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떠도는 아픈 과거, 디지털 세탁소가 지운다

2015. 11. 29. 18:59C.E.O 경영 자료

[Saturday] 온라인 떠도는 아픈 과거, 디지털 세탁소가 지운다

[출처: 중앙일보] [Saturday] 온라인 떠도는 아픈 과거, 디지털 세탁소가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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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 트레이터 배민호]


2013년 고위층에 대한 성접대 의혹으로 번져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원주 별장파티. 관련 수사가 진행되면서 파티에 참가했던 여성 A씨는 곤욕을 치렀다. 네티즌들이 보도에 난 성씨와 직업 등을 단서로 신상털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소속 회사와 실명 노출에 이어 사진까지 인터넷 공간을 떠돌게 됐다.

[현장 속으로] 인터넷 흔적 없애는 업체 성업
포털·SNS에 있는 개인 관련 게시물
정보 위치 일일이 찾아내 삭제 요청


 견디다 못한 A씨는 심적 고통 끝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A씨를 살린 건 ‘디지털 세탁소’ S사였다. 같은 해 8월 A씨의 의뢰를 받은 S사는 3개월간의 작업 끝에 포털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유통되던 2000여 건의 게시물을 삭제했다. 그제야 컴퓨터를 켤 때마다 A씨를 소스라치게 했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해 7월 경남 울산에서 한 여고생이 술에 취한 남성의 칼부림에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면서 아이를 잃은 엄마의 고통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지인들이 하나둘씩 딸에 관한 정보를 댓글과 SNS로 올린 끝에 아이의 사진과 학교, 사는 곳까지 모두 노출됐다. 부모는 사건 발생 10일 만에 전문업체에 디지털 흔적 삭제를 의뢰했다. 모든 게 지워진 뒤에야 부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아파서 숨기고 싶은 ‘과거’를 지우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른바 ‘디지털 세탁소(디지털 흔적을 찾아 지워주는 전문업체)’가 각광을 받고 있다. 현재 디지털 세상 구석구석으로 퍼진 과거를 일괄적으로 거둬들일 방법과 창구가 없어서다. 2013년 처음 생긴 디지털 세탁소는 지금은 10곳 안팎의 업체가 성업 중이다. 업체당 내방 상담 고객이 하루 20~30명에 이른다고 한다. S사 자체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지난 2월까지 기업 및 개인을 상대로 한 상담건수는 3229건. 이 중 47%(1520건)가 청소년, 46%(1487건)가 성인, 7%(222건)가 기업 등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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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탁소의 일은 수공업적이다. 삭제 대상 정보들의 위치(URL)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검색엔진을 활용한 키워드 검색이나 자체 개발한 ‘크롤러(무수한 컴퓨터에 분산 저장된 데이터 중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료를 긁어오는 프로그램)’를 활용한다. 위치를 특정해야 데이터 관리자를 상대로 삭제를 요청할 수 있어서다. 찾아낸 정보들 중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정보를 추려낸 뒤 의뢰인을 대리해 본격적인 삭제 요청에 나선다. 유명 연예인 성관계 동영상 사건과 관련 700만건을 삭제한 일도 있다. S사 관계자는 “이런 작업을 생업이 있는 개인들이 직접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잊혀질 권리 VS 표현의 자유=과거를 지우려는 사람에게 그나마 손쉬운 상대는 네이버·다음 등 국내 포털사이트 운영사들이다. 네이버의 경우 누군가가 어떤 게시물로 인해 “명예가 훼손됐다”거나 “사생활이 침해됐다”고 주장하면서 삭제를 요구하면 곧바로 해당 게시물이 열리지 않도록 임시조치(블라인드 처리)를 한다. 검색결과에는 보이지만 클릭해도 열리지 않게 하는 조치다. 네이버 관계자는 “정보통신망법(44조의2)이 사실상 이런 조치를 강제해 따를 수밖에 없다”며 “삭제 여부에 대해 자체 판단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게 회사 방침”이라고 말했다. 대신 게시자에게는 게시물 차단 사실을 알리고 30일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고 이 기간 동안 이의가 없으면 자료는 영구 삭제된다. 이의가 제기되면 게시물은 살아난다.

지난해 네이버와 다음의 임시조치 건수는 45만4000여 건. 2013년의 36만5000여 건에 비해 크게 늘었다. 양사는 임시조치 신청자가 누구인지 국가기관·기업·개인 등 유형별로 밝히지는 않고 있다. S사의 김모(46) 대표는 “이 중 3분의 1 정도는 세탁소가 작업한 결과일 것”이라며 “이의제기 자체가 번거롭기 때문인지 임시조치는 곧 영구삭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네이버와 다음이 취한 임시조치에 이의가 제기된 것은 전체의 5% 남짓이지만 이의제기 건수는 점점 늘고 있다.

 누군가의 ‘잊혀질 권리’가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실제로 수년째 내부 분쟁을 겪고 있는 서울 한 대형교회는 유명 목사를 비판하는 게시물 삭제를 디지털 세탁소에 의뢰했지만 반대파의 적극적 이의제기로 완전 삭제에 실패했다.

이의 제기를 받아 과거를 지우는 데 실패한 사람에게 남는 수단은 게시자 개개인을 상대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명예훼손분쟁조정을 신청하거나 명예훼손을 이유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이다. 조정은 당사자 간 합의가 불발되면 소용이 없다. 소송을 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명예훼손의 법적 요건을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두 절차 모두 무수한 게시자를 일일이 상대해야 하는 게 부담이다.

 최근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 필요성을 제기한 새정치민주연합 전병헌 의원은 “임시조치는 일반인이 접근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표현의 자유나 알 권리와의 충돌 가능성이 큰 불완전한 제도”라며 “잊혀질 권리의 적절한 보장 범위와 방법을 정하는 입법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사각지대=국내 포털사이트에 비해 구글과 페이스북에 남은 흔적을 지우는 일은 훨씬 어렵다. 페이스북은 전 세계 가입자 수가 14억 명에 달해 정보의 확산 속도와 범위가 상상을 초월하고, 구글은 탁월한 검색능력으로 구석구석 퍼져 있는 ‘과거’를 긁어 보여준다. 하지만 외국 기업이다 보니 우리나라 정보통신망법의 직접 규제를 받지 않는다.

 구글은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곤잘레스가 제기한 소송에서 지난해 5월 유럽사법재판소(ECJ)로부터 “검색링크 삭제” 명령을 받은 이후 이용자들로부터 삭제요청을 받아 처리하고 있다.

 특정 소스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구글 검색 결과에 해당 자료가 드러나지 않게 조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삭제할지 말지는 구글이 정한다. 지난 25일 구글 발표에 따르면 그동안 유럽연합(EU) 소속 국가의 사용자들로부터 접수된 삭제 요청은 34만8085건에 달했지만 구글은 이 중 42%만 수용했다. 곤잘레스처럼 법원의 판결을 받아오거나 주민등록번호 같은 개인식별정보가 담긴 자료에 대한 삭제요청은 100% 수용되지만 일반적인 명예훼손성 자료에 대해선 사안마다 달리 판단한다. 2012년 우리나라 대선 당시 어느 후보 측이 구글에 “명예가 훼손됐다”며 특정 유튜브 동영상 삭제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사례도 있다.

페이스북은 구글만큼 ‘잊혀질 권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또 모바일 기반의 플랫폼이어서 기술적으로 어떤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한 디지털 세탁소 관계자는 “페이스북에 퍼져 있는 기록들은 일괄해 파악하는 게 쉽지 않다”며 “의뢰인의 페이스북 계정을 넘겨받아 의뢰인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를 찾아 삭제를 부탁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SNS상의 기록을 직접 지워 달라고 요청하는 게 쉽지 않다 보니 그 자료가 “검색이라도 안 되게 해달라”는 요구가 구글 등 검색엔진 쪽에 몰리고 있다.

 실제로 2014년 5월 이후 구글은 “특정 페이스북 계정과 검색링크를 끊어달라”는 요청을 가장 많이(1만220건) 들어줬다. 법무법인 민후의 김경환 변호사는 “인터넷에 올린 정보는 삽시간 퍼지고 그 뒤론 삭제도 어렵지만 법적 보호도 쉽지 않다”며 “개인정보나 사진 등을 올릴 때부터 인터넷의 속성을 고려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변호사, 김미진 인턴기자(서강대 신문방송학과 4년) im.janghyuk@joongang.co.kr

[S BOX] “잊혀질 권리, 알 권리와 충돌 여지 … 단계적 도입해야”

인터넷상의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 gotten)’ 주창의 진원지는 유럽이다. 2010년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는 스페인 유력지 ‘라 뱅가르디아(La Van guardia)’와 구글을 유럽사법재판소(ECJ)에 제소했다. 자신의 재산 강제매각 문제가 해결됐음에도 채무내역 등을 실은 1998년 기사가 신문사 홈페이지와 구글에서 버젓이 검색된다는 이유였다. 결국 지난해 5월 ECJ는 구글에 “검색링크를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이 판결은 ‘잊혀질 권리’ 법제화에 관한 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곤잘레스가 삭제를 요구한 정보가 ▶언론 보도이고 ▶보도 내용이 적법했으며 ▶구글이 미국에 본사를 둔 회사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경우 네이버나 다음의 임시조치 대상에 언론보도는 제외돼 있다. 또 삭제 요청의 근거가 되는 정보통신망법과 개인정보보호법 등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미국 회사에 적용하기엔 법제상·해석상 어려움이 따른다. 정보통신망법에 따른 삭제는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우려가 있는 정보가 대상이라서 적법한 게시물은 해당되지 않는다.

 디지털 세탁소를 찾는 사람의 상당수는 곤잘레스와 처지가 비슷하다. 유명 방송인과의 단란했던 결혼생활을 덮고 싶은 사업가, 철없던 시절 찍었던 성행위나 폭력장면을 잊고 싶은 학생들, 10여 년 전 실명으로 보도된 유죄판결 기사를 지우고 싶은 변호사 등이 그렇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이상직 변호사는 “잊혀질 권리는 다른 기본권과 충돌할 여지가 많은 만큼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며 “아동·청소년에 대한 보호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Saturday] 온라인 떠도는 아픈 과거, 디지털 세탁소가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