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의 '예술과 금융'] 금융, 이제는 실물경제와 극단적으로 가까워져야

2013. 6. 9. 21:56C.E.O 경영 자료

[Weekly BIZ] [김형태의 '예술과 금융'] 금융, 이제는 실물경제와 극단적으로 가까워져야

 

 

조선비즈 입력 : 2013.06.08 03:09

極사실주의, 사진보다 더 정밀하게 표현
시각의 깊이에서 혁신으로 고전적 사실주의 뛰어넘어
極사실주의 금융, 실물 뒷받침 안된 금융이 결국 서브프라임 사태 불러
선박 금융을 하더라도 전후방 연관산업과 기술의 특허지도 그릴수 있고
다양한 결제방식까지 고려해야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사실주의 회화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

그래서 추상적이지 않고 대상과 닮았다. 그렇다면 사실주의 회화가 극단으로 흐르면 어떤 그림이 될까. 사진보다 더 사실적인 그림이 된다. 바로 극사실주의(hyper-realism) 회화다. 인물이든 정물이든 마치 렌즈를 들이대고 사진 찍듯이 생생하고 치밀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극사실주의를 사진사실주의(photo-realism)라고도 한다. 평범한 대상을 극한적으로 진짜처럼 묘사함으로써 충격을 준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타프 스파네이의 사과 그림을 보자. 먹다 만 사과의 모습이 촉촉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헤네시 사이몬의 그림 또한 극적으로 사실적이다. 눈썹, 땀 구멍, 특히 선글라스에 비친 빌딩들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하다.

타프 스파네이의 사과 그림, 헤네시 사이몬

극사실주의는 60년대 후반 미국에서 태어났다.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 미국은 경제적, 정신적 공황에 빠졌다. 정치, 외교, 사회 전반에 걸쳐 근본적 패러다임 변화가 요구되었다. 40년 후, 서브프라임 사태로 미국 금융시장이 위기에 빠지면서 금융 개혁 차원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패러다임 변화를 요구받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예술에 대한 회의도 팽배한 시기였다. 미니멀리즘이 주도한 추상화와 단순화, 그리고 팝아트가 주도한 예술의 상품화가 비판받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화가들은 사실적 재현이라는 회화의 고전적 전통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금융이 비난을 받으면서 과거의 전통적 금융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극사실주의

극사실주의는 과연 19세기 전통적 사실주의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액체인 물을 계속 끓이면 기체인 수증기가 되고 결국 날아가 버린다. 물리학적 용어로 '상(相) 변화(phase transition)', 즉 물질의 성격이 완전히 변해 버린 것이다.

회화도 마찬가지다. 극사실주의는 사실주의의 아류가 아니다.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로 출발해 19세기를 풍미한 고전적 사실주의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마치 같은 산소와 수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물과 수증기의 특성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극사실주의의 등장은 미니멀리즘이나 추상주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지만, 무덤덤하고 지루한 전통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오히려 극단적인 사실성을 추구함으로써 사실주의의 한계와 허구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사실주의를 통한 사실주의의 극복, 정말 멋진 생각 아닌가. 우리나라 대표적 극사실주의 화가 중 한 명인 한영욱 화백의 말이다. "보이는 것을 잘 그리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 때가 있었으며,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다." 바로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 극사실주의가 아닌가 싶다.

그리는 방식을 보더라도 극사실주의는 사실주의와 다르다. 첫째, 대상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그린다. 2차원 사진을 2차원 그림으로 옮겨 표현하기 때문에 3차원 대상을 2차원 평면에 환원시키기 위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화가의 남은 에너지를 모두 세밀한 표현에 쏟아부으면 된다. 둘째, 전체 대상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특정한 부분을 집중 묘사한다. 어떤 화가는 얼굴의 주름, 어떤 화가는 사과만을 편집증적으로 묘사한다. 피카소 같은 입체파는 다양한 관점을 하나의 평면에 표현하여 '시각의 폭'을 확대했다. 극사실주의는 사진보다도 정밀하게 표현함으로써 '시각의 깊이'에서 혁신을 이룬 것이다.

'극사실주의 금융'과 금융을 통한 금융의 극복

회화에서 사실성은 '그리려는 대상과의 가까움' 즉 닮은 정도를 의미한다. 금융에서 사실성은 '실물경제와의 가까움'을 말한다. 1970년대까지 '금융 사실주의 시대'엔 충실하게 실물경제를 지원하는 것이 금융의 역할이었다.

1971년 9월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됨으로써 금과 달러의 연계가 끊어졌다. 실물의 뒷받침이 없는 금융만의 시대가 온 것이다.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세계화와 규제 완화 속에서 '금융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왔고 결국 서브프라임 위기가 터졌다. 현재가 어려우면 과거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혹자는 과거의 '사실주의 금융'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인가. 아니다. 미래에 다가올 금융은 복고적인 사실주의 금융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극사실주의 금융(hyper-realistic finance)'이다.

'극사실주의 금융'이란 무엇인가. 특정 실물 분야에 극단적으로 가까워진 금융이요, 그 내부까지를 꿰뚫어 보는 치밀하고 전문화된 금융이다. ICT금융, 생명공학금융, 선박금융, 자원개발금융, 교육금융, 복지금융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해운업의 구조적 특성을 고려해 기업금융 방안을 마련한다면 이는 전형적인 사실주의 금융이다. 극사실주의 선박금융이 되려면 사실주의 금융을 뛰어넘어야 한다. 전후방 연관산업과 기술의 특허지도를 그릴 수 있고, 더불어 톱헤비(Top Heavy)형, 헤비테일(Heavy Tail)형, 마일스톤(Milestone)형, 표준형으로 구분되는 선박 대금 결제 방식까지 고려할 수 있으면 극사실주의 선박금융이다. 회화에서 사실주의를 극복한 것은 추상주의나 낭만주의가 아니라 극사실주의다. 금융도 '극사실주의 금융'을 통해 스스로를 극복해야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