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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해도 잡지사 기자로 종횡무진했다. 셋째가 생겼다. 아무도 못 봐준다니 별수 있나 싶어 사표를 냈다. 1년쯤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다는 야무진 계획과 함께. 내처 일할 땐 몰랐는데 집에 있어보니 엄마 손길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절감했다. 13년을 엄마로 살다 2001년 시민 단체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내게는 필요 없는 물건을 다른 이들과 나누면 어떨까 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주부 자원 활동가들과 길거리에 좌판(?)을 펼쳤다. 그때만 해도 100호점을 앞둔 사회적 기업 ‘아름다운가게’ 탄생의 출발점이 될 줄은 몰랐다. ‘알뜰 주부 정신’으로 무장한 아름다운가게의 살림꾼, 이혜옥 상임이사 얘기다.
지난 28일 아름다운가게 안국점에서 1일 열린 100호점 개점을 위한 자선음악회 준비로 바쁜 이혜옥 상임이사(54)를 만났다. 아름다운가게 모든 매장이 일반인이나 기업체 등의 기부와 참여로 문을 열고 유지됐지만 100호점은 좀 특별하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와 서울시향이 도움을 준 자선음악회 티켓 판매를 통한 수익금으로 매장을 열기 때문. 이 이사는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100호점이 주는 의미가 큰 만큼 이번 음악회는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매장으로 만들기 위해 기획했다”며 “티켓을 산 모든 분들이 바로 100호점 매장을 내주시는 분들”이라고 고마워했다. 매장 수익금 전액도 소외된 어린이들을 위해 쓰일 예정이란다. 아름다운가게는 2002년 10월 종로구 안국동에 1호점을 연 뒤 지금까지 매달 평균 1개 이상 매장을 열 정도로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당시 아무도 안 하려고 해서 얼떨결에 마음 약한 제가 맡은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지만 1호점 점장이던 그에게 100호점이 주는 의미는 남다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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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iznaeil.com/board/data/PraGrp/423/int2.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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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가게 안국점 매장 내부와 새 주인을 기다리는 기증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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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 주부들의 길거리 벼룩시장에서 가능성을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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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문을 열어 그 해 1억5천만 원의 매출을 올리고, 이후 성장을 계속해 2008년엔 매출 120억 원을 달성했다. ‘사회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기업’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은 이유다. 때문에 2007년 11월 취임한 이 이사의 경력도 화려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그는 주부 자원봉사자로 출발했다. “제가 원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엄마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 때쯤 평소 하고 싶었던 시민 단체 자원봉사 활동에 눈이 가더군요. 그때 처음 참여연대와 인연을 맺었는데, 전직이 있으니 언론에 나온 기사들을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같이 일하던 주부들이 열 분 넘게 계셨는데, 어느 날 벼룩시장을 열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해외에선 재활용 가게들이 굉장히 활성화됐지만 국내에는 아직 제대로 된 형태가 없을 때니까요.” 2주에 한 번씩 길거리에 ‘알뜰시장’을 열었다. 각자 집에서 가져온 물건을 내놓으면서 ‘이걸 누가 사 갈까’ 의구심이 든 게 사실. 한데 반응이 꽤 좋더라고. 재미가 붙어 친구에 친척까지 물품 기증 반경을 넓혀갔다. 우리에게는 아직 ‘헌 물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하면 되겠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 다음부턴 발로 뛰었다. “살던 곳이 아파트라 처음엔 엘리베이터 앞에 박스 하나를 놓고, 간단히 메모를 써 붙였어요. 그런데 아침에 가보면 박스가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고마워서 반상회에 가서 인사를 했죠. 그랬더니 ‘누구한테 주자니 욕먹을 것 같고, 버리자니 벌 받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고맙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부녀회장님하고 상의해서 아파트 전체를 대상으로 기증함을 놓았죠. 다섯 달 정도 모으니 1호점 오픈할 물량이 되더라고요.” 뿐만 아니다. 이 이사는 한 번 이사할 때마다 버리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걸 보고 동네 부동산중개소를 일일이 찾아 계약하러 오는 고객들에게 전해달라며 전단지를 뿌렸다. 이 작은 아이디어가 부동산 정보 제공 기업 ‘부동산114’와 함께 하는 ‘이사 캠페인’의 시작이었다. 초창기부터 함께 한 그보다 아름다운가게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재단 측이 상임이사라는 중책을 그에게 맡긴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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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가게 이끄는 주축은 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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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름다운가게 매장에 진열된 물품들의 평균가는 2천500원. 의류부터 신발, 주방용품, 식기, 유아용품 등 다양한 물품들이 새 주인을 기다린다. ‘알뜰 정신’이 아름다운가게의 출발인 만큼 주 고객층은 아무래도 30~50대 주부들. 자원봉사자를 일컫는 ‘활동천사’도 주부들이 주축이다. “우리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주부들 정서와 맥이 닿아 있어요. 게다가 어디서 구매했고, 어디에 쓰이다 어떻게 버려졌는지, 가격은 어느 정도로 매겨야 하는지, 이런 물품들의 흐름을 주부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간 주부들의 자원봉사 영역이 굉장히 제한적인 게 사실인데, 아름다운가게는 부담 없이 와서 뭔가 할 수 있는 장을 펼쳐드린 의미가 컸다고 봐요. 지금은 6~7년째 이어오는 분들도 있어서 이분들에게 뭔가 전문적인 일을 맡겨드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이를테면 새로 합류하는 자원봉사자 교육 같은.” 언젠가 제품 만족도를 조사했을 때 ‘만족한다’ ‘매우 만족한다’는 답변이 95퍼센트 이상일 정도로 제품 질에 대한 신뢰도 높은 편이라고. 여기엔 아름다운가게를 이끄는 간사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도 한몫했다. “초기 가장 우려한 점이 남이 쓰던 물건을 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어요. 보시면 알겠지만 저희 매장은 정말 깨끗하고 우아하게 꾸며놨어요. 이전하기 전 1호점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고급 부티크로 오해했다니까요. 의류는 세탁업체 크린토피아의 협찬을 받아 세탁팩이 붙은 상태로 진열했고요. 그 전략이 통했는지 초창기에는 줄이 지하철역까지 늘어섰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명이 물품 세 개 이상 못 사게 하는 규정을 만들었을 정도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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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과 나눔 통해 보니 ‘사람이 희망’이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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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가게에 기증되는 물품은 일상적인 생활용품부터 제작된 지 80년이 넘은 야마하 피아노(가수 김민기씨가 소장했단다), 유명 화백의 작품, 박지성 선수 같은 유명인들이 내놓은 물품처럼 소장 가치가 있는 고가의 귀중품까지 다양하다. 사연을 품은 기증도 한둘이 아니다. 지난달 오픈한 목포 2호점이나 강남책방 4호점(아름다운가게는 헌책방도 운영한다)도 그에겐 마음 한 구석에 둔중한 울림을 주는 곳. “매장을 열 때 공간 확보와 인테리어에 필요한 1천4만 원을 ‘씨앗 기금’이라 불러요. 지난달 오픈한 목포 2호점은 ‘이정숙 씨앗 기금’ 덕분이었어요. 목포 1호점에서 자원봉사를 하시다 매장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돌아가신 분이에요. 너무 죄송한 일이잖아요. 한데 남편 분과 자녀들이 오셔서는 ‘생전에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매일 집에 오면 가게 얘기만 했다. 아내를, 엄마를 이렇게 행복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면서 씨앗 기금을 내놓으시더라고요. 살아생전 책을 정말 좋아했다는 어떤 분은 ‘내 책들을 가장 의미 있게 두고 떠나는 길’이라면서 저희 쪽에 기증해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대요. 그분이 소장한 1만 권으로 강남책방을 오픈했죠. 물론 연인과 헤어진 뒤 기증한 커플링처럼 재미있는(?) 사연이 있는 기증품도 많아요. 하하하.” 이렇게 생긴 판매 수익은 100만~200만 원이면 완치될 수 있는 병인데 돈이 없어 고통 받는 이,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경야독해도 대입 수시 원서 접수비 10만 원이 없어 지원하지 못한 고3 학생, 복사 한 장 하려면 하루 종일 산을 내려와 읍내까지 나가야 했기에 성능 좋은 복사기 한 대가 목마르던 활동가 세 명의 자그마한 자리산 살리기 운동 시민 단체, 네팔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갠지스 강 유역의 상습 수해 지역 주민을 위한 긴급 대피용 보트, 식수용 우물, 화장실 등에 소중하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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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아이디어, 참신한 시도 빛 발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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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가게가 전문화된 시스템을 갖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은 구성원들의 무수한 노력과 아낌없는 투자 덕분. 이곳의 운영 방식은 시민들이 기증한 물품을 판매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단순한 구조다. 하지만 운영에 있어 이들의 노력과 아이디어는 그리 간단치 않다. 취지에 공감하는 기업들과 적극적인 제휴는 대한통운의 기증품 무료 택배나 롯데홈쇼핑의 ‘크린박스 캠페인’(물건을 배송 받은 상자에 기증품을 넣어 보내도록 한 캠페인) 등으로 구체화됐다. 버스를 개조한 이동 매장, 벼룩시장, 자체 온라인 매장 ‘생생몰’(mall1004.org) 오픈, 대안무역 커피 ‘히말라야의 선물’ 판매라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참신한 시도도 눈에 띈다. 특히 폐기물로 분류된 재료를 모아 가공하고, 독특한 디자인을 가미해 완전히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에코파티 메아리’ 사업은 미국 뉴욕현대미술관에서까지 전시·판매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초창기 우리에겐 롤모델이 없었잖아요. 기증 문화가 생활화된 미국의 구세군, 영국의 옥스팜 등에 간사들을 보내 무조건 배워 오게 했어요. ‘신사유람단’, 모든 걸 다 빼 오라는 뜻의 ‘문익점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여서요. 하하하. 현재 서울과 경기는 ‘용답되살림센터’와 ‘경기그물코센터’에 집하된 물품들이 분류와 수선 작업, 가격 책정 작업을 거친 뒤 매장에서 판매되고, 중소 도시는 물류 이동 거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 매장 생산터에서 이런 작업을 하도록 운영하는데, 이는 모두 미국과 유럽식 장점을 벤치마킹해 이원화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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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중고 쇼핑몰이 경쟁 상대?!… 되살림 확산되면 그저 반가울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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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여느 시민운동 단체와 달리 수익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아름다운가게 운동이기에 수익성을 높이는 문제는 중요한 과제다. 초반, 정체성 확립에 있어 내부적인 혼란을 겪은 것도 이 때문. 투명성과 도덕성 역시 돈을 다루는 이들로서는 생명과도 같은 문제다.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한 시점에 아름다운가게를 이끄는 이 이사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정체성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리가 됐어요. 어쨌든 우리는 기업적 마인드로 수익을 창출해 사회적 약자와 나누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니까요. 각 매장 매니저들이 월 매출 목표 잡아 달성하는 문제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 게 사실이에요. 1기 이사회는 대부분 시민운동 쪽에 계신 분들이었는데, 마케팅의 중요성 때문에 2기 이사회는 기업 CEO들을 대거 모셔 왔죠. 또 이런 시민 단체는 투명성에 손상이 가면 존립 자체가 위험하다는 걸 처음부터 잘 알고 시작했습니다. 한데 사업이 확장되고 프로세스가 복잡해지니까 몰라서 못 하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최근 삼일회계법인에 의뢰해 한 달 동안 재무, 회계, 내부 통제 등 전 영역의 컨설팅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에요. 우리가 투명해질수록 기부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결과 아닐까요?” 앞으로 아름다운가게는 전국 지자체 시군 단위까지 250개 매장을 여는 게 마지막 목표. 한두 번 입고 버리는 싼 물건을 대량 생산하는 중국에서 비롯된 ‘패스트 패션’ 풍토도 걱정이고, 임대료나 물류비 등 지속적인 지출 상승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문제 등 걸림돌은 산적해 있다. 하지만 그는 긍정적이다. “요즘 우리 경쟁 상대가 생겼는데, 바로 온라인 중고 쇼핑몰”이라고 귀띔하면서도 “사실은 되살림이라는 나눔의 철학 확산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지향점이기에 마냥 반갑다”며 웃는 걸 보니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던 그는, 하여 언제나 ‘에너지 풀가동’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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