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방촌에 들어선 아름다운 은행

2010. 8. 5. 08:49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희망을 대출해드립니다"…쪽방촌에 들어선 아름다운 은행

노컷뉴스 | 입력 2010.08.05 06:03 A

 

[CBS사회부 조혜령 기자]

기초생활수급자인 김종운(56·서울 용산구)씨는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을 은행에 저축했다가 다음 달 수급비가 깎이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지체장애인인 김 씨가 장애연금을 포함해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고작 60여만원. 김 씨는 임대주택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돈을 쪼개 저축을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김 씨는 "은행에 예금을 하면 구청에서 경제력이 있다고 판단해 기초생활수급비를 줄인다"며 "내가 모은 돈인데도 저축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이처럼 기초생활수급자 또는 일용직 노동자가 은행을 이용하기란 여의치 않은 상황. 병원 치료 등 목돈이 필요한 경우에도 이곳 주민들은 돈을 빌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이 같은 불편함을 덜기 위해 동자동 주민들이 모여 설립한 것이 바로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이다. 쉽게 돈을 빌릴 수 없는 쪽방촌 주민들을 위해 이들 스스로 힘을 모아 무담보 신용대출을 해주기로 한 것.

지난 2월 동자동 사랑방에서 주민 5명이 시작했던 고민은 어느덧 쪽방촌 주민들을 위한 '은행' 설립을 앞두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자생적인 대출 시스템을 만든 적은 과거에도 있었다. 행당동과 금호동에 거주하는 철거민이 중심이 돼 설립한 논골신협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3평 남짓한 공간에 거주하는 쪽방촌 주민들이 앞장서서 공제조합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합의 대표 격인 이태헌 추진위원장은 "조합이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외부에 조합을 알리는 것이 조심스럽다"면서도 "살 낙이 없는 기초생활수급자들에게 무엇을 해줘나 하나 고민하던 중 지역자활공동체를 구상하게 됐다"고 운을 뗐다.

5급 지체장애인인 이 위원장도 기초생활수급자이긴 마찬가지. 최근 동자동 사랑방에서 만난 이 씨는 허리 통증으로 30분 이상 앉아 있기 힘든 상황에서도 조합의 설립 취지에 대해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이 동네는 기초생활수급권자가 굉장히 많이 살아요. 몸이 불편하거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일거리를 갖다 줘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 씨는 동자동 공제협동조합을 '생계용 조합'이라고 묘사했다. 주민들이 몸이 아프거나 급히 돈이 필요할 때 조합이 이들의 생계를 이어가도록 돕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실제로 조합원 중에는 손자의 양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조합에 가입한 70대 노인도 있었다.

열 살이 안 된 손자와 손녀를 키우고 있는 유모(75) 씨는 수급비 60만원 가운데 4만원을 매월 조합비로 꼬박꼬박 내고 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려면 여유 자금이 필요한데 통장에 돈을 모으면 그만큼 수급비가 깎인 채 지급되기 때문이다.

특히 한 살 때 백혈병에 걸렸던 손자를 위해서라도 유 씨에겐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하는 조합이 꼭 필요하다.

유 씨는 "손자 앞으로 보험 하나 못 들어놓은 게 늘 마음에 걸렸다"며 "앞으로 아이들을 위해 꾸준히 조합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목표 금액 아직 부족…그래도 '할 수 있다'

추진위원 5명으로 시작된 조합의 규모는 8월 현재 조합원 60여명으로 불어났다. 내년 3월 출자금 2000만원을 목표로 모은 돈은 지금까지 260여만원.

고물을 수집하거나 술 한 병 줄이면서 돈을 모았지만 목표금액까진 아직 턱없이 부족한 수준. 하지만 이들의 가슴 속엔 '적은 돈으로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합 설립 과정에 참여한 안정현(54)씨는 "적은 액수지만 우리 조합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회원들이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한다면 내년에 2000만원을 모으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김종운 씨도 "조그만 돈이라도 알뜰하게 모으면 무엇인가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조합에 가입했다"면서 "조합비를 내는 동안 건강을 회복해서 나중에 꼭 임대주택 보증금을 마련하겠다"고 희망을 내비쳤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31일 조합원들이 동자동의 한 교회 강당에 모여 서로 인사하는 첫 만남을 가졌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날 참석한 30여명의 주민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는 '탈퇴하지 말고 함께 가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이태헌 위원장은 "우리 힘으로 일어서기 위해 추진하는 일인 만큼 힘이 들더라도 내년 3월 우리 손으로 창립총회를 열 것"이라며 "내년에 출자금 2000만원이 모이는 대로 2.5%의 저리로 조합원 대출 서비스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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