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조직’이 부르니 의원 300명 달려오다

2010. 4. 15. 09:16C.E.O 경영 자료

‘신의 조직’이 부르니 의원 300명 달려오다

시사IN | 김동석 | 입력 2010.04.14 10:15

지난 3월 초 지구촌의 중심부(엔진)인 워싱턴 D.C.에 유태계 지도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유럽과 중남미,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몰려왔다. 미국 내 회원 중에서는 지난 5년 동안 연례총회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은 핵심 인원만 초청됐다. '신의 조직'이라 불리는 미국이스라엘공공정책위원회(AIPAC·에이팩)가 세계 유태인들을 향해서 '긴급 상황'을 선언했다. 1967년 '6일 전쟁'부터 따져서 지난 50년 이래로 이스라엘과 미국 관계가 최악이라는 판단에서다. 에이팩 지도부는 관계 악화의 핵심이 '동예루살렘'이기 때문에 권력 간 갈등이 아닌, 이스라엘의 존망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진단했다.

에이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미국이 하루라도 빨리 개입했더라면 유태인 수십만명을 살렸을 것이라는 통렬한 반성에서 출발한 유태계 미국인의 로비 단체이다. '전 세계 유태인과 이스라엘의 보호'를 목표로 하는 이들은 철저하게 미국의 납세자이자 유권자 신분을 강조하기 때문에 선출직 정치인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이들의 요구를 절대로 외면할 수 없다. 에이팩 연례총회 기간에는 의회가 휴회를 선언할 정도이다. 이들은 늘 미국에 대한 애국심에 호소한다. '이스라엘 보호'를 100% 미국 시민의 문제로 워싱턴에 제기하는 방식이다.

에이팩을 이끄는 각 지역 지도부가 매년 워싱턴에 모여서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펼치는 행사가 연례총회(AIPAC Policy Conference)다. 이 연례총회는 1990년대의 클린턴 때도, 2000년대의 조지 부시 때도 이스라엘에 대한 완벽한 충성 선언을 받아낸 바 있다. 2008년 대선 후보인 오바마와 매케인을 동시에 불러서 이스라엘과 유태인에 대한 충성을 선거 공약으로 받아낸 곳도 바로 이 에이팩 연례총회장이었다. 당시 오바마 후보는 8000여 유태계 지도자 앞에서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포기할 수 없는 수도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신의 조직'이라 불리는 에이팩의 2010년 연례총회가 지난 3월20일부터 나흘 동안 워싱턴 D.C.에서 열렸다. 7000여 유태계 지도자가 전 세계로부터 모여들었고 유태계 미국 대학생 약 3000명이 워싱턴에 집결했다. 이 총회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으로부터 첨단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하려고 할 때인 1980년과,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이슬람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을 제거하자고 핏대를 올리며 중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이면서 핵 개발을 선언한 2007년에 이어 세 번째로 비상 상황을 선언했다. "단호한 어조로 명확하게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라"는 메시지가 넓은 컨벤션센터를 뒤덮었다. 주제는 'Israel, Tell the story'이다.





ⓒAP Photo 2010년 에이팩 연례총회장에서 리 로젠버그 에이팩 회장(오른쪽)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왼쪽)을 소개하고 있다.

예년과 분위기가 달랐다. 표정은 한결같이 진지했고 분위기는 매우 침울했다. 겨우 2주일 전에 미국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그것도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 중인 가운데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서의 정착촌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과 유엔이 분노를 표출했고 바이든 부통령은 유감을 표시하면서 일정을 당겨 돌아왔다. 힐러리 국무장관이 특별성명을 내기도 했으며 팔레스타인은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별렀다. 유엔이 가장 강도 높게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에이팩은 미국보다 오히려 유엔을 향한 성토장이 되었다. 유엔은 우선 '이란'에 주목해서 제 구실을 하라고 강하게 주문했다. 이란을 향한 유엔의 제재가 이란의 핵 개발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면서 중동 지역 평화를 위해 초점을 흐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 국방 지원비 180% 증액 법안 통과시키자"


3월17일 오바마 대통령은 폭스 뉴스에 출연해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계획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에이팩은 이스라엘 네타냐후 내각을 워싱턴으로 부르고 오바마 대통령을 에이팩 총회 연설자로 초청했지만 백악관은 인도네시아 방문을 핑계로 사양했다. 그 뒤 오바마 대통령은 건강보험 개혁안을 이유로 인도네시아 방문을 취소했지만 에이팩의 요청은 외면했다.

총회 둘째 날 주 연설자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나섰다. 청중석에는 네타냐후 내각도 앉아 있었다. 에이팩 리 로젠버그 회장은 힐러리 국무장관을 유태인들의 변함없는 친구라고 소개했는데, 1990년대 이후로 그녀가 에이팩 총회장에 참석해서 연설한 내용을 빠짐없이 예로 들며 그녀를 이스라엘의 영원한 친구로 추어올렸다. 힐러리 클린턴 장관은 이스라엘이 미국의 둘도 없는 맹방이고 그래서 '한 몸통의 두 나라'라고 비유했지만 동예루살렘의 정착촌 건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어조로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은 이스라엘 평화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에이팩 내 네타냐후에 반대하는 세력이 간간이 환호하기도 했지만, 이처럼 냉랭하고 침울한 분위기는 총회에 여덟 번이나 참석한 필자가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이번 총회 일정은 총회 주제이기도 한 'Israel, Tell the Story'에 따라, 사흘 동안 단호한 어조로 명확하게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라고 교육하고 마지막 날에 의회에 로비를 벌이는 식으로 짜였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한 대이란 경제제재 조처와 2011년 이스라엘 국방 지원비를 180% 증액하는 법안을 의회에 상정해 통과시키는 게 주요 목표다. 상원에서는 뉴욕 주 출신 민주당 의원 찰스 슈머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출신 공화당 의원 린지 그레이엄을, 하원에서는 일리노이 주 출신 민주당 제시 잭슨 주니어 의원과 인디애나 주 출신 공화당 마이크 펜스 의원을 내세웠다. 위 두 가지 법안은 이미 초안을 만들었고 대부분의 의원으로부터 동의 서명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단지 총회 마지막 날 회원들이 법안 초안을 들고 자기 지역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전달하는 과정을 남겨두고 있었다.

총회의 정점은 8000여 명이 한자리에서 동시에 식사를 하는 만찬이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연설했다. 만찬장에는 상·하원 의원 300여 명과 백악관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이 참석했으며 이스라엘에서 내각의 대부분이 날아왔다. 네타냐후 총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섯 번이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반복해 강조하면서 정착촌 건설을 양보할 의사가 없음을 확고히 밝혔다.

하워드 코어 에이팩 사무총장은 네타냐후 총리가 힐러리 국무장관·오바마 대통령과 만나게 된다면서 미국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 최초의 나라라고 말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자리에 참석한 300여 명의 상·하원 의원이라고 말했다.

이번 에이팩 연례총회의 관전 포인트는 미국 내 유태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결집을 통해서 미국과 모국 간의 틀어진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어떻게 움직이느냐이다. 유태인들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서 전쟁도 불사할 태세이고 미국의 국제정책도 바꿀 정도의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해놓았다.

그에 비하면 같은 분쟁 지역 출신이지만 한국계 미국인(한인 동포)들은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만 강조해도 90% 민족성원으로서 임무를 다하게 된다. 200만명이 넘는 한국계 미국 시민도 유태인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미국 납세자요, 유권자다. 모국의 안보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순식간에 결집하는 미국 내 유태인들을 보면서 한인 동포들의 정치적 결집을 숙고해본다.

김동석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