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반대했던 농민, 한우300마리 키우며 순수입 1억

2012. 3. 15. 08:46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한미 FTA발효… 농업 4.0시대] 한·미FTA 반대했던 농민, 한우300마리 키우며 순수입 1억

  • 김기홍 기자
  • 입력 : 2012.03.15 03:34 | 수정 : 2012.03.15 04:31

    [1] 개방 17년… 농업은 무너지지 않았다
    韓牛 사육 300만두 사상최고, 품질도 1등급 이상 70% 육박
    칠레와 FTA 체결이후 과수 재배도 오히려 늘어
    기술없이 농사짓던 시대 끝… 품질 향상 방법 연구해 프리미엄 마케팅으로 승부를

    오늘 발효된 한미 FTA는 한국 경제에 커다란 기회이자 도전이 될 전망이다. 우리나라가 FTA를 발판으로 세계 자유무역의 허브 국가로 거듭나면 새 성장 동력을 찾게 될 뿐만 아니라 안보·외교면에서도 진일보할 수 있다. 한미 FTA는 향후 10년간 국내총생산(GDP)을 5.7%, 일자리를 35만개 늘리는 효과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농업·제약·서비스업 등 경쟁력이 취약한 산업과 계층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특히 한미 FTA는 한국 농업이 우리 경제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성장 동력으로 커 나갈지, 아니면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는 산업에 머무를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본지는 '농업4.0' 시리즈를 통해 농업 경쟁력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본다.

    "나도 한때 서울에서 열린 한미 FTA 반대 시위에 열심히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스스로 헤쳐나갈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아직도 정부를 원망하며 살고 있었겠죠."

    충북 청원군에서 한우(韓牛) 300여 마리를 키우는 이종범(52)씨는 한 해 순수입이 1억원을 넘는다. 매년 한우 150여 마리를 도축해 시장에 내놓지만 "우리 매장에 한우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는 백화점이 줄을 서 있다. 육질(肉質)이 좋기 때문이다.

    충북 청원‘다알리아’농장주 이종범씨가“소를 보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며 사랑스러운 손길로 소를 어루만지고 있다. 이곳의 소들은 항상 음악을 듣고 꽃을 보며 자란다. 이씨의 차별화된 축산 기법 덕분에 이 농장에서 출하되는 소는 70% 이상이 1+ 등급(상위 두 번째 등급)을 받고 있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축산 경력 15년째인 이씨가 한우를 키운 것은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 FTA가 타결되기 직전인 2007년 초부터다. 이전까지 육우(肉牛·젖소의 수컷)를 키우던 이씨는 FTA가 발효되면 어떻게 활로를 찾을지 해답을 찾으려고 지역 농협이나 자치단체가 주최하는 강연을 빠짐없이 찾아 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찾은 해답은 '품질로 승부하자'는 것이었다.

    "이전까진 육질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의 체중을 늘리고 덩치를 키우면 된다는 생각뿐이었죠. 강연을 들으면서 소비자를 처음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소비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위기는 기회와 같이 오는 것"

    이씨가 키우는 소들은 음악을 듣고 꽃을 보면서 자란다. 축사에 음악 시설을 설치하는 데 500만원을 들였고, 축사 주위에 꽃을 심는 데 매년 300만원을 투자한다. 봄에는 축사에서 어린이 사생 대회를 열 정도로 축사도 깨끗하게 정비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고급 한우를 키우기 위해서다. 이씨가 도축하는 한우는 1+ 등급 70%를 포함해 육질 1등급 이상이 85%에 달한다. 그는 "위기는 기회와 같이 오는 것"이라면서 "개방이 농촌에 어려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헤쳐나갈 길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과거 우루과이라운드(UR)나 한·칠레 FTA,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시장이 개방되면 농업은 다 망할 것"이라는 선동이 난무했다. 농민들은 농기계 반납 운동이나 죽창(竹槍) 시위에 나서며 개방에 극력 반대했다.

    농업 시장이 개방된 지 17년이 지난 현재 우리 농업은 완전히 망했을까?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농민도 여전히 많지만, 우리 농업이 개방 충격을 의연히 견뎌내고 있다는 평가도 많다. 쇠고기 시장은 개방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올해 한우 사육 두수는 사상 최고인 300만두를 넘어섰다. 개방 이전 한우는 육질 3등급이 50%대였지만, 현재는 1등급 이상이 70%에 육박한다. 한·칠레 FTA 발효를 앞두곤 과수 농가 폐업이 잇따랐지만, 현재 국내 과수 재배 규모는 FTA 이전보다 커졌다.

    ◇"한·칠레 FTA 개방 파고가 5m였다면, 한미 FTA는 15m"

    물론 시장 개방이 농촌에 엄청난 위협 요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민승규 전 농식품부 차관은 "과거 우루과이라운드나 한·칠레 FTA 때 개방 파고가 5m였다면, 한미 FTA는 15m, 한중 FTA는 20m라 할 수 있다"면서 "이런 충격을 이겨내려면 무엇보다 농민 스스로 '농업은 지원이 없으면 안 된다'는 패배주의부터 벗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유기농 쌀을 재배하는 전양순(56)씨는 "정부에 의존해선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과거에 젖어 미래를 보지 않는 농민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가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남편 강대인씨와 함께 30여년 전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친환경 농법을 시작했다. "정부만 바라보고 농사를 지으면 절대 제값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동안 정부의 쌀 수매에도 응한 적이 없다. 그가 자신의 농장에서 직접 가공해 판매하는 '발아쌀'은 한 가마(80㎏)에 200만원을 호가한다. 보통 쌀 한 가마가 16만원 안팎인데, 이 가격의 12배가 넘는다. 국산 농산물도 초고가 프리미엄 마케팅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씨는 "과거에는 아무 기술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 농사라고 했지만 이제는 공부하지 않고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장태평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농업도 하나의 산업이자 경영이라는 것을 직시하는 농민들의 의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