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경영인 목숨은 4.03년… “충성했지만 한순간에…”

2011. 7. 15. 07:59C.E.O 경영 자료

전문경영인 목숨은 4.03년… “충성했지만 한순간에…”

■ 본보, 2000년 이후 전현직 대기업 CEO 219명 조사

동아일보 | 입력 2011.07.15 03:17 | 수정 2011.07.15 03:24

 

대기업 전문경영인 대표이사는 모든 샐러리맨의 꿈이다. 대표이사는 월급쟁이들이 오를 수 있는 최정상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의 전문경영인 대표이사들은 평균 57.8세에 대표이사가 돼 4.03년간 일하며, 10명 중 6.35명이 신입공채로 들어와 한 회사에서만 일한 '충성파'로 나타났다. 동아일보가 자산규모 상위 30대 민간 기업 주요계열사 71곳의 2000년 이후 전현직 전문경영인 대표이사 219명의 프로필을 조사한 결과다.


○ 4명은 1년도 자리 못지켜


국내 대표이사의 재임 기간(4.03년)은 글로벌 기업 대표이사보다는 2, 3년 짧다. LG경영연구원은 지난해 11월 '글로벌 기업 CEO 프로필'에서 미국 경제지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상위 150대 기업 대표이사의 현직 평균 재임기간은 6.1년, 전임 평균 재임기간은 7.5년이라고 밝혔다.

국내 전문경영인 대표이사 중에는 3년도 일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총 25.6%(56명)가 3년을 채우지 못했고 1년도 채 자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도 4명이었다. 반면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1997년 1월부터 2008년 5월까지 12년 5개월 동안 대표이사 사장과 부회장으로 일해 최장수 전문경영인 대표이사였다.

대표이사들은 재임기간만큼은 '내 회사'라는 생각을 갖고 열정을 쏟았지만, 짧은 임기가 아쉬웠다고 입을 모았다.

이용경 창조한국당 원내대표(전 KT 사장)는 "수천억 원의 투자를 결정했는데 주가나 이익에 반영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며 KT 사장 임기인 3년만 채우고 떠나야 해 아쉬웠던 심경을 토로했다. 이계안 2.1연구소 이사장(전 현대차 사장·전 민주당 국회의원)은 "정주영 회장은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었고 그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권한을 줘 행복했다"고 말했다.

○ 범(汎)현대가, CEO '충성' 우대해도 물갈이 잦아

대표이사가 되려면 충성도가 특히 중요한 것도 국내 대기업의 특징 중 하나다. 219명 중 139명(63.5%)이 해당 회사 혹은 계열사에 신입공채로 입사해 30년 이상 근무했다. '회사에 뼈를 묻은 사람들'인 셈이다.

세계 150대 기업의 경우 39%만 동일 기업에서 근무했다. 지역별로 보면 아시아 기업은 약 60%의 대표이사가, 미국은 42%, 유럽은 26%가 한 직장만을 다닌 것으로 분석됐다. 우리나라는 세계 평균보다 두 배 더 충성도를 중시하는 셈이다.

기업별로 범삼성가와 범현대가에서 특히 충성도가 중요시됐다. 삼성가인 삼성그룹(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중공업)과 신세계그룹(㈜신세계, 이마트)의 전현직 대표이사 15명, 현대가인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과 현대백화점그룹(현대백화점, 현대홈쇼핑, 현대그린푸드), KCC의 전현직 대표이사 35명 전원이 신입공채 출신이었다.

한편 기아차, 현대미포조선, 현대증권, 현대홈쇼핑 등 범현대가의 일부 기업에서는 충성을 중시하면서도 타사에 비해 대표이사 물갈이가 잦았다. 이 회사들의 대표이사 재임기간은 평균 2.8년에 불과했다.


○ "지적자산 활용 방안 필요"


대표이사의 퇴임 후 활동은 미진한 편이었다. 대부분은 임기를 마치고 난 후 상담역, 고문 등으로 노후를 보내고 있다. 219명 가운데 18명(8.2%)만 퇴임한 후 창업, 다른 기업의 전문경영인 등으로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으로 파악됐다.

현대차그룹, 하이닉스 대표이사 출신은 퇴임 이후 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김동진 씨앤에스테크놀러지 대표이사 회장(전 현대차 부회장), 전천수 디아이씨 부회장(전 현대차 사장), 하이닉스 출신인 박상호 매그나칩반도체 회장, 우의제 하이셈 회장, 김종갑 한국지멘스 대표이사 회장 등이 전문경영인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대표이사에서 퇴임한 후 창업한 유승렬 벤처솔루션스 대표(전 SK㈜ 사장)는 "60세에 은퇴하면 30년 동안 놀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막막했다"고 말했다.

나머지 퇴임 대표이사들은 특별한 사회활동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퇴임 나이가 60세를 훌쩍 넘긴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전문경영인의 경험을 펼쳐볼 곳이 그만큼 적다는 의미다. 이용경 원내대표는 "우리나라엔 전문경영인 시장이 없다"며 "평생 축적한 지적 자산을 활용할 방안을 마련해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영 전문가들은 "국내의 전문경영인 제도는 이제 걸음마 수준"이라며 전문경영인 시스템 정착을 위해 스톡옵션제(자사 주식을 매입·처분할 수 있게 부여하는 권한)와 경영 감시자인 사외이사의 권한 강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동일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스톡옵션을 받으면 장기적 성과를 통해 보상받을 수 있다"며 "임기가 짧으면 전문경영인들이 단기 이익에 매달리게 되는 경향이 강한데, 스톡옵션제를 강화해 장기적 이익 도모에 열정을 쏟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한윤창 인턴기자 한양대 법학과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