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남자들 큰손이 되다

2010. 5. 29. 08:42C.E.O 경영 자료

30대 남자들 큰손이 되다

시사저널 | 김민정 | 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 입력 2010.05.28 21:01

얼마 전 스위스 바젤에 다녀왔다.

이곳에서 바젤 월드가 열렸기 때문이다. 바젤 월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시계 박람회이다. 전세계적으로 유통되는 고급 시계의 70% 이상이 이 박람회에서 팔려나간다. 경제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유럽과 미국을 비롯해 전통적인 고급 시계 소비국들이 지출을 줄이면서 지난해 시계 매출은 마이너스 22%를 기록했다. 단, 예외적인 나라가 있었다. 2010년 바젤 월드에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시계 매출이 성장한 나라는 한국'이라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한 명품 매장 쇼윈도우에 남성용 제품이 진열되어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당시 바젤 월드에 참석했던 외국 브랜드 관계자들과 기자들은 이 내용을 무척 흥미로워했다. 곳곳에서 '한국 시장만이 유독 성장한 비결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쏟아졌다. 전체적인 매출 비중만 놓고 보면 한국 시장은 아직 미미한 단계이지만, 향후 지속적으로 매출 성장이 기대된다는 점과 중국 시장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두 가지 이유에서 한국 시장에 거는 기대가 컸다. 시계는 자동차 다음으로 남성들이 관심을 갖는 고급 소비재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 시내에 산재한 백화점들이 경쟁적으로 시계 매장을 확대하는 것도 바로 이처럼 '커지는 남성 시장'을 겨냥하는 것이다.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스타일리스트 정은주(가명)씨는 한 회계사들의 모임에 나가 정기적으로 강연하고 컨설팅을 한다. '남자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옷차림과 애티튜드'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는 그녀는,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회계사 초년병들을 위해 구체적인 옷차림 방법에서부터 소품 사용법, 쇼핑 노하우 등을 가르쳐준다. 반응이 의외로 뜨거워 아예 컨설팅업체를 차릴 계획까지 세웠다는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는 흥미롭다.

"맨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 깜짝 놀란 것이 의외로 패션과 옷차림에 문외한이 많다는 점이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만 한 탓인지 어떤 옷을 어떻게 입어야 자신이 돋보이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눈에도 촌스러워 보인다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슬슬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나는 고객들이 누구인가. 적어도 회계사를 찾아올 정도라면 보통 이상의 재력가들일 것이다. 그들은 옷차림도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멋쟁이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스스로의 경쟁력을 옷차림을 통해서 업그레이드하려는 전략을 쓴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촌스러우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명품 선호하고 브랜드 충성도도 높아져

정씨가 컨설팅을 진행하면서 또 한 번 놀란 것은, 회계사들이 추천을 하거나 조언한 내용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체화하는 속도와 능력이 굉장히 빨랐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발견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가지 완전히 변신을 한 채 나타나곤 했다. 씀씀이의 수준 역시 높은 편이다"라고 말했다. 쇼핑할 때의 단위가 일반인들의 그것에 비해 서너 배 높다는 사실 역시 이들의 특징이다. 국내 브랜드보다는 명품을 선호하고, 좋아하는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 역시 높다. 한번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발견했을 때는 지속적으로 구매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사례는 남성들이 스스로를 위해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돈을 쓰기 시작했다는 얘기이다. 덕분에 남성용품 시장은 불황을 모르며 날로 커지고 있다.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쇼핑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백화점을 비롯한 유통가에서의 화두는 '남성'이다. 과거의 남성들은 자신을 위한 물건을 사는 행위를 엄마 혹은 아내에게 위임했다면, 요즘 남자들은 쇼핑의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쇼핑에서 오는 재미와 만족감을 알아차린 것이다. 특히 요즘 젊은 남성들이 그렇다.

얼마 전 현대백화점에서 발표한 조사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조사 대상은 대한민국의 20~30대 미혼 남성들이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이 백화점에서 가장 많이 지출한 항목은 여성의류(16.6%)였다. 여자친구나 아내를 위한 선물용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2010년 현재 이 순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1위는 명품(14.8%), 2위는 남성 정장(13.0%) 그리고 3위가 여성의류(12.5%)이다. 신세계백화점의 통계는 더 놀랍다. 30대 남자의 매출 비중이 20대 여자의 그것을 넘어섰다. 전통적으로 백화점 주 소비층이 30~40대 여자라고 하지만, 20대 여자의 소비력도 그에 못지않다. 그런데 2006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남성 소비 군단의 매출이 3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어났고, 그리하여 20대 여성들의 소비력을 능가하게 된 것이다.

굳이 통계나 보고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남성 패션 시장과 관련 있는 곳에서 일하다 보면 이런 상황이 피부로 와 닿는다. 몇 해 전부터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 남성 품목 가운데 하나가 뷰티 제품이다. 피부 관리에 눈뜨기 시작한 남성들이 늘어나자 국내외 브랜드들은 앞 다투어 남성 전용인 '옴므' 라인을 출시했다. '여자 피부와 남자 피부는 다르다'라는 명제 아래 대대적인 마케팅을 실시한 결과 국내 남성화장품의 시장 규모는 2004년 3천5백억원에서 2008년 5천7백억원, 지난해는 7천억원 등으로 연평균 7%대로 꾸준하게 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압구정동의 한 명품 시계점에 3천만원짜리 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부자' 증가와 샐러리맨 급여 수준 상승도 한몫

명품 시장에서 남성들이 큰손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의류나 액세서리, 잡화에 대한 남성 고객들의 브랜드 충성도는 여자의 그것을 넘어섰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이다. 여러모로 대한민국 남성들이 돈 쓰는 '맛'을 들였다는 얘기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남자들이 돈을 쓰기 시작한 것일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쇼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두 벌의 양복으로 한 계절을 나고, 술 마시는 데 돈을 더 쓰며, 쇼핑이라도 할라치면 도살장 끌려가는 기분에 빠진다는 그들 대부분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들'이라는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제 아무리 '한국 남자들의 소비가 늘었다'고 외쳐본들 그 실체에 대한 분석 없이는 주장 자체가 희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쯤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조사 결과 두 가지 있다. 해마다 세계 부자에 관한 통계를 발표하는 캡 제미나이의 부자 보고서가 그 첫 번째이다. 이들이 발표한 자료를 놓고 보면 한국의 백만장자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물론 지난해 경제 위기로 잠시 줄어들기는 했지만, 홍콩이 60% 이상 감소한 것에 비하면 한국은 10% 내외이니 미미한 수치(?)라고 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시장 자체를 놓고 보았을 때 아시아·태평양 시장에서 한국의 부자 비중은 상승세라는 사실이다. 이들이 정의하는 부자는 '부동산 자산 외에 현금 100만 달러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금융 자산 10억여 원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이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수치는 지난해 국세청이 발표한 월급쟁이 급여 수준이다. 연봉 1억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10만명을 넘어섰다. 경기가 제아무리 나빠도 돈을 버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 게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돈 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연봉보다 성과급을 더 많이 받는 대기업 샐러리맨들과 늘어나는 전문직 종사자, 부자 부모를 둔 2세들, 해외 유학파, 금융계 종사자들의 증가는 대한민국 남성 소비 시장의 패턴 변화를 불러왔다. 이들이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남성 소비 시장이 급팽창한 것이다.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새로운 세대가 출현한 것 또한 남성 소비 주체론에 힘을 싣는다. 외모와 패션에 민감한 메트로섹슈얼족이나 매력 있는 강한 남자인 위버섹슈얼족의 출현, 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그루밍족과 감수성이 남다른 초식남 등의 등장은 남성 소비 주체론을 이해하는 중요 코드이다.

김민정 | 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