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경기 후퇴의 양상을 보였던 세계 경제는 2009년 2분기에 바닥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후 회복세는 좀처럼 강건하지도 가파르지도 않다. 더블 딥의 우려도 계속 제기된다. 지난 20년간 세계경제의 경기 사이클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예전에는 일단 경기가 바닥을 찍으면 빠르고 가파른 상승세가 뒤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번 경기 사이클이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대 세계 경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활황이 거듭되는 소위 '고원(高原)경기'가 유지되면서 물가도 안정됐다. 기존 경제학 상식과는 다른 일이라 '신경제(新經濟)'라는 표현이 나왔다.
당시 많은 이코노미스트들은 PC와 인터넷 보급, IT의 비약적 발달을 이유로 댔다. 생산성이 크게 높아져 기업들이 수요 급증에 잘 대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0년 초부터 다른 주장이 나왔다. 신경제의 물가 안정은 IT보다는 1990년대 초 세계 경제로 편입된 중국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어느 주장이 더 맞을지는 학계의 최종 검증을 기다려봐야겠지만, 저임금과 양질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중국이 세계의 디플레이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1990년대 말 이미 전 세계 TV의 78%, 냉장고의 65%를 중국이 생산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부터 각국 중앙은행은 그때까지 누리지 못했던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아무리 금리를 인하하고 돈을 찍어내도 중국에서 들어 오는 저가(低價) 수입품 때문에 물가 압력이 따라오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 결과 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다. 재정당국도 공격적으로 재정 확장 정책을 쓸 수 있었다.
선진국들 재정적자·인플레로 정책수단 상실
다시 경기하강 오면 2008년보다 훨씬 심각
이러한 상황에서 그린스펀과 루빈 등 미국 중앙은행장과 재무장관은 역대 가장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이 어디에 있겠는가? 금리 인하와 통화 팽창에도 소비자 물가는 오르지 않았지만, 풀린 돈은 주식·부동산·자원·곡물 등 실물 자산으로 몰려 자산 버블을 만들었다. 금리가 낮아져서 빚 무서운 줄 모르게 된 각국 정부는 불황 때마다 빚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자산 버블은 소위 '부(富)의 효과'를 타고 경기를 더욱 상승시키는 가속기 역할을 했고, 이는 중앙은행이나 재정당국으로 하여금 문제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 경기 사이클에 오자 이러한 경기 회복 공식에 빨간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변화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중국이 더 이상 세계의 디플레이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위안화 절상과 임금 상승세가 가파르다. 중국의 월별 물가 상승률이 5% 넘게 유지되는 등 중국발 물가 안정은 이제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둘째는 각국 정부의 재정상태가 심각한 상황에 봉착해 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의 재정 여력은 거의 바닥 수준이다. 셋째, 버블이 꺼지면서 경기 부양에 쓰였어야 할 돈이 버블 뒤치다꺼리에 투입돼 경기 회복의 추진력이 떨어졌다.
더 큰 문제는 다음 경기 하강 사이클이다. 중국 등 신흥 경제국들은 여전히 세계 경제를 떠받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은 대부분 인플레와 재정적자 문제로 인해 정책 카드가 더이상 없어 보인다. 이는 다음 경기 하강이 닥칠 때 그 깊이와 기간이 2008년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이번 불황 사이클을 잘 헤쳐 나왔지만, 다음번 불황에 대해선 근본적인 대비책을 모색해야 한다. 다행히 앞으로 상당 기간 세계 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해줄 중국이나 인도 같은 나라가 우리 옆에 있다는 점에선 다른 나라보다 유리하다. 하지만 수출증대를 위해 지나친 고환율을 고집, 장기적인 수출 경쟁력을 잃는다거나, 전 세계 투기 자본을 끌어들이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 역시 다음 불황의 큰 피해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