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안내 中企 47%가 빚으로 버티는 시한부… "차라리 IMF 때가 나았다"

2019. 12. 12. 08:23C.E.O 경영 자료

[고용 83% 떠맡는 中企가 신음한다] [1] 쓰러지는 경제 버팀목
"IMF땐 정부가 기업 살리기 나섰는데 지금은 제조업 되레 죽여
회사 이름 밝히지 마라, 소문나면 은행이 번개처럼 자금 회수"


지난달 28일 찾은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서는 '공장 매각'이라는 플래카드부터 눈에 들어왔다. 3~4년 전만 해도 이곳은 평일 저녁은 물론 토요일에도 공장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2017년부터 내수가 시원찮더니 올해는 수출까지 곤두박질치면서 일감이 크게 줄었고, 하나둘 공장 문을 닫고 있다. 60여 도금 업체 중 여러 곳이 문을 닫았고, 폐업을 고민 중인 곳도 부지기수다.

지난달 28일 경기 안산시의 도금업체에서 한 외국인 근로자가 작업을 하는 모습. 이 업체는 규모에서 도금업계 상위 10%에 드는 우수 업체지만, 물량 감소를 견디지 못하고 외국인 근로자를 11명에서 7명으로 줄였다. 중소기업들이 고사 위기에 처하면서 올해 네 차례 있었던 외국인 근로자 고용 신청은 모두 미달을 기록했다. 2004년 제도 도입 이후 처음이다. /김연정 객원기자
이는 2019년 대한민국 중소기업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강원도에 있는 자동차 부품 제조 A사는 2년 전보다 매출이 30% 줄었다. 직원 75명 중 11명을 내보냈다. 이 중 5명이 외국인 근로자다. 하루 10시간씩 돌리던 생산 라인은 지금은 2~4시간도 돌리지 못한다. A사 대표는 "우린 52시간 근로제 걱정도 안 한다. 저절로 지켜질 지경"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630만곳(2017년 말)이다. 여기에서 1599만명이 일한다. 기업 수의 99.9%, 고용의 82.9%를 책임지는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다. IMF 외환 위기, 세계 금융 위기와 같은 초대형 쓰나미에도 꿋꿋이 버텨온 한국 중소기업은 내수 경기 악화, 수출 부진, 최저임금 급상승,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유례없는 4중고(重苦)에 처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산소마스크로 연명(延命)하며 하루하루 버티는 시한부 존재"라고 한탄했다. 본지가 취재한 수많은 중소기업이 "망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회사 이름은 밝히지 말아달라. 어렵다고 하면 은행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자금 회수에 나선다"고 했다.

IMF 외환 위기 이후 첫 역성장 위기


중기 제조업은 올해 역성장 위기에 처해 있다. IMF 외환 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2.01%를 기록한 이후 2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 중소 제조업 매출액 증가율은 7.66%였다. 지난해 2.77%로 급락했다. 올해는 1분기, 2분기 각각 -7.3%와 -0.5%를 기록했다. 하반기 사정이 나아져도 마이너스 성장 위기에 놓여 있다. 매출마저 쪼그라드는 '수축 시대'를 맞으면서 수익성 악화를 매출 증가로 버텨온 것도 이젠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중소 제조사 대표들은 한결같이 "IMF 외환 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면서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당시에는 내수가 급격히 얼어붙었지만, 환율이 폭등(원화 가치 하락)하면서 수출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다. 수출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은 내수는 물론 수출까지 어려워진 상황이다. 올해 수출은 2001년(-12.7%)과 2009년(-13.9%) 이후 처음으로 두 자릿수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수출이 어려워지니 내수에 몰리고 생존을 위해 저가(低價) 수주 경쟁에 나서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55년째 인쇄업을 해온 B씨는 "이미 쌓인 빚 때문에 공장 문을 닫을 수도 없는 데다 손해 보더라도 일감을 따내야 대출 돌려막기라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쇄 업계는 이미 장당 '원'이 아닌 '전'으로 가격을 매길 정도로 단가가 3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금속공업조합 소속 C 대표는 "같이 죽어가는 꼴"이라고 했다.

절반이 잠재적 '좀비 기업'

빚으로 연명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융 이자만큼도 영업이익을 못 낸 중소기업(이자 보상 배율 1 미만 기업)은 지난해 47.2%나 됐다. 이 비율은 2014년보다 9%포인트 늘었다. 중기 제조사 두 곳 중 한 곳이 잠재적 좀비 기업인 셈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제한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프레임 제조사 D 대표는 "IMF 외환 위기 때는 정부가 기업 살리기에 나섰지만, 지금은 정부가 제조업 하기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한 금형 업체 사장은 "가격이 우리 절반인 중국 기업과 경쟁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밤낮없이 공장을 돌려 납기를 20~30일 더 빨리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주 52시간으로 '납기'라는 유일한 무기마저 뺏겼다"고 했다. 이 업체는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을 피하기 위해 직원을 58명에서 49명으로 줄였다. 두부 제조업을 하는 E씨는 "최근 2년간 최저임금은 30% 올랐는데 납품 단가는 10~15% 정도 떨어졌다"며 "마누라랑 아들·딸 불러서 하는 가족 기업이 돼버려 '사장' 소리 듣기도 민망하다"고 말했다.

부산의 한 용접 업체 대표는 "정부 사람들은 '요즘 제조업 하는 분이 애국자입니다'라는데, 그게 우리가 제일 듣기 싫은 소리"라고 했다. 이유를 묻자 "애국한다고 희생한 이 중에 후손 잘된 사람 있습니까"라고 했다.





[안산=양모듬 기자 modyssey@chosun.com] [최인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