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걱정에 ‘교수 비서’ 노릇까지… 서러운 석·박사

2012. 8. 7. 08:54이슈 뉴스스크랩

취업 걱정에 ‘교수 비서’ 노릇까지… 서러운 석·박사

국민일보 | 입력 2012.08.06 19:07 | 수정 2012.08.06 21:47

 

'박사 실업'이 심각해지면서 대학원생들의 생활도 더욱 고단해지고 있다. 학위취득과 향후 진로의 키를 쥐고 있는 지도교수가 온갖 부당한 대우를 해도 속앓이만 하는 처지다. 서울대 박사 졸업생 4명 중 1명이 실업자일 정도로 고학력자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지도교수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 탓이란 게 대학원생들의 지적이다.

지난달 초 서울 소재 K대 대학원생 김진혁(28·가명)씨는 자정을 넘어 지도교수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휴대전화가 고장 났으니 바로 연구실에 들어와 고치라"는 지시였다. 방금 전까지 연구실에서 교수 개인 논문에 게재할 실험을 하다 귀가한 김씨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급히 되돌아갔다. 김씨의 연구실 책상엔 덩그러니 교수의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휴대전화 수리는 물론이고 교수 개인 컴퓨터 포맷이나 교수 자녀가 사용할 전자제품의 시장조사도 모두 김씨 몫이다. 이 때문에 김씨는 연구실 동료들에게 'IT매니저'로 불린다.

같은 대학 이공계열 대학원에 다니는 심성훈(26·가명)씨는 지난달 중순 지도 교수로부터 휴가철 가족여행 일정을 짜라는 지시를 받았다. 심씨는 가본 적도 없는 유럽 국가의 여행 일정을 계획하고 항공권, 호텔 예약 등을 하느라 1주일 동안 공부는 거의 할 수 없었다.

서울 Y대 대학원에 다니는 김민제(27·가명)씨도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지도교수가 고기파티를 한다며 학생들을 집으로 초청했는데 가보니 정원의 잔디를 깎으라고 지시했다. 이 학생은 "지도교수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 대부분 나에게 운전대를 맡긴다"며 "공부하러 온 학생이 아니라 교수의 개인 기사로 불려온 것 같다"고 토로했다.

대학원생을 '개인비서'처럼 부리는 지도교수들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대학원생들은 지도교수의 개인 심부름은 물론 연구 성과까지 바치면서도 교수 눈 밖에 나면 끝이란 생각에 불만을 숨기고 있다. 김삼호 한국대학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도교수는 대학원생의 미래를 결정하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어 학생들이 부당한 지시여도 거부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교수사회가 대대적인 자정노력을 하지 않는 한 이런 병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교수임용이나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들의 경쟁이 심해지기 때문에 지도교수 앞에서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서울대가 발간한 2011년 통계연보 '졸업생 취업·진학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취업을 못했거나 진로가 확인되지 않은 '미취업·미상'의 박사 졸업자 비율이 27.4%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최고대학도 '박사 실업'의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2010년 8월과 2011년 2월 서울대를 졸업한 박사과정 학생 총 1054명을 조사한 결과 289명이 미취업 상태로 나타났다. 박사 졸업자 4명 중 1명이 졸업 후 갈 곳이 없는 것이다. '미취업·미상' 비율은 2009년 전체의 15.4%에서 2010년에는 25.3%, 2011년에는 27.4%로 급상승하고 있다.

취업률 통계도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박사과정 내국인 졸업생 가운데 진학 인원과 군입대자를 뺀 '순수 취업률'은 2009년 83.4%에서 2010년 73.0%, 2011년 70.3%로 매년 하락했다. 2002년의 87.9%에 비하면 10년 사이 17.6% 포인트나 떨어진 수치다.

이용상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