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9. 12:09ㆍC.E.O 경영 자료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일제는 우리 밤 문화도 크게 바꿔놓았다. 일제 침략사를 연구했던 임종국 선생이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조선의 밤 문화를 창기(娼妓)문화로 타락시켰다. 우리 사회가 술과 여자에 빠질수록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계산도 한몫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을 많이 했다. 일본식 유곽 문화가 퍼지면서 기예 중심이던 조선의 밤 문화는 매춘 중심의 하급 문화로 전락했다. [백범영-백귀야행(百鬼夜行), 43×99㎝,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1]
식민통치 구조
⑤ 공창(公娼)
대한제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관기(官妓) 제도를 혁파했다. 이로써 관기는 국가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유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해 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관기 혁파는 무의미해졌다.
1894년 6월 해군 중장 이도(伊東祐亭)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에 온 것을 필두로 일본군이 속속 진주하자 일본 거류민회는 묵정동에 대지 70평을 구입해 유곽(遊廓)을 만들었다. 군대 진주와 더불어 유곽을 만드는 일본군의 이런 전통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뿌리인 셈이다.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대거 증파되면서 이 유곽은 8300여 평으로 크게 확대된다. 이 유곽지대가 일종의 공창(公娼)지대였다. 공창이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두 인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종합월간지
이토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육군 소장 무라다(村田淳)와 해군 소장 미야오카(宮岡直記), 통감부 외무총장 나베시마(鍋島桂次郞) 같은 공식 수행원뿐만 아니라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데리고 왔다.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출신의 오카네(お柳), 표면상으론 이토의 전용 간호사지만 실제로는 정부였던 오류우, 비파(琵琶)의 명인 요시다 다케코(吉田竹子), 도쿄 신바시(新橋) 출신의 게이샤 사다코(條子)였다. 이토는 사다코를 4500원의 1년 출장 화대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 정도였다. 그래서 주한 일본인들도 이토를 ‘풍류 통감’이라고 불렀다.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 시절 이토의 이웃이었던 닛다(新田又兵衛)가 한국으로 건너와 남산동에 천진루(天眞樓)를 열었다. 천진루 연회에서 닛다는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장과 무라다(村田淳) 소장 사이에 앉아 ‘닛다(新田) 중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토는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는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로 여자·술과 정치를 동일시했던 인물이었다.
임종국 선생이
일본이 사실상 공창(公娼)을 허용하면서 조선의 기생들은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뉘게 된다. 그 유래는 분명치 않지만 갑오개혁 때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관에서 풀린 기생들이 자신들을 몸 파는 기생들과 구분하기 위해 나눈 것으로 짐작된다. 일패는 과거의 관기들로서 몸은 절대 팔지 않고 가무를 선보였던 예인(藝人)들이다. 이들 중에 생활고에 시달려 은밀하게 매춘도 하는 기생들이 이패였다. 이패를 ‘숨어 있는 군자’라는 뜻의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慇懃-)’라고 불렀는데 그만큼 몸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이다. 삼패는 돈만 있으면 아무나 안을 수 있는 창부(娼婦)로서 세칭 가무 못하는 ‘벙어리 기생’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기생은 대부분 3패에 속하는 저질들이었다. 이런 일본의 저질 밤 문화가 퍼지자 1908년 관기(官妓) 출신들이 한성(漢城)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유부녀 기생들의 모임으로서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예인들의 조합이었다. 그러자 송병준이 평양 출신의 남편 없는 기생들을 주축으로 만드는 것이 다동(茶洞) 기생조합이었다.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면서 다동 기생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이 된다.
1929년도
하규일이 송병준의 심복 안순환(安淳煥)과 충돌한 후 독립해서 차린 권번이 경화권번인데, 안순환의 이력도 특이하다. 경시통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가 2대 통감 소네(曾<79B0>荒助)에게 보낸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안순환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전선사(典膳司) 상선(尙膳)으로 있으면서 이용구·송병준의 일진회에 가입한 자였다. 이런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와 1908년 12월 지금의 광화문 일민미술관 자리에 차린 요릿집이 한세월을 풍미하던 명월관(明月館)이었다.
일제 진출 이후 서울의 밤 문화는 이토 같은 색귀 통감과 송병준 같은 친일 색작 등이 주도하면서 과거의 기예(技藝) 중심의 품격은 사라지고 삼패 중심의 천박한 매춘으로 전락했다. 일패 기생들 중에는 애국자도 적지 않았다.
주요한(朱耀翰)이 발행하던
앞에 인용한
술자리에 여자를 동석시키는 현재의 잘못된 밤 문화도 알고 보면 그 뿌리는 일제시대에 있다. 1919년 기생들이 3·1운동에 대거 동참한 것은 밤 문화까지 잠식한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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