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가 쓰러지고, 아버지는 목숨을 잃었다"
2019. 5. 24. 13:54ㆍC.E.O 경영 자료
"태극기가 쓰러지고, 아버지는 목숨을 잃었다"
"탄핵 불복" 6만명 시위대 목숨 건 사투… 구급차는 1대 뿐… 그날 5명이 세상을 떠났다
박아름 기자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입력 2019-05-24 11:23 [추적②] 언론이 침묵한 2017년 3월 10일의 진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선고를 발표하자 광화문‧경복궁 일대에 모여있던 좌파 단체들은 환호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탄핵에 반대하는 우파 단체들은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경찰벽에 가로막혀 안국역 4번 출구 인근에 고립돼 있었다. 막아서는 경찰과, 이 사실을 모른 채 행진하려는 뒤쪽의 군중들 가운데서 무고한 시민들이 깔렸다. 쓰러진 사람 중 5명이 숨졌다. 부상을 입은 사람은 무려 70여 명에 달했다.
현장에 있던 복수의 취재 기자‧우파 단체 관계자 증언 및 영상 자료에 따르면, 그날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한 기자는 “경찰과 경찰버스가 시위대를 에워쌌다. 이에 반발하는 시위대가 충돌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파 단체들은 헌법재판소 인근 사거리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갇혀 있었다. 기자들이 진입할 수 없는 정도로 과격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명이 넘어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복수의 애국당 관계자들도 “많은 인파가 몰려 압사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인지연 애국당 대변인은 "시위대 앞쪽 대열은 아예 무너져 있었고, 도미노처럼 애국시민들이 쓰러졌다”며 “하지만 경찰은 보고만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에 있던 대한애국당원 전모씨도 "곳곳에서 ‘살려 달라’는 외침이 들렸는데, 경찰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추적] 2017년 3월 10일에 무슨 일이 있었나?
쓰러진지 30분 뒤 병원 후송... 이튿날 숨져
이 가운데 시위대 가장 앞줄에서 2번째에 있던 이모씨(70대)가 쓰러졌다. 유가족 이모씨는 본지에 “당시 MBC 취재 영상 등을 확인한 결과, 아버지는 앞줄부터 2번째 줄에 계셨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태극기를 흔들고 계셨는데 일순간 아버지가 흔들고 있던 태극기가 화면에서 사라지고, 아버지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그때 바닥에 쓰러지신 것 같다. 시간은 오후 12시 11~15분 사이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본지가 유가족을 통해 확보한 부검감정서 중 의무기록에 따르면, 이씨는 2017년 3월 10일 12시경 안국역 4번출구 인근에서 쓰러졌다. 쓰러지고 난 뒤 30여 분이 지난 그날 오후 12시39분께 서울백병원으로 후송됐다. 하지만 결국 다음날 오전 6시39분에 사망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압착성질식사’였다.
다른 희생자 2명도 같은 원인으로 목숨을 잃었다. 대한애국당이 2018년 10월 소방청으로부터 받은 ‘3.10 탄핵선고 집회에 대한 구급활동 내역’에 따르면 김모씨(60대)는 2017년 3월 10일 오후 12시9분경에, 김모씨(50대)는 그날 오후 12시35분경 안국역 3번 출구 인근에서 인파에 깔려 질식, 사망한 것으로 파악된다.
4만~6만 인파 몰렸는데 엠뷸런스는 고작 1대?
문제는 희생자들에 대한 구조대 후송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현장에는 4만~6만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애국당은 "하지만 엠뷸런스는 고작 1대가 배치돼 있었다”고 말했다. 희생자들이 현장에서 심정지를 일으킨 뒤, 경찰에 의해 구조대에 후송되기까지의 과정도 미궁 속이다. 응급실에 도착한 후 기록된 응급일지, 사인이 적힌 부검 결과, 희생자들의 주검만 있을 뿐이다. 애국당 측은 "응급처치가 원활했다면 희생자를 줄일 수도 있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유가족 이모씨는 “당시 경찰이 우리 쪽에 설명하기로는 경찰 4명이 아버지를 이송했다"고 말했다. 그는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한 것도 경찰이라고 알고 있다"면서 "현장에 엠뷸런스가 진입할 수 없어서, (경찰이) 직접 아버지를 들고 뛰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인파가 몰려있던 헌법재판관 쪽에는 엠뷸런스가 없었다”며 분개했다.
그는 “혼잡한 상황에서 경찰이 인파를 밀치며 이송하는데엔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며 “엠뷸런스로 이송했다면 더욱 빠른 시간에 병원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왜 가까운 서울대병원을 놔두고 (거리가) 먼 서울백병원으로 환자를 옮겼는지도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사고가 난 안국역에서 서울백병원 까지는 1.6km 거리, 서울대병원은 1.1km 거리다.
이씨는 "사고 7~8개월이 지난 후 경찰이 '시위대가 몰려 구조대 현장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응급처치 미미에 대한 책임을 소방당국에 묻기는 어렵다'는 조사 결과를 통보했다"고 말했다. 세계 10대 도시인 서울 한복판에서, 대낮에 시위대 여러명이 목숨을 잃은 전무후무한 참사가 벌어졌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2년 만에 사건 수면위로… 책임자는 여전히 ‘오리무중’
하루에 수명의 시위대가 생명을 잃은 사실이 그동안 수면아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탄핵 정국 속에서 우파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곳이 없었던 것이 주요 원인의 하나로 파악된다. 당시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에 참여한 우파 시민들을 향한 비하성 발언은 상식을 넘어섰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 유가족들은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을 촉구할 수 없었고, 이들의 희생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유가족단 대표인 이모씨를 제외한 나머지 유가족들은 신변‧생계 등을 이유로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희생자 중 한명인 김모씨의 부인은 지적장애인이어서 진상규명에 나설 수 없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다른 희생자 유가족은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받는 것 같다"며 불안감을 호소했다.
결국 '희생자'는 있지만, '책임자'는 없는 상황이 초래됐다. 대한애국당과 유가족들이, 당시 미흡했던 응급조치 총책임자인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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