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거부하고… 일본도 떨게 만든 한국인

2013. 1. 21. 19:56C.E.O 경영 자료

삼성 거부하고… 일본도 떨게 만든 한국인

[서경이 만난 사람] 박주봉 케이씨 회장
입력시간 : 2013.01.20 17:38:55
수정시간 : 2013.01.21 13:55:09
  • 지난해 말 지역주민 돕기에 나선 박주봉(왼쪽 세번째) 회장이 동인천지체장애인협회와 인천 꽃동네회관에 전달할 연탄을 나르고 있다. /사진제공=케이씨
도전·열정으로 일본 뛰어넘는 최고 소재기업 될 것
수입소재 국산화 성공 등 없는 고부가 제품 개발 삼성·포스코도 손 내밀어
25년전 트럭 한대로 시작 철물구조사업에서 대박 케이씨 인수 제2 승부수
경제민주화 전제 조건은
기업생존과 일자리 창출 중기중심 정책 정착돼야


"세계 제일의 부품소재기업으로 우뚝 서 보이겠습니다."

굴지의 대기업 얘기가 아니다. 국내 중소기업인 케이씨의 박주봉(56ㆍ사진) 회장의 당찬 포부다. 박 회장은 중소업계에서 손꼽히는 입지전적인 기업가다. 25년 전 덤프트럭 한 대로 시작해 지금은 케이씨ㆍ대주중공업 등 여러 기업을 경영하며 매출 1조원대로 성장시킨 '맨손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렇다고 해도 부품소재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일본을 능가하는 세계 1위의 기적을 이룰 수 있을까. 박 회장의 도전과 열정을 아는 사람들은 "가능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실제로 수입 소재인 수산화알루미늄의 국산화 성공 등 쉼 없이 고부가가치제품을 개발하고 일본 기업은 물론 삼성전자ㆍ포스코가 앞다퉈 손을 내밀 정도로 그의 '꿈'은 진행형이다.

심지어 매출 1,500억원 정도였던 2년 전, 당시 증권가에서 자산가치를 5,000억원 이상으로 평가해 이례적으로 주당 10만원을 제시할 만큼 케이씨의 가치는 기대 이상으로 주목 받고 있다. 일본 기업이 두려워하고 삼성전자의 투자를 마다할 정도로 성공했으면서도 박 회장은 여전히 오전6시, 2,000여명의 직원 중 가장 먼저 출근하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김밥으로 식사를 때운다. 그의 꿈과 열정, 성공 스토리를 들어봤다.

◇하루 두 끼는 사치…교실 의자가 침대=소탈하고 겸손한 미소가 돋보이는 박 회장은 먼저 젊은이들을 걱정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작지만 강한 기업을 창업해서 도전과 실패에도 격려와 배려가 있는 기업 환경을 만들어주고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주는 선배 기업인이 되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또 "남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했고 실패가 두려워 물러서지 않았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성공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박 회장의 학창 시절은 '배고픔'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이 날아가 부모님은 물론 7남매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하루 세 끼는 거의 먹어본 적도 없고 두 끼 먹으면 잘 먹은 거였지요." 학교가 집이었다. 그는 중고교 6년간 대부분을 교실에서 잤다. 의자는 침대였다. 7년간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이발소에서 구두 닦는 일부터 떡볶이ㆍ오뎅 장사, 평화시장에서 '시다'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사업 생각은 우연히 찾아왔다. "고1 때 친구 집에 갔는데 어머니께서 귤을 한 바구니 주시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귤이 엄청 비쌌는데…. 부러웠죠. 친구한테 아버님 뭐하시냐고 물었더니 사업한다고 하더라거요. 그때 사업을 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덤프트럭으로 시작… 철구조물사업 대박=덤프트럭이 박 회장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지난 1978년 사업 밑천 200만원으로 8톤 덤프트럭 1대를 구입해 인천항에서 수입한 무연탄을 서울 지역의 연탄 공장에 나르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200~300대가 경쟁했는데 일감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빨리 줄을 서야 했죠. 1등을 하려면 적어도 새벽3시에 나와 대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2시에 기사 집에 가서 깨웠고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상차는 8시부터 시작했으니까요."

박 회장은 다른 차량보다 많이 운반했고 돈도 많이 벌면서 3~4년 만에 덤프트럭ㆍ카고트럭 등을 50대까지 늘리며 운송업에서 첫 성공을 맛봤다.

본격적인 사업이라 할 만한 철구조물사업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카고트럭에서는 철구조물 물량이 중요했는데 아예 생산하는 것이 물량 확보나 제조 측면에서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박 회장은 이 사업에서도 특유의 부지런함과 열정으로 1년 만에 부산의 낙동대교 프로젝트를 따내는 등 업계에 명성을 떨치며 10년 먼저 시작한 업체들을 압도했다.

상암동월드컵경기장ㆍ성수대교, 오피스건물 중 서울에서 가장 높은 여의도 IFC빌딩, 용산 민자 역사, 청량리 민자 역사, 대전 정부 제3청사, 현대차 울산 공장, 삼성전자 탕정 공장, 당진화력발전소 등 굵직굵직한 구조물이 박 회장의 손끝에서 이뤄지게 됐다.

◇만성 적자 케이씨 인수…제2의 승부수 던져=그러던 중 외환위기가 닥쳤고 박 회장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케이씨 인수건. 케이씨 전신인 한국종합화학은 당시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정책 대상 1호였다.

"주위에서는 모두 인수를 반대했습니다. 운송업과 철구조물사업만 한 사람이 어떻게 종합화학사업을 하겠느냐면서….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종합화학은 만성 적자였고 민영화 반대 노사분규를 6개월째 계속하던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소재 생산업체라는 점 때문에 인수를 결정했습니다."

2001년 인수한 이후는 생각보다 가시밭길이었다. 노조 파업으로 박 회장은 수개월간 회사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끝없는 설득과 명예퇴직 등을 통해 분규를 해결했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공장 정상화를 이뤘다.

그것도 잠시, 경쟁사인 일본 업체들의 덤핑 공세 등 대대적인 견제로 말미암아 케이씨는 재고 과다, 조업 단축 등으로 다시 존폐의 위기에 직면했다. 박 회장은 굴하지 않았다. 국회ㆍ부처 등을 돌아다니며 덤핑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낸 끝에 케이씨는 8개월 만에 극적으로 회생했다.

이후 케이씨는 세제ㆍ세라믹ㆍ전자 등 일반 소비재와 산업재에 폭넓게 사용되지만 전량 수입에만 의존하는 수산화알루미늄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수년 뒤에는 일본보다 앞서는 제품을 개발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박 회장의 승부수가 통한 것이다.

◇부품소재 일류 기업 머지않아=박 회장은 안주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시설투자와 기술개발에 나서 첨단IT소재 원료인 보헤마이트ㆍ울트라파인 등 고부가가치제품 개발을 이뤄냈다. 2010년에는 수산화알루미늄보다 고부가 소재로 LCDㆍ반도체 기판 등에 사용되는 알루미나 개발에 뛰어들어 양산에 성공했다. 이 기술은 일본ㆍ독일 등 소재 강국만이 보유했었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LCD 제품 원료를 전량 수입했는데 국내 중소기업이 개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년여의 테스트를 거친 뒤 납품을 요청하더군요. 공급물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박 회장의 도전은 계속됐다. 지난해 1월 포스코와 손잡고 알루미나보다 더욱 고부가가치 소재인 초고순도 알루미나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것. 삼성 측에서도 지분투자 의사를 밝혔지만 정중히 고사했다.

LED, 자동차 전지 등 차세대 산업의 핵심소재인 초고순도 알루미나는 그동안 높은 기술장벽으로 일본 스미모토, 미국 사솔, 독일 바이코프스키 등 3대 업체가 독점해왔다. 박 회장은 "최근 공장이 완공돼 곧 본격적인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며 "연간 수천억원의 수입 대체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도전과 혁신 덕에 10년 전만 해도 종업원 500여명에 매출 200억원의 적자투성이 회사였던 케이씨는 종업원 수는 반으로 준 대신 매출은 10배 이상 커진 알짜배기 회사로 탈바꿈했다. 그는 "오는 2020년쯤 매출 1조원을 달성해 세계 최고의 부품소재기업에 올라서겠다"고 목표를 밝혔다.

◇중소업계의 선봉장…경제민주화를 말하다=박 회장은 현재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고 중소업계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경제민주화의 전제조건은 기업 생존과 일자리 창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일자리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중소기업 중심의 기업구조정책이 정착돼야 합니다." 중소기업이 웃어야 대한민국 경제가 웃을 수 있다는 얘기다.

박 회장은 또 "불공정ㆍ불균형ㆍ불합리 등 경제 3불(不) 해소와 함께 중소기업의 자생력 강화가 필요하다"며 "중소기업을 경제적 약자로 인식하고 시장에서 공정한 환경 조성을 통해 창의적인 경쟁도 중요하지만 중소기업의 부족한 기초체력을 키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봉사왕' 박주봉 회장



"중기도 이웃에 눈 돌려 '사회의 소금' 역할해야"
박 회장의 경영철학 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사회적 기업론'이다. "서로 나누는 것이 보편화된 사회죠. 제 입장에서 보면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선진국이라 생각합니다. 중소기업도 사회 문제와 어려운 이웃들에게 눈을 돌려 사회의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박 회장의 사업장이 있는 곳 어디에서건 이 같은 나눔문화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사업장들은 경기도와 인천을 비롯 서해안을 따라 충청도ㆍ전라도에 산재해 있는데 지역 발전을 위한 박 회장의 노력은 어느 지역 하나 소홀하지 않는다. 바쁜 일정 속에도 워낙 지역 봉사활동에 자주 나서 주위에서는 '봉사왕'이라고 불릴 정도다.

그는 최근 인천시 동구 송림동의 공장 부지 5,000여㎡를 인천시 동구에 주민복지용으로 무상 기부했다. 금액으로 시가 60억원 상당이다. 중소기업으로서는 이례적인 일.

"부자의 기부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서민의 기부는 나라를 아름답게 한다고 합니다. 부자든 서민이든 기부는 모두 아름다운 것이죠." 박 회장이 기부하는 이유다. 그는 "지역주민과 이웃을 배려하는 진정성과 나눔문화가 더욱 확산돼야 한다"며 "기부와 선행은 자신이 쓰고 남은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쓸 몫을 줄여 누군가를 위해 내놓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충남 당진의 대주중공업은 지역발전기금(6억2,000만원)을 기탁해 지역의 노인과 여성 발전에 기여했다. 서해안 기름 유출사고 때는 난지도 유류 피해주민 돕기 성금(5,000만원)을 전달, 지역주민과 아픔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화성의 대주이엔티 역시 수천만원의 발전기금을 마을의 공동발전을 위해 쾌척하는 등 각 회사마다 지역 발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직원 채용 때는 인근 대학의 졸업생과 지역주민을 우선 뽑아 지역 고용 창출을 통한 지역경제 발전에도 앞장서고 있다.

인천장학회 이사인 박 회장은 특히 장학사업에 관심이 높다. 학창 시절을 힘겹게 보냈던 그는 주변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게 주위의 전언이다.

또 용문고 총동문회 부회장직도 맡아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주고 있고 천관문화장학회에서는 '박주봉장학금'을 만들어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2007년에는 중국 하남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장학금 지원과 한국 연수의 기회도 주고 있다.

박 회장은 평소 "이웃을 돕는 데 시기나 계절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하고는 한다. 그래서인지 창업 이래 지금까지 불우이웃 돕기 행사에 실질적인 행사 주관자로 참여, 매년 명절 때 1,000만여원 상당의 쌀과 생활필수품을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각 지방 사업장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장애인 목욕봉사와 독거노인의 김장봉사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박 회장의 회사에는 청각장애인 등 정년을 훌쩍 넘은 근로자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다들 채용을 꺼리는 대상자들이지만 박 회장은 "근무 의지만 있다면 신체장애나 나이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곰곰이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 약력

▲1957년 전남 장흥 ▲1988년 대주개발 설립 ▲1999년 대주중공업 대표 ▲2001년 한국종합화학 사장 ▲2004년 한국철강구조물협동조합 이사장 ▲2005년 자랑스런 중소기업인협의회 부회장 ▲2007년 대주·KC그룹 회장 ▲2009년 인천건설자재협의회 회장, 한국무역협회 이사 ▲2011년 한세대 대학원 정보보호공학 석사 ▲2011년 인천상공회의소 부회장,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중소기업사회공헌위원회 위원, 케이씨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