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이 미미한 경제에 돈을 끊기란 힘들어…
이렇게 끝없이 돈 풀면 무시무시한 인플레 닥칠 것
먼저 이번 재앙의 충격이 크지 않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이 관점에 선 사람들은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20년간 계속된 저(低)성장으로 일본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빠르게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이번 지진으로 자동차와 정보통신(IT) 제품 생산에 필요한 공급망에 차질이 생겼지만 그런 문제는 일시적일 것이다. 더구나 세계 1·2위 경제국인 미국과 중국의 수출에서 대일(對日)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5%와 8%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좁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이번 일본 쇼크(shock·충격)가 세계 경제의 활황일 때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과 몇해 전 세계 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었고 이제 막 회복단계에 들어서던 중이었다.
게다가 세계 경제는 일본 쇼크 이외에도 고유가(油價)와 유럽의 국가 부채 위기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를 하나씩 놓고 보면 큰 위기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지만 이 문제가 한데 합쳐지면 그 효과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경제위기가 끝나고 지난 2년간 세계 증시는 행복에 빠진 듯 다시 오르고 있지만 세계 경제는 여전히 살얼음판 위에 있다. 시장은 지금 큰 위기 직후의 경기 회복이 약세(弱勢)를 면하기 어렵고, 예상 밖의 충격에도 다시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잊은 듯하다.
문제는 또 있다. 지난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전통적으로 써왔던 '탄약'을 거의 다 써버렸다. 경기를 안정시킬 수 있는 양대 무기인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 모두에서 말이다. 주요 선진국의 기준 금리는 제로(0)에 가깝고 막대한 재정 적자는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양 되어버렸다. 그래서 중앙은행들은 '양적완화'(금리를 더 낮출 수 없을 때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 같은 비전통적인 정책을 유행처럼 사용했다.
그동안 사람들은 이 비전통적인 정책이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예상해 왔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고유가, 유럽 위기, 일본 대지진까지 연이어 충격을 받으면서 각국의 '출구전략'(경기부양책을 중단하고 금리인상 등을 통해 긴축정책을 취하는 것)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위독한 중환자에게서 생명유지장치를 떼어 낼 수 없는 것처럼 회복이 미미한 경제에 공급되던 유동성(돈)과 정부 지원을 중단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실업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상황에서 정치권이 그런 선택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이 가장 우려스러운 시나리오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출 대로 낮춰서 더 이상 경기를 살릴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세계 경제가 연이어 충격을 받게 되면 선택은 하나뿐이다. 끝없이 돈을 푸는 것. 그렇게 되면 무시무시한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상승) 공포가 어느 순간 현실이 된다.
일본 대지진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직접적인 충격이 상대적으로 작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중요한 맥락을 놓치는 것이다. 일본의 대지진과 지진해일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경제를 더 좁은 코너로 몰아넣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