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닷컴 창간 특별인터뷰]
김승연 회장 "대한생명 주가 지나치게 저평가 돼있다"
김 회장은 "하지만 삼성생명과 비교해 볼경우 대한생명의 현 주가는 지나치게 저평가 돼있다"며 "적어도 1만2000원은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그동안 정부가 잡고있었던 7년간의 굴레를 벗어났으니 이제 훨씬 더 경영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며 "곧 한화생명으로 사명도 바뀔 예정인데, 앞으로 주가도 재평가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 ▲ 2010년5월11일 한화그룹 본사에서 김승연 회장이 회사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채승우 기자
-대한생명 공모주 청약에 우리사주조합 청약률이 상당히 높았다.
"이번 공모 때 우리사주조합이 98%의 청약률을 기록했다. 회사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직원이지 않겠나. 그들이 자신의 연봉 두 배 이상을 들여 청약에 참여했다는 것은 회사 가치를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직원들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대한생명의 적정 주가는 얼마로 보나.
“1만2000~1만3000원은 가야 한다고 본다. 내가 확신하는 건 7년 동안 온갖 법적인 문제로 뒷다리가 잡혀 있었는데, 이제는 경영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다. 훨씬 더 큰 발전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직원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1981년 선친이 돌아가셨을 때와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가 가장 힘들었다. 하루에 수천억씩을 메워야 했고 사나흘 연속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밤을 샌 후 누군가와 얘기를 했는데, 상대방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고 하더라. 보통 사람들은 없던 것을 얻게 되면 포만감이 생긴다. 반대로 있던 것이 없어지면 얼마나 허무하겠나. 내가 그랬다. 외환위기 때는 집문서까지 내놓았고 경영권 포기각서까지 썼다."
-선대 회장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갑자기 그룹 경영을 책임져야했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선친은 이리 폭발사고가 났을 때 ‘개인재산을 모두 헌납하겠다’고 밝히고 90억원을 사회에 헌납했다. 90억원을 헌납하고 내가 물려받았기 때문에 사실은 마이너스 상태에서 물려받았다. 그래서 선친이 돌아가신 상황에서도 울 겨를조차 없었다. ‘죽기 살기로 3년만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볼만 하면 계속하고, 아니면 손을 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년 정도 하니 해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더라. 그래서 3년 뒤 어느 비오는 날 선친 묘소로 가서 ‘어려웠던 3년이지만 해보겠습니다’고 신고식을 했다.”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할 때와 포기할 때 잘 드러났지만, 회장님은 ‘나를 믿고 따르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경영스타일을 보여줬다.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과 참모들이 그런 점 때문에 회장께 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대로 회장께서 최종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기 때문에 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는 어떻다고 생각하나.
“두 가지가 다 맞을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잘못 먹었다가는 그룹 전체에까지 영향이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솔직히 전문경영인은 그런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3000억원이 이미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사실 리먼브러더스 사태는 경제적인 천재지변에 가깝다. 그런 사태가 터지고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이 올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시대 변화를 주로 느끼는가.
"작년부터 '세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최근 트위터라는 게 유행이더라. 그래서 트위터를 잘하는 여직원에게 잠깐 올라오라고 해서 어떻게 하는지 봤다. 여직원이 트위터에 ‘나 지금 회장하고 있어’라고 올렸더니 상대방에서 ‘어떤회장?’ 이렇게 답이 오더라. 여직원이 ‘우리 회장님’ 이렇게 치니까 또 바로 ‘웃기지마!’라는 글이 올라오더라.(웃음) 상대방이 못 믿으니까 여직원이 나보고 직접 트위터에 글을 올려보라고 하더라. 그때 내가 그랬다. ‘내가 직접 올릴 줄 알면 당신을 왜 불렀겠냐’고. 세대가 정말 많이 변했다.”
-학생들에게 창의성 개발을 위해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과학경진대회를 계획한다고 했는데,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면.
“첫째가 교육이라고 본다. 학생들은 하얀 종이에다 미래를 스케치해나가는 시기다. 하지만 우리 학생들은 입시와 내신성적에 메달리면서 창의성을 개발할 여지가 없다. 또 학교에서는 전교조 교사들이 편향된 교육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어떤 분으로 기억하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매우 어려워 했다. 내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가끔 오시면 같이 자자고 하시더라. 그럼 구석에서 혹시 아버지 잠을 깨우지나 않을까 조심해서 자고 있으면 ‘자냐?’고 종종 물으셨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회사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죽 듣고 자랐기 때문에 한국화약에 대해서는 나만큼 더 잘 아는 사람 없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남자로서 참 멋있는 분이었다.”
-요즘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신성장동력사업에 대해서이다. 5년, 10년 뒤에 얼마나 급속한 변화가 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과거에는 탈 것이나 먹을 것, 가전 등 미국제가 가장 좋았다. 어느날 그것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과 중국도 제조업 강국이다. 한국은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까. 계속 제조업으로 가야할까, 아니면 금융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할까.
”밴쿠버올림픽 때 느꼈지만 한국 사람은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만큼 우수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제조업 중 상당 부분은 중국과 인도도 따라올 것이다. 금융은 미래산업이 될 수 있다. 올림픽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보여주었듯이 ‘올림픽이 별거야’ 이런 정신으로 달려들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쉬면서도 회사 일 생각을 하지 않을 때가 없다고 했는데, 빌 게이츠는 일주일 동안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지내기도 한다. 휴가는 어떻게 보내고, 개인적인 재테크는 어떻게 하나.
”재테크는 사업하는 것이 전부다. 매출이 는다고 내 생활에 변화가 있는 것 아니다. 개인 재테크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휴가는 그렇더라. 일을 잊으려 해도 조금 한가해졌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회사 일이 생각난다. 사업하는 게 직업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더 욕심을 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생존경쟁이라서 그렇다.”
-전문경영인이라면 내리기 힘든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많다고 했는데, 일각에서는 그런 경영 스타일을 ‘제왕적 경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처음 사업을 물려받았을 때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은 현재 대부분 돌아가셨다.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 보니 모두 빈손으로 가더라. 개인이 챙길 수 있는 것은 한도가 있다. 하지만 그룹 총수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다. 나도 이 일을 하면서 도저히 못 쫓아가겠다 싶을 때는 손을 떼든지, 전문가를 시키든지 해야지 않겠나.”
-이리 폭발사고로 마이너스인 상태에서 기업을 시작했고, IMF 때는 알짜 회사도 팔았다. 집문서까지 내놓고 각서까지 썼다고 했다. 회사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도 많았다. 기업은 왜 하느냐.
“내 천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29세인 직원들을 봤을 때 불안스럽다. 내가 29세에 회장 됐을 때 주변 사람들은 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했다. 기업 외에 잡스러운 것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친구도 선배도, 후배도 없었다. 내가 생각 하나, 판단 하나 잘못하면 나뿐만 아니라 직원들까지 문제가 된다는 걸 알았다. IMF 때 집문서까지 내놓은 경험이 있지 않나. 그래서 우리 임직원들에게 희망을 줘야지, 허탈감을 주면 안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