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특허강국…절반 이상이 쓸모없는 `깡통특허`

2012. 9. 7. 08:52C.E.O 경영 자료

허울뿐인 특허강국…절반 이상이 쓸모없는 `깡통특허`

실적 내려 마구잡이 출원 `거품 낀 세계 4위`
돈되는 특허 적어 기술무역수지 갈수록 적자
매일경제 | 입력 2012.09.06 17:19 | 수정 2012.09.07 07:25

◆ 특허 홀대하는 한국 (下) ◆국내 대기업에서 일하는 연구원 A씨에게는 가끔 상사로부터 특허를 출원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요즘 팀의 실적이 좋지 않으니 연구 중인 과제가 아니더라도 특허를 내라는 압력이다. 이럴 때면 특허를 낼 만한 게 없어도 어쩔 수 없이 '보여주기 위한' 특허를 제조해내야 한다. A씨는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과제와 비슷한 영역의 특허를 검색한 뒤 몇 가지 내용을 바꾸거나 짜깁기해 새로운 특허를 하나 만든다. A씨는 "실제 활용이 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일단 지시가 떨어진 만큼 뭐라도 만들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다른 대기업 연구원 B씨는 현재 수행 중인 연구개발 과제를 통해 특허의 개수를 늘리는 데 골몰하고 있다. B씨의 부서에서 맡고 있는 연구과제는 30여 개나 된다. 이 중 연구개발이 끝나고 실제 제품이나 설비에 활용되는 것은 1년에 2~3개 정도다. B씨는 "연구과제가 끝날 때쯤 되면 성과를 늘리기 위해 많은 특허를 요구한다"며 "실제 연구로만 끝난 과제에서 발생한 특허는 잠자는 특허가 돼 버린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특허출원이라는 외형 측면에서는 '선진 5개국(G5)'에 드는 특허강국이다.

하지만 정작 알맹이가 있는 특허는 크게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에 출원된 특허는 17만8924건으로 중국(52만6412건), 미국(50만4089건), 일본(34만2610건)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출원된 특허에는 연구개발(R&D) 성과를 부풀리거나 기업 간 특허실적 외형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특허도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기업이나 연구소의 특허 가운데 상당수가 사용되지 않는 '휴면(休眠)특허'다. 새누리당 김정훈 의원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대학 및 공공 연구기관이 보유한 특허 중 70%가 제품 생산 등에 활용되지 않거나 기술이전도 되지 않고 있다. 기업이 갖고 있는 특허 중에서도 43%가 잠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휴면특허를 조사할 수 있는 방안이 딱히 없어 설문조사를 통해 집계한 것인데, 실제 휴면특허 비율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오세일 인벤투스 대표변리사는 "공공 연구기관에서 특허를 가져다 쓰라고 하는데도 활용되지 않는 특허가 수두룩하다"며 "그만큼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나의 특허를 여러 개로 나누는 '특허 쪼개기'도 빈번하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출연기관 연구원은 "R&D 평가 기준에 특허 건수가 들어있다 보니 제대로 된 기술 하나보다는 허섭스레기 같은 특허 10개를 내려고 한다"고 실토했다. 이 연구원은 "특허를 출원한 것도 R&D 성과로 잡히니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전했다.

중소기업 A사는 소송을 위해 하나의 특허를 쪼갠 경우다. A사는 또 다른 중소기업 B사가 자사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경고장을 보냈다. 경고장에 "B사가 우리 특허 20여 개를 침해했다"고 적시했고, 특허 전문인력이 없는 B사는 즉시 A사와 합의해 배상금을 물어줬다. 하지만 A사는 경고장을 보내기 전에 하나의 특허를 20개로 분할해 출원했던 것이다. 특허법인 관계자는 "B사의 입장에서는 특허가 20개나 걸려 있으니 겁이 나 바로 합의를 한 것"이라며 "의도적으로 특허 개수를 늘려 다른 기업을 공격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돈이 안 되는 '껍데기 특허'가 많다 보니 우리나라는 주요 선진국과는 달리 기술무역 적자를 벗어나기는커녕 갈수록 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술무역수지(특허ㆍ상표권 등의 국가 간 수출입 규모)는 2005년 29억달러 적자에서 2010년에 68억9000만달러로 적자폭이 크게 확대됐다. 전문가들은 제품 생산에 필요한 기술을 수수료를 주고 도입하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원천기술과 독자적인 특허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 한동수 교수는 "우리나라 특허 수가 세계 5위권이라고 자랑하지만 외국에 기술료를 가장 많이 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며 "특허의 숫자보다는 '내용'이 중요한 만큼 질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특허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R&D의 비효율성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규모는 3.74%로 이스라엘, 핀란드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효율적인 R&D가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오동훈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정책기획본부장은 "기초과학 R&D와 상용화 분야를 연결하는 중계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또 산ㆍ학ㆍ연 간 협력연구가 더욱 긴밀히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허가 있는 줄도 모르고 R&D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특허청에 따르면 지난해 정부가 지원하는 R&D 과제 중 56%만이 R&D와 관련된 특허가 존재하는지 선행조사가 이뤄졌을 뿐이다.

[박기효 기자 / 원호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