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희,하찮은 일에도 최선 다해야 프로페셔널

2010. 2. 28. 18:01분야별 성공 스토리

“68세, 지금도 회장님의 은행 심부름 합니다”

한국비서협회장에 추대된 ‘최고령 비서’ 전성희씨
“하찮은 일에도 최선 다해야… 은퇴시기는 내 자신도 몰라”

경향신문 | 글 유인경·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 입력 2010.02.28 17:39

 

"흔히 비서의 미덕으로 충성심을 강조하지만, 리더십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비서가 상사의 마인드를 공유하지 않고서는 상사나 조직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니까요. 30여년간의 비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비서협회가 글로벌시대에 걸맞은 전문비서들의 요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명품 비서' '최고령 비서' '최장수 비서' '비서계의 대모' 등 별칭도 많은 전성희 대성 이사(68)가 최근 열린 사단법인 한국비서협회 총회에서 신임 회장으로 추대됐다. 전 이사는 대성 김영대 회장의 수석 비서다.

"저는 칠순 가까운 지금도 회장님의 은행 심부름을 합니다. 하지만 매일 새벽 프랑스어·일어·중국어 공부를 하는 등 실력을 키웠기에 독일 헨켈사와 합작을 추진할 때 회사 대표협상자로 나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지요. 하찮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프로페셔널이 되고, 최고경영자의 진정한 파트너로 대우받을 수 있습니다."

이화여대 약대 출신인 전 이사는 우연한 기회에 비서가 됐다. 1979년 남편(고 심재룡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과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당시 상무이던 김 회장의 비서를 맡았다. 결혼·유학 등을 이유로 퇴직이 잦은 미혼 여비서 대신 오래 일할 기혼 여비서를 찾는다는 말에 김 회장 친구인 남편이 권했다. 초기엔 수동식 타이프라이터로 같은 문서를 50장 이상 쳐서 뽑고, 텔렉스 용지에 파묻혀 사는 전쟁터 같은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든 것은 비서직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었다.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6시면 출근해 통·번역, 전화 교환, 정보처리, 의전업무는 물론 꽃꽂이와 각종 심부름까지 다 해내 김 회장으로부터 '전천후 인재'라는 찬사를 받았다. 전 이사가 캐나다에 교환교수로 간 남편을 따라갔다 3년 만에 귀국하던 날, 김 회장은 공항에 자신의 차를 내보내 환영했다. 그동안 영어 통·번역 담당, 스케줄 관리 담당, 차 심부름 담당 등 3명의 비서를 고용하면서 1인 3역을 하던 전 이사의 빈자리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대성의 김민홍 고문은 "전 이사 덕분에 여비서는 젊고 예쁜 여자여야 한다는 편견이 깨졌고, 최근 신입사원 모집에 여사원 채용도 늘어났다"고 전했다. 전 이사는 "회장님이 '명예회장이 돼도 같이 일하자'고 하니 내 은퇴 시기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요즘 주중엔 가야금과 한국무용을 배우고 주말엔 손녀를 돌보느라 바쁘다. 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른 단발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할머니 비서'는 "자기계발의 행복이 커야 업무도 즐겁게 할 수 있다"며 웃었다.

< 글 유인경·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