과 유대를 맺으면서 친밀감을 형성해온 유력한 연방 정치인들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긴급히 취해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선거 때 한인들이 어떻게 그들을 도왔는지도 상기시켰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보수 단체 회원들이 연평도 도발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11월23일 오후,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차기 하원 외교위원장에 내정된 일리애나 로스레티넌 의원이었다. 같은 공화당의 아태(亞太)소위원회 간사 도널드 만줄로 의원(일리노이 주)에게서도 반응이 왔다. 이어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과 이제 곧 하원의장에 취임할 존 베이너(공화당 하원 원내대표)가 북한의 연평도 도발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대통령의 조처에 동참한다는 뜻을 밝혔다. 발언 한마디의 무게가 천근보다 무겁다는 하워드 버먼 현 하원 외교위원장을 비롯해 댄 버튼 하원의원(인디애나 주), 아이크 스켈턴 하원 국방위원장, 공화당 서열 2위인 하워드 매컨 의원(캘리포니아 주)도 유사한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상·하원 의원 집요하게 졸라 대북 결의안 이끌어내


의회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백악관·국무부·국방부가 구체적인 군사 조처까지 언급하면서 한국 정부를 옹호하고 나섰다. 11월24일에는 웬만한 일에 좀처럼 나서려 하지 않는 칼 레빈 상원 군사위원장까지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한인유권자센터로서는 가깝게 관리해온 의원들을 거의 총동원한 셈이다. 11월30일, 미국 하원은 마침내 연평도 도발을 규탄하는 대북 결의안을 전체회의에 상정해 찬성 405표, 반대 2표로 통과시켰다. 하원 결의안은 연평도 도발과 관련해 북한을 강력히 규탄하고, 북한에 대해 추가 공격 행위 중단 및 휴전협정을 비롯한 국제 의무를 준수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원 또한 12월1일 대북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연평도 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만 열흘 동안 미국 내 한인들은 이들 결의안을 이끌어내려고 동분서주했다. 그간 선거전에 끼어들며 확보한 핫라인을 토대로 상원·하원 의원들을 집요하게 졸라댄 덕이었다. 앞서 얘기한 대로 이는 미국 내 유태인들의 활동 방식을 상당 부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안보에 경고등이 켜질 때마다 미국 내 유태인들은 신속하게 움직인다.

2007년 8월 말. 시리아가 북한에서 핵기술을 제공받아 원자로를 건설하고 있다는 정보가 새어나왔다. 그 직후인 9월 초, 필라델피아에 에이팩(AIPAC:미국 내 유태인들로 이뤄진 풀뿌리 정치 참여단체) 지도부가 긴급히 모인 뒤 워싱턴의 국방 관련 거물급 의원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꼭 일주일 뒤 이스라엘 공군이 비밀리에 건설 중이던 시리아의 원자로 시설을 폭격했다. 이것이 미국 내 유태인들의 의견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지난 5월에는 미국 내 유태계 지도자들이 맨해튼에 모였다. 이스라엘 건국을 기념하는 맨해튼 퍼레이드에 참가한다는 명목이었다. 당시 이들이 만난 것은 맨해튼(유엔)에 파견 나온 중국 관계자들이었다. 미국 상원·하원 외교위원회 의원들이 나서서 모임을 주선토록 했다. 이들은 이란에 투자한 중국의 돈이 물거품이 되지 않게 하려면 이란 제재 결의안에 반대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 내 유태인 강경파들의 일차 목표는 이란이다. 그런데 핵무기 개발 의혹이 있는 이란에 대한 유엔의 추가 제재 결의안이 늘 중국의 반대에 묶여 있었다.





ⓒAP Photo '연평도 성명'을 발표한 존 베이너 하원의장 내정자, 하워드 버먼 외교위원장, 아이크 스켈턴 국방위원장(왼쪽부터).

당시 미국 내 유태인들이 중국을 어떻게 협박하거나 설득했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지난 6월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란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 찬성표를 던졌다. 전체 석유 수입의 10% 이상을 이란에 의존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결국 미국의 유태인들이 뭔가를 해낸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무장 게릴라들이 로켓 한 발만 쏘아도 팔레스타인 촌을 초토화시키는 이스라엘을 국제사회가 비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또한 미국 내 유태인들의 몫이다. 고립무원 처지의 이스라엘이지만 늘 적을 향해 단호하게 무력으로 응징할 수 있는 뒷심은 미국 내 유태인들에게서 나온다. 미국 유태인들이 의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런 일을 가능케 한다. 그들은 늘 미국의 안전과 이익을 이야기한다. 미국 시민인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이 이스라엘에 있다는 논리이다. 그야말로 '한 몸통 두 나라'이다.


전략적 리더십 없이 행동하면 더 큰 위험 부를 수도


미국 내 한국인들도 유태인들과 유사한 면이 있다. 분단(분쟁)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이민자 집단에 비해 더 큰 스트레스를 떠안아야 한다. 북한이 미국의 적국으로 규정되어 있는 한 한국인들은 안정과 안전을 자신할 수 없다. 북한 문제가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졸이게 된다. 이번 연평도 사태 이후 미국 내 한인타운에서는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당장 북한을 공격해 초토화시켜야 한다는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북한에 더해 중국 대사관까지 진출하겠다는 의지도 보인다. 전략적 리더십이 없으면 미국 내 한인들의 이 같은 행동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미국 내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 의회를 움직이는 전례 없는 일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불안감은 여전하다.

미국 내 유태인들의 방식을 한인들이 공부하고 배운 지 10여 년이 지났다. 연평도 사태에 처음으로 그것을 적용해봤다. 겨우겨우 해본 것이 이 정도이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점점 자신감을 잃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 관계에서도 점점 불리한 처지에 놓인 듯한 한국 외교정책을 보면 그저 답답하다. 한국에도 외교정책이 있을 텐데, 핵심 우방국인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에서 공통된 견해(common ground)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김동석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