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차세대 먹을 거리 경쟁

2010. 1. 12. 21:01C.E.O 경영 자료

“베낄 것 없고 베껴선 못 이긴다” 기업보다 정부가 앞장

韓·日 차세대 먹을 거리 경쟁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그룹과 계열사의 모든 동력을 가동해 신성장 동력을 반드시 찾아내자.”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신년사다. 올해 주요 그룹 총수들의 신년사에 빠지지 않는 단어가 ‘신성장 동력’이다. 새해 재계의 화두도 ‘차세대 먹을 거리 개발’에 집중됐다. 올 들어 기업들이 부쩍 새 먹을 거리 찾기에 골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해 세계 기업들의 키워드는 생존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앞에서 우선 살아남는 게 급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한국 기업들은 여기서 더 나갔다. 살아남기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위기를 기회로 바꿔냈다. 해외 경쟁기업들이 납작 엎드려 있는 사이 뒤집기와 격차 벌리기에 성공했다. 자신감이 살아났다. 새로운 사업에 눈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과거 많은 한국 기업들의 성장 모델은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기술의 90%를 가져오고 나머지 10%를 자체 기술로 채워도 그런대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좋게 보면 남의 강점을 보고 배우는 ‘벤치마킹’이라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베끼기’였다.

그러나 이제 ‘일본 베끼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더 베낄 것도 없고, 베껴선 이길 수도 없다. 그만큼 한국이 컸지만 아직은 충분치 않다. 기술 대국 일본과 떠오르는 제조업 대국 중국의 사이에 끼어 있다. 조금만 방심해도 중국에 끼이고 일본에 뒤처진다. 모범답안은 자명하다.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일본의 아성을 허무는 것이다. 특히 한·일 간의 신성장 산업 경쟁은 이미 곳곳에서 접점을 만들며 불꽃 튀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양국이 정책적으로 밀어붙이는 신성장 산업의 얼개가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최근 5년간 경쟁에선 한국 판정승
일본의 대표적인 신성장 전략은 2004년 5월에 나온 7대 신성장 산업 육성 전략이다. 연료전지, 정보가전, 로봇, 콘텐트, 건강복지 기기 및 서비스, 환경 에너지 기기 및 서비스, 비즈니스 지원 서비스였다. 이는 당시 노무현 정부가 내건 10대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과 비슷했다. 노 정권은 디지털TV 방송, 디스플레이, 지능형 로봇, 미래형 자동차, 차세대 반도체, 지능형 홈네트워크, 디지털 콘텐트 및 소프트웨어 솔루션, 차세대 전지, 바이오 신약 및 장기, 차세대 이동통신을 차세대 먹을 거리로 꼽았다. 이 중 디지털TV 방송, 디스플레이, 지능형 홈네트워크 사업, 미래형 자동차는 일본의 정보가전 육성 분야와 일치했다. 또 일본이 지정한 연료전지 분야는 한국의 차세대 전지사업이나 미래형 자동차의 일부로 포함돼 있었다.

로봇과 콘텐트 분야는 완전히 겹쳤다. 게다가 한국의 바이오신약 및 장기 사업마저 일본의 건강복지 기기 및 서비스 산업에 포함돼 있었다. 전경련 미래산업팀 김민성 연구원은 “세계적인 트렌드를 공통적으로 반영한 데다 두 나라의 산업이 모두 제조업 중심이어서 분야가 겹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5년간의 한·일 신성장 산업 경쟁은 일단 한국의 판정승 쪽에 가깝다. 한국은 연료전지 등의 분야에서 맹추격해 일본과 세계 시장을 갈라 먹는 경지에 올랐다. 일본은 한국에 빼앗긴 LCD 시장이나 반도체 시장에서 기업 간 공동생산 계획 등의 추진으로 시장 재탈환을 시도했으나 4~5년이 지나면서 성과가 거의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당시 한국의 투자 규모는 일본 기업을 앞섰고 양산 효과를 활용해 가격경쟁력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일본이 월등히 앞서있던 미래형 자동차와 로봇 분야에서도 한국은 격차를 좁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 ‘생각하는 로봇’ 개발 중
한국은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과거의 신성장 동력 추진 계획을 전면 개편했다. 지난해 5월 향후 5년간 3대 분야 신성장 동력에 24조5000억원의 재정을 투입하는 ‘신성장 동력 종합추진계획’을 확정했다. 3대 분야는 ▶녹색기술산업 ▶첨단융합산업 ▶고부가서비스산업이다.

이 같은 계획은 정권 교체로 출범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내각이 다듬고 있는 ‘신성장 전략’과도 일부 겹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신계획이 내수 중심적이긴 하지만 환경·에너지 분야는 한국의 녹색기술 산업 분야와 닮은꼴이다. 일본 정부는 구체적인 성장 전략 추진 일정과 내용을 올 6월까지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일본의 닛케이 비즈니스 1월 4일자 커버스토리는 ‘2015년 일본을 구할 꿈의 기술’을 소개했다. ‘녹색성장’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한국과 일맥상통하나 구름 잡는 청사진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다. 1400조 엔에 달하는 개인 금융자산도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우리 돈으로 ‘경’이 넘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이 중 일부만 첨단기술 분야로 흘러가도 충분한 연구개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닛케이가 주목한 첫째 기술은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다. 일본 혼다는 2001년 세계 최초로 두 발로 걷는 휴머노이드 ‘아시모’를 선보였다. 이후 운동 능력이 크게 향상돼 현재는 시속 6㎞까지 보행이 가능하다. 사람으로 치면 살과 뼈는 갖춰졌고, 앞으로는 학습 능력을 갖추는 것이 과제다. 혼다기술연구소는 “아시모가 자신의 경험을 기억해 스스로 프로그램을 생성하는 것도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일단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프로그램을 복제해 비슷한 로봇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 로봇 기술의 발전 속도에 따라선 만화영화 주인공인 아톰이 현실에 등장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둘째는 바이오에너지다. 이것이 실용화되면 기름 대신 물로 가는 자동차가 나올 수 있다. 수소 연료전지를 활용, 물에서 수소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전기 에너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현재는 희귀금속인 백금(플래티늄)을 촉매로 쓰고 있는데, 이것을 값싼 자연효소로 바꾸는 것이 관건이다. 소니 첨단소재연구소는 사람이 마시는 콜라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는 음악 플레이어도 선보였다. 통신회사 NTT도코모는 신발에 발전기를 설치해 사람이 걸으면서 휴대전화 배터리를 충전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현재는 3시간을 걸으면 휴대전화 1대를 완전 충전할 만큼 전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밖에 ▶태양광 발전과 전기자동차를 활용한 스마트 그리드 ▶식물공장(공장식 농업)도 차세대 유망 기술로 주목했다.

과감한 투자, 해외 인재도 활용
한·일 경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인재가 곧 기술이라는 것이다.

역대 한국의 먹을 거리도 인재 양성을 통해 이뤄졌다. 반도체 등에서 일본을 추격해 앞지른 삼성의 경영이념도 인재 제일주의였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수석연구원은 “안팎의 인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재는 기술 확보와 직결된다. 기술 확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R&D 투자를 늘리고, 해외에도 연구소를 세워 해외 기술 인재와 기술 네트워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미래형 자동차나 지능형 로봇 등 선진국에 비해 열세인 분야에서는 선진 기업과의 공동연구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 위원은 “유망 분야에 대한 스피드 경영이 한국의 강점”이라며 “이전처럼 과감한 설비투자 전략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기업들이 모험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지식경제부 임채민 차관은 “유망한 분야에는 과감한 베팅이 필요한데 공정성이나 투명성만 강조하는 분위기에서는 그런 베팅이 어렵다”고 말했다.

허귀식·주정완 기자 kslin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