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한 시대의 퇴장과 새 시대의 시작

2010. 8. 12. 09:10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대한민국 축구, 한 시대의 퇴장과 새 시대의 시작

오마이뉴스 | 입력 2010.08.12 08:21

 

[오마이뉴스 이준목 기자]

끝과 시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있다.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워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의 끝은 곧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2010년 8월 11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나이지리아전은 한국축구에게 있어서 한 시대의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을 동시에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경기였다. 17년간 한국축구대표팀 부동의 수문장으로 활약하며 한국축구사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간판 수문장 이운재는 자신의 132번째 A매치를 끝으로 정든 대표팀 유니폼을 벗었다.

남아공월드컵을 이끈 허정무 감독에 이어 새롭게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조광래 감독은 자신의 A매치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조광래 감독의 취임과 함께 세대교체의 기수로 첫 대표팀에 발탁된 90년생 막내 윤빛가람은 자신의 A매치 데뷔전에서 첫 골까지 기록하며 성인대표팀 승선을 자축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을 향한 새로운 대표팀과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이기도 했다.

이운재, 태극마크를 벗고 이제 전설을 입다

이운재는 한국축구사에 있어서 감히 역대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유일한 수문장이었다. 1994년 3월 미국과의 평가전을 통해 A매치 신고식을 치른 이운재는 그해 미국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독일전 후반에 주전 수문장 최인영을 대신하여 처음 월드컵 무대에 나서는 행운을 누리며 주목받았다.

이운재가 한국대표팀의 간판 수문장으로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 건 2002년 한일월드컵이다. 김병지와 월드컵 개막전까지 치열한 주전경쟁을 펼쳤던 이운재는, 안정감 면에서 히딩크 감독의 낙점을 받아 월드컵 본선 7경기에서 모두 대표팀의 골문을 지키며 4강전까지는 단 3골만 내주는 철벽 수비를 펼쳤다. 특히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호아퀸의 슛을 막아내며 한국축구 월드컵 4강 신화를 여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2004-2007 아시안컵과 2006년 독일월드컵, 그리고 지난 2010 남아공월드컵 지역예선까지 이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한국축구 NO.1 골키퍼로 장기집권 시대를 열기에 이른다. 이운재는 A매치 통산 132경기에 나서 114골을 내줬다. 경기당 1골도 내주지 않은 철벽수비로 2000년대 한국축구의 골문을 가장 든든하게 지켜줬고, A매치 132경기 출전은 홍명보 올림픽축구 감독(135경기) 다음으로 많은 2위의 기록이기도하다. 특수 포지션인 골키퍼임을 감안해도 최고 중의 최고들만 허락되는 대표팀의 주전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운재의 진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화려한 축구인생만큼이나 이운재는 몇 차례의 시련기도 있었다. 90년대 중반 결핵을 앓으며 2년간 힘든 시기를 보냈고, 98프랑스월드컵에서는 대표팀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는 갑작스럽게 불어난 살로 '돼운재'라는 비아냥을 받으며 자기관리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7 아시안컵에서는 훗날 음주파문이 발각되며 대표팀에서 1년간 자격정지의 중징계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운재는 2010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붙박이로 한국 골문을 잘 지키며 본선행을 이끌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비록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뜻하지 않은 부진으로 정작 마지막 월드컵에서 주전 수문장 자리를 후배 정성룡에게 넘겨주고 벤치를 지켜야 했지만 팀의 최고참으로서 후배들을 묵묵히 다독이며 듬직한 맏형 역할을 잘 해냈다.

한국축구가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일궈내는 것을 지켜보며 이운재는 이제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16년간 정들었던 태극마크를 반납하고 아름다운 은퇴를 선언했다. 비난도 찬사도 있었지만, 누구도 이운재가 한국축구의 가장 위대한 시대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타탄생 윤빛가람, 새로운 시대의 시작

조광래 신임감독은 새로운 대표팀을 구성하며 기존의 월드컵 대표팀 멤버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젊은 피들을 대거 수혈했다. 경남 시저의 수세자 윤빛가람을 비롯해 조영철, 김영권, 지동원, 김민우, 홍정호 등은 모두 89년생 이하의 어린 선수들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조광래 감독의 황태자로 떠오른 윤빛가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기회를 멋지게 살려내는 집중력을 보여줬다. 1990년생. 이번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 중 지동원(91년생) 다음으로 어린 선수인 윤빛가람은 나이지리아전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선제골을 기록하며 A매치 데뷔전 한 경기만에 주목할 스타로 떠올랐다.

윤빛가람은 이날 경기 내내 같은 기성용과 함께 대표팀 허리를 책임지는 중책을 훌륭히 수행했다. 골을 넣은 이후 자신감을 얻게 된 윤빛가람은 과감한 전진 패스와 폭넓은 활동량으로 나이지리아를 당황시키며 20세의 어린 선수가 A매치 데뷔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활약을 선보였다. 윤빛가람은 이날 경기의 MVP로도 선정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는 유망주로 평가 받았던 윤빛가람이지만, 2007년 국내에서 열린 17세 이하 월드컵에서의 좌절과, K리그 비하 파문으로 인한 설화는 어린 선수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잉글랜드 블랙번 입단 실패 이후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중앙대 시절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실력보다 말만 앞선 당돌한 아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긴 채 잊혀질 뻔했던 윤빛가람을 구원해준 것은 바로 조광래 감독이다. 조광래 유치원의 우등생으로 부활한 윤빛가람은 짧은 시간에 일취월장한 실력을 선보이며 경남 FC의 에이스이자 K리그 신인왕을 다투는 영스타로 성장했다.

K리그조차도 이제 데뷔 첫해, 성인 무대 경험이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윤빛가람이기에 아무리 자질이 있어도 성인대표팀 레벨은 다소 이른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조광래 감독은 윤빛가람의 능력에 확신을 갖고 애제자를 자신의 A매치 데뷔전에 불러들였다. 그리고 윤빛가람은 실력으로 스승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조광래 감독은 윤빛가람에게 김정우(상무)와 같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많이 뛰고 움직일 줄 알면서, 정확한 패스와 게임운영 능력까지 갖추어 공격과 수비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바로 윤빛가람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다.

이제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이지만 대표팀의 젊은 피들은 시작부터 될성부른 떡잎임을 입증하며 한국축구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지난 허정무호에서 기성용, 이청용, 이승렬 등을 통하여 시작된 세대교체의 바람은, 조광래 감독들어 윤빛가람, 지동원 같은 소위 90년대생 스타들의 본격적인 대표팀 유입을 통하여 확실한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세대의 시작을 보여준 날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vs 나이지리아 전반 17분 윤빛가람 선취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