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스피드, 애플의 창조력… 동시에 갖출 수는 없다

2013. 9. 10. 23:23C.E.O 경영 자료

[Weekly BIZ] [장세진 교수의 '전략 & 인사이트'] 삼성의 스피드, 애플의 창조력… 동시에 갖출 수는 없다

  • 장세진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

  • 조선비즈 입력 : 2013.09.07 03:33

    야누스의 두 얼굴 '기업의 핵심역량'
    속전속결 신제품으로 한국 기업들 고속성장
    그러나 스피드 장점이 혁신제품 개발 저해
    해외법인 세우고 창의적 인재 쓰는 게 현실적인 대안 될듯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는 말과 같이 이중적 또는 위선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야누스'란 원래 시작과 변화를 담당하는 로마의 토속신이었다. 야누스가 두 얼굴을 가진 까닭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야누스는 종종 문 위에 장식되어 집안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로마인들은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시작되는 1월을 야누스를 기려 'Ianuarius'라고 하여 영어 'January'의 어원이 되었다. 이렇듯 원래는 중립적 의미였던 야누스가 부정적 의미로 더 많이 쓰이게 된 것은 변화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이 가진 핵심 역량에도 야누스적 이중성이 존재한다. 기술이나 브랜드 같은 기업의 핵심 역량은 기업의 경쟁 우위 원천이자 성장 원동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핵심 역량이 동시에 그 기업의 핵심 비(非)역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 기업이 비약적 성장을 한 배경에는 스피드와 실행력이 있었다. 삼성전자는 짧은 시간 안에 신제품을 개발하는 능력과 생산 프로세스 기술에서 뛰어난 핵심 역량이 있고, 현대자동차 역시 짧은 시간 안에 품질과 디자인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창의적이고 혁신적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 한계를 느끼며, 현대자동차 역시 차세대 친환경 자동차 개발이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반면, 창의적 신제품 개발의 대명사였던 소니는 빠른 제품 개발과 생산에서 뒤처졌고, 볼트와 같은 혁신적 전기차를 만든 GM은 현대자동차의 가격 경쟁력을 따라갈 수 없다.

    로마 동전에 새겨진 야누스
    로마 동전에 새겨진 야누스

    어느 경영자는 스피드, 비용과 창의력, 혁신적 제품 개발을 동시에 다 추구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은 자신의 핵심 역량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기업이 스피드와 실행력이 강한 이유는 이른바 오너에게 집중된 의사 결정 구조와 군대식 기업 문화에 있다. 그룹 회장이 결정하면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일단 목표가 주어지면 밤을 새워서라도 달성하고야 만다. 삼성전자가 기흥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때, 고 이병철 회장은 미국과 일본에서는 2~3년이 상식인 공장 건설을 6개월 만에 완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설계와 공사를 병행하고, 밤낮으로 일한 끝에 목표를 달성하고 선진 기업과 격차를 그만큼 줄일 수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피 마르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한국 경제의 기적적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스피드와 실행력은 표준적 제품을 놓고 가격으로 경쟁하는 일상재적인 제품 구조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 문화와 조직 구조에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창의력과 혁신은 남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는 실험 정신과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당장 주어진 현안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며, 매일 야근하는 직원에게 창의력까지 주문하는 것은 무리이다. 즉, 한국 기업의 창의력 부재라는 핵심 비역량은 스피드와 실행력이란 핵심 역량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소니와 GM의 경영 시스템은 창의적 제품 개발은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스피드와 실행력은 주지 않는다. 역시 자신의 핵심 역량이 다른 측면에서는 핵심 비역량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한국의 기업 문화와 조직 구조에서 스피드, 실행력과 동시에 창의력과 혁신을 주문하는 것은 마치 반대 방향으로 선 말 두 마리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것과 같다. 삼성전자와 소니가 합치고, 현대자동차와 GM이 합치면 둘 다 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스피드, 실행력과 창의력, 혁신은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에 한 조직 내에서 둘 다 추구하는 것은 성공할 확률이 낮다. 오히려 당분간은 지금까지 핵심 역량이었던 스피드와 실행력을 잃지 않으면서, 장기적으로 창의력과 혁신을 배양하는 전략이 더 현실적이다. 앞으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신세대가 회사의 주력을 이루면, 자연히 한국 기업들의 핵심 역량도 바뀔 것이다.

    중·단기적으로는 오히려 글로벌 경영을 강화함으로써 한국 기업에 부족한 핵심 역량을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 유럽 등 세계 각지에 해외 법인을 세우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인재들을 잘 활용하여, 한국의 스피드와 실행력을 결합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는 해외 법인들을 한국식으로 경영하지 않고 적절한 자율과 통합을 이룬다는 가정에서만 가능하다.

    로마의 동전에는 야누스가 새겨져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좌우의 얼굴이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야누스의 본질은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기업도 현재의 핵심 역량을 유지하면서 핵심 비역량을 보완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