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논설위원
차베스式 소통 끝은 국가 파괴
獨裁者들 ‘광장 정치’ 좋아해
집권자 잘못 숨기고 대중 선동
청와대, 의회·기자 만남 꺼려
팬미팅類 TV 쇼는 소통 아냐
단식 황교안 대표와 대화 급해
“알로 프레시덴테.(대통령 각하, 안녕하세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지난번 국회에서 땅 없는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까다로운 절차와 법 때문에 언제나 땅 없는 서러움을 풀 수 있을지 캄캄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나라 라티푼디오(대농장소유제)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겠소.”
베네수엘라의 고(故)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 매주 일요일 전국에 생중계되는 방송을 통해 전화 상담을 직접 했다. 무려 4시간 동안 대통령과 국민이 직접 통화를 하며 민원을 시원하게 해결해줬기 때문에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이뿐 아니라 매일 낮 대통령궁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는데, 목적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다. 주로 하층민들이 민원을 들고 기다리면 이 중 몇 명은 대통령을 직접 만나 어려움을 해결했다. 국민은 절차가 복잡한 대의민주주의보다 해결이 빠른 차베스식 직접민주주의에 열광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전 세계 석유매장량 1위에 1950년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7424달러로 세계 4위의 부국이던 베네수엘라는 차베스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거덜이 났다. 지금까지 540만 명의 국민이 난민이 돼 다른 나라로 떠났고, 지금도 매일 평균 6만3000명이 도저히 살기 어렵다며 엑소더스 행렬에 가담하고 있다.
나치즘, 파시즘이나 독재자들은 군중대회 같은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을 좋아한다. 자신의 잘못은 숨기고 대중을 선동해 정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들의 공통점은 대의민주주의 요체인 의회와 비판·견제 기능을 하는 언론을 ‘가짜뉴스’라며 공격해 무력화한 후 민주주의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버린다. 최근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주의 파괴 현상은 총칼이 아닌 합법적 선거 등 제도 속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의민주주의보단 직접민주주의를 선호한다. 취임 직후 국정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현 정부는 ‘촛불 혁명’을 통해 탄생한 정부라고 강조한다. 국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통과와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탄핵 결정으로 대선이 치러져 당선됐는데도 말이다. 조국 사태 때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 대해 문 대통령은 “국론분열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 행위로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했다. 광화문이 아닌 서초동만 직접민주주의로 보기 때문이다.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어 문 대통령이 소통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가진 첫 행사가 19일 열린 ‘국민과의 대화’인데 현 정권 소통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지난 2년 반 동안 기자회견을 3차례밖에 하지 않을 정도로 기자와의 만남을 꺼리는 문 대통령은 300명의 시민을 모아 놓고 무작위로 지명해 질문을 받는 형식을 택했다. 청와대를 취재하는 300명 정도의 기자는 뒷전이다. 역대 대통령들도 이런 형식을 시도했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청와대는 300명의 방청객을 ‘작은 대한민국’이라며 대표성을 강조했지만, ‘팬 미팅’ 같다는 평가가 많다. 1만6000명의 지원자와 선정된 300명 중 문 대통령 반대자가 얼마나 있었을까. 지난번 KBS 기자와의 단독 대담처럼 껄끄러운 질문이나 답변에 대한 반박은 아예 불가능한 구조다. 친여 방송인인 김어준 씨의 표현대로 ‘도떼기시장’이었고, 문 대통령은 그저 잘 듣고 온화한 미소만 지어도 본전은 할 수 있다. 이러니 20주 연속 서울 아파트 가격이 상승하는데도 “우리 정부는 부동산 정책에서는 자신 있다고 장담한다”고 한다. 또 북한이 우리 정부를 향해 ‘삶은 소 대가리’ 운운했는데도 “남북관계는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현실과 다른 얘기를 한다.
문 대통령에게 이런 TV 쇼할 시간은 있어도 야당 만날 시간은 없다. 108석의 국회의원이 소속된 제1야당 대표가 단식하면서까지 만나달라고 하는데도 “시간이 없다”며 냉대한다. 야당은 차 한잔 나누기도 아까울 정도로 쓸모없고, 결국엔 없어져야 할 존재인 양 여긴다. 대의정치 아닌 거리정치를 중시하면 경제·안보 포퓰리즘이 앞서고 편 가르기와 갈등은 폭발한다. 그 대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 동맹 등 지난 70여 년 어렵게 구축한 대한민국의 근간은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