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규모 미리 조절하도록 시장과 소통해 정책 예고해야

2016. 12. 1. 20:58C.E.O 경영 자료

빚 규모 미리 조절하도록 시장과 소통해 정책 예고해야

가계부채 1300조원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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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적인 거시 경제정책이 심리를 살리지 못해 경기 둔화와 세수 감소를 유발하고 있다.”

2014년 7월 16일, 최경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확장적 경제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일주일이 지난 7월 24일, 정부는 주택담보대출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을 70%로 대폭 완화하고, 청약가점제를 폐지하는 내용의 경기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부동산 경기를 띄워 건설업에 생기를 불어넣는 한편, 주택가격 상승에 따른 자산효과를 끌어내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9월 1일에는 재건축 연한을 40년에서 30년으로 축소했고, 12월 29일에는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유예, 민간부분 분양가상한제 폐지, 재건축조합원 분양주택 3채까지 허용 등 이른바 ‘부동산 3법’을 통과시켰다. 부동산 거래의 통로를 확 넓힌 셈이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빚을 내서 집을 사라’는 정책은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24일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가계 빚은 10월 말 기준 130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은행과 비은행 금융회사의 가계신용(가계대출+판매신용) 잔액은 1295조8000억원(3분기 말 기준). 여기에 10월 은행 가계대출 증가액(7조5000억원)을 더해 추산한 결과다. 정부가 적극적인 부동산 활성화 대책을 시행하면서 현 정부 들어 3년 6개월(2013년 1분기~2016년 3분기)동안 가계신용은 약 332조8782억원이나 불어났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의 증가액 285조6762억원보다도 많다.

물론 부동산 경기 부양은 경제성장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주택건설 호조로 올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3.3%(전년 동기 대비) 중 건설투자의 기여율이 51.5%에 달했다. 하반기에도 건설투자가 10.7% 늘어나 GDP 기여율은 60%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건설이 한국 경제의 주연(主演) 역할을 한 셈이다. 2000~2014년에는 건설투자의 연평균 기여율이 5.3%에 불과했다.

국제금융시장의 변방인 한국은 미국·일본처럼 무제한 유동성 확대를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자칫 인플레이션 유발과 재정건전성 훼손, 대외신인도 악화를 초래할 수 있어서다. 이런 제약 속에서 정부가 선택한 방법이 가계 신용의 확대였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24일 정부는 ‘8·25 가계부채 관리방안 후속조치’를 발표했다. 분양받은 아파트의 잔금대출을 받을 때 소득을 증명하는 한편, 잔금 대출을 갚을 때 원금 분할상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지난 ‘8·25 대책’ 때는 전매제한을 강화했고, ‘11·3 부동산 대책’ 때는 청약 조건을 강화하는 등 신규 주택 매입의 문을 좁혔다. 지난 4월만 해도 LTV·DTI 완화 조치를 1년 추가 연장한 정부가 돌연 태도를 바꾼 것은 그만큼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는 “현재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가계 빚”이라며 “유동성이 넘치는 상황에서 개개인의 빚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계획적인 채무 관리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가장 염려되는 점은 가계부채의 ‘증가 속도’다. 가계부채가 너무 빨리 늘고 있다. 부동산 경기가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은 지난해 3분기 가계신용 증가율은 10.3%(전년 동기 대비)로 2008년 3분기 이후 처음으로 10%대를 기록했다. 이후로 올 3분기까지 증가율은 계속 확대되는 추세다. 급속한 부채 증가는 소비 감소와 소비심리 위축을 초래해 경제 전체를 경직시킬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국내 가계의 이자상환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경고음도 들린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금융부채가 금융자산보다 많으며, 가처분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액 비율(DSR)이 40%를 넘는 ‘한계가구’는 전체 부채 가구의 12.5%(134만 가구)다. 그런데 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한계가구는 143만 가구로 늘어난다. 이들 가구가 보유한 금융부채 비율 역시 전체 금융부채의 29.1%에서 31.8%로 확대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정부는 가계부채와 부동산 시장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며 “금리 인상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가계부채의 질적 구조 개선의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5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최근 가계부채 증가의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집값이 5% 하락할 경우 LTV가 60%를 초과하는 한계 가구의 비중이 현재 6.5%에서 두 배 가까운 10.2%까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건설 의존도가 커진 탓에 주택 가격 하락 등 위험에 노출되면 자칫 시스템 리스크로 확대될 수도 있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 담보비율이 줄고 원금 상환 압력이 커진다. 이는 연체율 증가, 은행의 부실채권 증가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허문종 우리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건설경기와 전체 경기 간에 괴리가 커지면서 건설의존적 성장에 대한 우려가 확대되고 있다”며 “늘어나는 가계부채와 함께 향후 주택경기 위축이나 금리 상승 등에 따라 거시경제 안정성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로선 부동산 경기와 가계부채 문제 사이에서 고민이 커졌다.

물론 부채 상환만 원활히 이뤄진다면 시스템 리스크로 비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3분기 기준 국민은행(0.29%)과 우리은행(0.35%)·신한은행(0.23%) 등 국내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안정돼 있다. 그러나 저소득·저신용자의 경우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2011~2012년 ‘저축은행 사태’ 이후 낮은 수준을 유지하던 비은행예금취급기관의 가계신용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은 올 1분기 12.5%, 2분기 14.6%, 3분기 16.2%로 가파르게 증가 중이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부랴부랴 가계부채 안정화 대책을 내놓으면서 제1금융권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제2금융권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이규복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축은행의 대출 신용평가 모델이 정교하지 못하다”며 “만약 경기 충격이 발생할 경우 저축은행 연체율은 6%포인트가량 높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직장인들의 은퇴가 빨라지고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50~60대 장년층 부채가 뇌관이 될 것이란 걱정도 나온다.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의 연령별 대출 분포 조사에서 50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39.2%(5월 말 기준), 60대는 22.4%인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이 감소하는 50~60대가 전체 대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점은 대출의 부실화 우려를 낳는다. 장년층의 상환 능력 악화는 대출의 부실화와 고금리 제2금융권 대출 증가로 이어진다. 실제 60대의 자영업자 대출 중 66.2%(5월 기준)가 제2금융권 대출이었다. 50대도 61.6%나 됐다.

단기간에 가계부채를 줄이기는 어렵다.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가계대출의 속도와 고령·저신용·저소득자의 질이다. 이에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저신용자의 대출 건전성을 높이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태준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은행이 정책 방향을 시장과 소통함으로써 시장금리를 조정하듯 정부도 부동산 정책 예고제를 통해 가계의 ‘빚의 의지’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며 “중장기적으로 고정금리 대출 비중을 늘리고, 가계의 소득을 지원함으로써 대출의 질적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