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산불 의 법칙

2009. 4. 6. 09:35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산불이 나면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깨진다. 큰 짐승이든 작은 짐승이든 평소에 쫓고 쫓기던 관계에서 벗어나 다 같은 방향으로 살길을 찾아 달려간다. 위기의 한순간이 정글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또 이런 말을 한다. 단세포 편모충(鞭毛蟲)인 클라미도모나스는 암수의 구별 없이 세포 분열로 번식을 한다. 하지만 환경이 변해 질소 같은 것이 부족해지면 둘로 갈라졌던 것이 다시 한 몸으로 합친다고 한다. 위기에 대처하는 이러한 능력 때문에 클라미도모나스는 발생생물학이나 유전학의 모델 생물로 많이 이용된다. 우리는 평균 3년 만에 한 번꼴로 난을 겪어온 민족이다. 국난의 산불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한 방향으로 뛰었고 환경이 어려워지면 클라미도모나스처럼 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관과 민이, 계층과 분파가 서로 증오하고 분열하고 얼굴을 할퀴다 나라를 잃는 실향민이 된 적도 있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작가로 구한말 세계 각처를 탐사한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한국을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러시아의 자치구 프리모르스키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 가는 그곳 이주민들은 달랐다. 깨끗하고 활기차고 한결같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국의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심과 게으름과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어 있었고, 아주 당당하고 터프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평상시보다 위기에 강한 민족, 남이 멍석을 펴주는 것보다 제 스스로 일을 할 때 신명이 나는 한국인의 기질을 일찍이 그녀는 한국의 난민을 통해 간파한 것이다. 어느 민족보다도 부지런하고 우수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 변해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숍 여사는 이렇게 희망의 말로 결론을 맺는다. “고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도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면 참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은 어떤가. 지금 세계시장의 정글은 불타고 있다. 그 불길은 한국을 향해 번져 오고 북한은 로켓을 발사해 불난 데 부채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가. P리스트, J리스트, K리스트…. 끝없는 검은 리스트의 행렬 속에서 우리의 가슴은 더욱 암담하다. 백 년이 지났는데도 비숍 여사가 말한 ‘정직한 정부’, 그리고 ‘참된 시민의 발전’은 아직도 먼 곳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눈을 돌리면 세계의 무대에서 타오르는 또 다른 불꽃이 보인다. WBC의 다이아몬드에서 뛰는 한국의 야구선수들이, 세계피겨선수권의 아이스링크에서 나는 김연아가, 그리고 한마음으로 열광하는 모든 한국인의 얼굴이 보인다. 함께 외치고 함께 감동의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또 미사일이 아니라 축구공을 놓고 남북한 젊은이들이 대결하는 잔디밭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비숍을 놀라게 했던 프리모르스키 난민들의 유전자가 어디엔가 마르지 않고 우리 핏속을 흐르는 게 보인다. 그러나 미안하다. 겨우 백 년 전 이방의 한 여인의 시각으로 한국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