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6. 04:06ㆍ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벼 600가마니가 농협 앞에 쌓인다. 가마니 안에는 올해 수확한 벼가 아직 껍질도 안 깐 채로 들었다. TV에서 많이 보던 ‘야적투쟁’이다. 1년 농사 지어봐야 자칫 인건비도 못 건지는 애물단지라 바닥에 내팽개칠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렇지 않다. 행여 낟알 한 톨이라도 상할까 받침대 위에 사뿐사뿐 쌓는다. 비에 젖을세라 비닐 덮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우나 고우나 농민에게는 자식 같은 것들이다. 11월11일 농업인의 날, 전남 구례군 농민들은 그렇게 자식들을 한데로 내몰았다.
이 광경을 멀찍이 바라보는 최석환씨(57)의 마음은 착잡하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광평리에서 한평생 흙만 일구며 살아온 최씨는 할 수만 있다면 농사 일을 접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자기 땅 5950m²(1800평)에서 아내와 함께 논농사를 짓는다는 최씨는 올해 40kg 벼 120가마니를 수확했다.
최씨는 지난해에도 비슷한 양을 수확해 40kg 벼 한 가마니당 5만3000원을 받았다. 그런데 벼를 수매하는 구례농협 RPC(Rice Processing Complexes, 미곡종합처리장) 측은 올해 수매가를 4만원으로 책정한다고 밝혔다. 올해 전라남도 쌀값(80㎏ 기준. 쌀값과 벼값은 다르다. 벼 120kg를 도정하면 대략 쌀 80kg를 얻을 수 있다)이 평균 14만1000원으로, 지난해 15만8000원보다 1만7000원이나 떨어진 데다 지난해 팔리지 않은 재고미가 남아돈다는 이유였다.
농협 RPC 요구대로 4만원을 받을 경우 올해 최씨가 쌀농사로 버는 돈은 겨우 480만원이다. 정부가 농지 소유자에게 지급하는 직불금을 더해도 큰 차이가 없다. 661m²(200평)마다 10만원씩 하는 모 심기 비용이며 4만원씩 하는 벼 베기 비용까지 감안하면 실제 최씨 손에 들어오는 돈은 너무 적다. 아무리 최씨가 소농(小農)이라고 해도 1년 농사의 대가로는 터무니없다.
풍년 기근에 타들어가는 농심
농협에서 영농자금을 빌리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느라 학자금 대출을 받은 것까지 합해 최씨가 진 빚은 수천만원에 이른다. 쌀농사 말고도 날품을 파는 등 이런저런 일로 네 식구가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형편이다. 최씨는 “옛날에야 1년 농사 지어서 나와 안식구 밥만 먹어도 만족하며 살았지만, 자식들 학비 내고 앞으로 결혼까지 시킬 생각 하면 내가 왜 농사를 지었나 싶다. 이런 소리 하면 자식들 상처받을까봐 집에서는 대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지역마다 가격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전국적이다. 경기·충청·경상 등 전국 모든 지역의 벼 수매가가 10% 이상 떨어졌다. 시중 쌀값이 크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쌀값이 떨어진 이유는 한마디로 쌀이 남아돌아서다. 전남의 경우 지난해 90여 만t을 수확했으나 공공비축미와 RPC 매입분을 빼고도 30여 만t이 남았다. 이 물량은 농가가 직접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올해 농사마저 풍년이 들면서 남아도는 쌀은 더욱 늘어났다. 이른바 ‘풍년 기근’이다. 시장 원리로 치면 쌀값 하락이 당연한 일인지 몰라도, 전통적으로 농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추곡수매제 등을 시행했던 우리 정서로 보면 안타까운 상황이다. 농민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니 김종구씨(55·구례군 광의면)처럼 아예 쌀을 팔지 말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모든 농민이 수확한 쌀을 집에 쌓아두고 6개월만 내놓지 않으면 정부와 농협이 두 손 들고 설설 길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건 김씨처럼 대규모 농사를 짓는 이들이나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당장 올겨울이 가기 전에 이런저런 빚잔치를 해야 하는 빈농으로서는 선뜻 하기 힘든 일이다.
구례군 농민 단체가 요구하는 올해 벼 수매가는 40kg 한 가마니에 5만8000원이다. 농협과는 1만8000원이나 차이가 난다. 구례농민회 김봉영 회장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벼 한 가마니에 7만원은 받아야 적정한 금액이다. 직불금으로 보충할 수 있는 금액이 한 가마니당 1만2000원 정도인데, 이를 제한 5만8000원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농민 단체가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며 1차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곳이 각 지역 농협 RPC다. RPC는 추수기에 벼를 사들여 도정·보관하면서 쌀을 판매하는 곳이다. 농협이 운영하는 농협RPC는 시중에 유통되는 쌀의 절반 이상을 처리한다. 이곳이 벼를 얼마에 사들였느냐에 따라 민간 RPC도 그에 맞춰 수매가를 결정한다. 농민이 RPC를 투쟁 대상으로 삼은 까닭이다.
대북 지원하면 수매가 크게 올라
전남 구례군 농민들이 지역 농협 앞에 벼를 쌓고 있다.
2005년 전체 벼 수확량의 20~30%를 정부가 사들이는 추곡수매제가 폐지되기 전까지만 해도 벼 수매가는 정부와 국회에 의해 결정됐다. 시장 쌀값도 거기에 따라갔다. 지금은 공공비축미 가격만 정부가 정한다. 그러니 농협에서 사들이는 가격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매년 1조3000억원 정도를 벼 수매 자금으로 농협에 지급한다.
농협은 앓는 소리를 한다. 시장 쌀값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마당에 수매가를 높이면 적자가 누적된다는 것이다. 구례농협의 관계자는 “농약과 비료 등 농자재값이 오른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내년 쌀값도 떨어질 게 염려되는 가운데 수매가를 높이면 경영악화를 피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농민 단체의 생각은 다르다. RPC는 적자지만, 농협은 매년 흑자를 보기 때문이다. 정영석 전농 광주·전남연맹 사무처장은 “아무리 작은 지역 농협도 매년 20억원 이상 흑자를 낸다. 농협이 RPC 핑계를 대면서 농민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농협의 존재 이유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RPC의 방만한 경영도 문제 삼았다. 정 사무처장은 “RPC는 대표적인 고비용 저효율 기관이다.
쌀을 찧고 판매하는 등 운영 기간이 사실상 1년에 서너 달 정도밖에 안 되면서도 연봉 6000~7000만원을 받는 직원이 서너 명씩 근무한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농협 RPC가 대형마트나 예식장 등 도매상에게 주로 쌀을 판매하면서 이른바 ‘저가미’를 내놓아 시장 가격을 교란시킨다고 정 사무처장은 지적한다. 농협이 아무리 적자 타령을 해도 농민이 듣기에 ‘씨알이 안 먹히는 소리’라는 것이다.
농협에 대한 농민의 분노에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그 아래 깔려 있다. 농민은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가 대북 쌀 지원을 중단한 것이 최근 쌀 대란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꼽는다. 매년 40만t씩 북에 보내던 쌀이 국내에 비축되면서 쌀값 하락을 부추겼다는 것이다(40만t은 우리나라 전체 쌀 수확량의 1/10에 달하는 양이다). 2008년산 재고쌀의 경우 40kg 가격이 5000원 이상 싸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최근 쌀 대신 중국산 옥수수를 북한에 보냈다. 농민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전덕중 전농 정책국장은 “농촌경제연구원 자료에도 북한에 쌀을 보내면 벼 수매가가 40kg당 7000~8000원씩 상승하는 걸로 나와 있다. 이런데도 옥수수를 북한에 보내는 걸 보며 화병으로 드러눕지 않을 농민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정영이 구례 여성농민회 부회장은 “과거에는 북한에 쌀을 보내자고 하면 ‘김정일만 도와주는 것 아니냐’라며 고개를 젓는 농민이 많았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않는다. 남은 논이 많고, 북은 밭이 많은 지형 구조 속에서 대북 지원이 남·북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인식한다”라고 말했다.
농민들은 정부가 쌀값 폭락을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본다. 지난해 이른바 ‘MB물가’를 만들어 물가 집중관리 품목 1위에 쌀을 선정한 것을 예로 든다. 아예 2014년 쌀 전면개방을 앞두고 국내 쌀값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시장경쟁력을 확보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김봉영 구례농민회장은 “동네 순회를 다녀보면 이명박 정부에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주민이 대다수다. 지금 개 사료가 1kg에 1만원인데, 쌀은 1kg에 2천원 남짓밖에 안 한다. 우리가 개만도 못한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그래도 농심을 달래는 척이라도 했는데 이 정부는 막무가내라는 한탄이 터져나온다”라고 말했다.
정부 주도로 지난 4월 출범한 ‘농업선진화위원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다. 위원회는 ‘기업농 육성’과 ‘농업보조금 개편’을 골자로 내세웠다. 중소농 중심의 한국 농촌에는 미래가 없으니 기업형 농가에 각종 보조금을 지원해 농촌 사회를 개편하겠다는 것이다. 면세유·화학비료 등 일반 농가에 지원되던 것을 기업형 농가에 주려는 계획이다. 정영석 사무처장은 “일부 대형 농가는 한동안 살아남겠지만, 결국 정부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파트너는 기업이다. 모든 농민이 몰락하거나 농업노동자로 변할 게 뻔하다. 누구를 위한 선진화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11월11일 농업인의 날, 구례군 농민들은 “구례 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은 40kg 벼 수매가를 5만8000원 으로 책정하라”고 요구하며 집회를 열었다. |
농민 운동의 ‘힘’도 약해진 게 사실이다. 전농 한 간부는 “농민회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 중 하나인 전남 나주시만 해도 농민 평균 연령이 62세다. 과거에는 시위가 있으면 몽둥이도 들고, 집에서 똥물도 퍼 나오면서 분노를 표출했지만 이제 그럴 힘이 없다. 농민의 힘은 점점 약해지는데 정부 힘만 강해지고 있다”라며 씁쓸해했다.
11월12일 정오. 전남 무안군에 있는 전남도청 앞 광장에 벼가 쌓였다. 진도·해남·나주·곡성·장흥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농민들이 트럭에 벼를 한가득 싣고 모였다. 모두 3만 가마니다. 농민회 간부는 “밤새도록 쌓아도 다 못 쌓는다. 나중에 다시 실어오는 것도 엄청난 일이다”라며 한숨을 쉰다. 그래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게 그들의 분노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11월17일 농민들은 서울로 올라간다. 정부와 지자체가 2008년산 재고쌀을 수매하고, 대북 쌀 지원을 법제화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여의도공원에 모여서 소리 지르고, 쌀도 집어던지고 할 것이다. 매년 되풀이되는 풍경 같지만, 해가 갈수록 농민의 가슴에는 찬 서리가 맺힌다. 천하의 근본에서 사회적 소수로 전락해가는 농민은 올해도 어김없이 ‘아스팔트 농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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