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동안 신용불량자들에 돈꿔줬더니…

2012. 7. 22. 11:40C.E.O 경영 자료

10년동안 신용불량자들에 돈꿔줬더니…

[소셜디자이너열전]<5>이종수 사회연대은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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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설계사들이 있다. 이들은 불평등·환경훼손·인권침해·동물학대 같은 사회 문제를 사회적기업·협동조합·비영리단체·기업의 사회적책임 같은 활동을 통해 해소하자고 나선다. 사회를 바꾸는 아이디어의 실행자, '소셜디자이너(Social Designer)'들을 머니투데이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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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사회연대은행 대표 ⓒ임성균 기자 tjdrbs23@

국내에서 경제 활동하는 사람 3명 중 1명은 은행 돈 꾸기 어렵다. 신용등급 이하 저신용자가 660만 명, 신용을 쌓기 어려운 생계형 자영업자가 170만 명이다. 이들한테 돈을 꿔주면 생계가 나아질까?

"정부와 금융기관이 미소금융으로 직접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소액대출)에 뛰어든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왜 취약계층이 생기는지, 문제의 근원을 봐야 합니다. 사회에 취약계층이 아니라 취약구조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취약구조가 빈곤을 만듭니다."

이미 10년 동안 취약계층한테 돈 꿔준 사람 얘기다. 이종수 사회연대은행 대표(58)는 2002년 사단법인 함께만드는세상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해 마이크로크레디트 이슈를 대중화하고 금융권 휴면예금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지원을 제도화했다. 그런 그가 새로운 대안을 말한다. 소셜파이낸스, 즉 사회문제 해소를 위한 금융이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삶이 아니야" = 그가 금융으로 사회문제를 해소하자고 말하고 다니면 어떤 이는 '저 사람 국회의원 나가려 저러냐' 한다. 사람의 진심은 그의 말보다 살아온 삶에서 드러난다. 그의 삶을 보자.

1954년생인 그는 서울 사당동의 판자촌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웃 모두 가난했고, 정겨웠다. 서강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그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깊어졌다. 그러다가 민청학련(전국민주학생청년총연맹) 사건으로 서대문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1974년, 딱 7개월 살고 풀려났다. 근데 취직이 안 됐다.

미국은행은 신원조회를 안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는 체이스맨하탄 은행에 원서를 냈다. 덜컥 합격했다. 이후 계속 외국계로 직업이 풀렸다. 주로 은행법인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떠도는 삶이 시작됐다. 서울에서 3년, 홍콩에서 3년, 자카르타에서 3년 식이었다. 일은 재밌었다. 두 아이는 여러 언어를 써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바르게 커줬다.

그렇게 18년이 지난 1997년,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갔다. 발령지는 내전 중이었다. 사람들의 눈동자는 깊고 우울했다. 그 눈동자가 그를 뒤돌아보게 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자'고 생각했던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삶이 아니다'라는 번민이 밀려왔다.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하지만 그는 프놈펜 사무실을 정리한 후 사표를 냈다.

그 후 1년,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만 생각했다. 그때 고국은 외환위기로 금융 소외가 커지고 있었다. 1999년 그는 귀국해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금융을 공부했다. 동남아에서 퍼지고 있던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소개하자 주변 전문가들은 '그게 한국에서 되겠느냐'고 했다.

2002년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한 건 우연에 가까웠다. 한 대기업의 여성가장 창업지원 프로젝트가 들어왔던 것이다. 당시 그는 국제재보험회사 에이온코리아의 부사장이었다. 생계와 미션을 병행하는 '투잡'은 2010년 그가 사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숨 가쁘게 이어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려놓고 버리고 떠나는 것 없이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없다.'

사표를 냈다. 그는 혼자 산티아고로 떠나서 800킬로미터를 한 달 동안 걸었다. 내려놓고 버리고 나서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그렇게 찾은 것이 소셜파이낸스였다. 이번엔 필연이었다. 당시 사회연대은행은 사면초가의 위기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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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쓴 '상선약수' ⓒ임성균 기자 tjdrbs23@

◇사회 문제 해소를 돕는 금융 = 사회연대은행은 국내 최대 성과를 내고 있는 마이크로크레디트 기관이다. 설립 후 5년 동안 약 400여 업체에 80억여 원, 2012년 5월까지 약 1624개 업체에 320억여 원을 지원했다. 5년 만에 거의 4배 이상 성장한 셈이다. 그런 기관의 대표자가 왜 '새로운 것'에 대한 필요를 느꼈을까.

사회연대은행과 이 대표는 금융권의 휴면예금을 마이크로크레디트에 활용해 빈곤을 퇴치하자며 법제화에 앞장섰다. 법은 제정됐지만, 돈줄은 말랐다. 이 법에 따라 2009년 세워진 미소금융중앙재단이 직접 마이크로크레디트에 나서면서 대기업 사회공헌 등 민간의 다른 재원이 지원을 줄인 것이다. 정부부처들까지 재원 배분을 줄이거나 없앴다.

그 와중에도 직원들은 열심히 뛰었다. 박상금 상임이사를 비롯해 김영화 총무팀장, 이민재 사업지원본부장 등 7~10년 근무한 멤버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결국 자금난이 왔다. 지난해 말엔 직원 50명 중 10명의 고용을 조정해야 했다. 이 대표는 좀 더 근원적인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빈곤이라는 문제를 마이크로크레디트만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마이크로크레디트나 미소금융이 지향하는 건 자영업 지원을 통한 빈곤 해소입니다. 하지만 빈곤이나 일자리 문제는 사회의 많은 요인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매우 포괄적 문제죠. 그래서 우리는 금융소외계층뿐 아니라 낙후된 사회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한 포괄적 금융 활동을 기획하게 됐습니다. 그게 소셜파이낸스입니다."

◇금융의 품격을 높이는 '상선약수'의 금융 = 소셜파이낸스는 한 사회가 한정된 자금으로 더 많은 사람의 복지를 이뤄내도록 돕는다. 공적 자금뿐 아니라 민간의 예금이나 투자자금을 모아 사회복지를 높이는 기관이나 단체에 투자 혹은 융자한다.

이 대표는 "사회 취약한 구조를 개선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대안금융"라며 "줘서 없어지는 복지가 아니라 투자가 되는 복지"라고 설명했다. 네덜란드의 트리오도스, 영국의 체리티뱅크가 그 예다. 돈벌이보다 복지 즉 사람의 행복에 투자하는 금융, 이런 게 요샛말로 '금융의 품격' 아닐까.

이 대표의 방엔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쓴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이 대표의 두 번째 꿈은 상선약수의 금융이다. "물은 모든 것을 품고 밑으로 흐릅니다. 장애물이 있어도 다투지 않고 돌아 흐릅니다. 가면서 여러 것들이 함께 섞입니다. 그래서 결국 넓게 퍼지고 낮은 곳까지 가서 바다를 이루지요. 그게 함께 가는 힘이고 연대의 힘입니다. 우리 법인 이름 처럼요. 참 잘 짓지 않았어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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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금 사회연대은행 상임이사(뒷줄 가운데) 등 사회연대은행 직원들. 사회연대은행엔 박 이사를 포함해 7년 이상 장기근속자가 많다. ⓒ사회연대은행

[팁]소셜디자이너를 꿈꾸는 은퇴준비자를 위한 가이드
1. 내 머릿속의 것을 내려놔라=은퇴자, 은퇴준비자들은 자기의 경험, 배웠던 지식에 고정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이 했던 것일 뿐 최선의 것은 아닌데, 그 틀에 다른 사람들을 맞추려 한다. 사회문제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착시를 이용한 심리테스트를 생각해보라. 뇌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눈이 본 것은 실제 현상과 다를 수 있다. 누군가 다른 이를 위해 살고 싶다면 내 머릿속에 든 것부터 내려놔야 한다.

2. 내 주변과 사회를 관찰하라=평소에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다가 은퇴를 앞두고 갑자기 좋은 일하겠다며 사회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 현상은 속독으로 읽을 수 없다. 그렇게 해선 사회 문제를 풀 수도 없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평소에 내 주변과 사회를 관찰하면서 내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한다.

3. 사회 문제는 함께 풀어라=사회문제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혼자선 그 문제를 풀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연대은행은 금융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잘 알지만 그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 문제를 풀기 위해선 그 사회 문제를 잘 아는 다른 기관과 연대한다. 여러 것들이 함께 섞이면서 바다를 이루는 이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