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권에 발목잡힌 韓경제…'유동성 함정' 빠졌나

2015. 2. 24. 19:13C.E.O 경영 자료

5만원권에 발목잡힌 韓경제…'유동성 함정' 빠졌나

 

돈 풀어도 실물까지 돌지 않는 통화완화정책

5만원券 나오자 환수율 급락…96%→65% '뚝'

한국경제가 5만원권에 발목을 잡히며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진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책당국이 저성장·저물가 고착화를 방지하기 위해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유동성 공급이 늘어난 만큼 실물부문으로 화폐가 적절히 유통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4일 “5만원 신권 발행 이후 고액권의 휴대가 간편해지자 경제주체들이 거래 및 예비적 동기로 현금 소지를 늘리면서 화폐 환수율이 크게 하락하고 있다”며 “화폐 환수율이 낮아진다는 것은 중앙은행이 시중에 풀어 놓은 돈이 다시 중앙은행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경제주체들의 호주머니에 고여 있다는 의미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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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세계일보 DB


우리 경제는 내수침체가 장기화되고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의 체감경기가 악화되면서 추가 경기부양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국내총생산(GDP)이 잠재GDP를 밑도는 디플레이션갭이 무려 9분기 연속 이어지며 벌써 2년 넘게 경기부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게 현대경제연구원의 분석이다.

특히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수요부진, 유가하락 등의 영향으로 올해 1월 0.8%를 기록해 담뱃값 인상 효과를 제외할 경우 사실상 0%에 근접했다는 평가다. 경제주체들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감 역시 낮아지며 기대인플레이션은 2.6%로 2002년 2월 관련통계를 집계한 이래 13년 만에 사상 최저치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지난해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0.25%포인트씩 낮춰 역대 초저금리인 연 2.00%로 내리는 등 통화완화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2월부터 2010년 7월까지 17개월간 지속된 정책금리 2.00%와 동일한 수준이다.

한상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총괄본부장은 “중앙은행의 금리인하는 경기침체를 막고 경기부양에 노력을 기울이는 정부와 공조를 취해 정책효과를 뒷받침하려는 취지”라면서도 “거듭된 유동성 공급에도 통화승수가 하락하는 등 실물부문에서 원활히 흐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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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한국은행


◆ 금융-실물경제간 유동성 ‘연결고리’ 끊어져

한은의 금리인하로 시중 유동성은 상대적으로 풍부해졌지만 그 돈이 실물경기로 연결되는 ‘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지난 2009년 6월 한은은 경제규모에 걸 맞는 고액권의 요구에 따라 5만원 신권을 내놨다. 5만원권 화폐발행규모는 발행 초기인 2009년 2억장에서 2013년 8억1000장으로 4년 사이에 4배 이상 급등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10억4000장으로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5만원권은 발행된 지 5년여 만에 지난해 10월21일 현재 화폐발행잔액 49조1000억원에 도달하며 은행권 발행잔액(69조1000억원)의 약 71%를 차지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저금리와 낮은 인플레이션율 등 거시경제여건에 따라 현금선호경향이 높아졌으며, 거래 및 보관의 편의성으로 민간의 5만원권 수요가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5만원권 발행이 급증하는 만큼 전체 화폐의 환수율이 잠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 화폐 환수율은 2007년 96.2%에 달했고 5만원권이 나오기 직전 해인 2008년 만해도 95.4%로 거의 대부분 회수됐으나, 5만원권 발행 첫해인 2009년부터 감소세를 타며 2013년 73.0%로 70%대 초반까지 주저앉은 데 이어 지난해에는 64.7%까지 급감했다.

더 큰 문제는 5만원권이 시중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전체 유동성 공급에도 이상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한은에 따르면 5만원권은 최초 발행된 2009년 6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누계기준 88조1000억원이 풀렸다. 이중 44.3%인 39조원만 환수되고 나머지 55.7%에 해당하는 49조1000억원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유통된 5만원권 전액 가운데 절반 넘게 중앙은행 금고로 복귀하지 않는 셈이다.

한은 통계를 이용해 현대경제연구원이 자체 추정한 결과, 우리나라의 통화승수는 2008년 7월에 27.3배까지 상승했으나 5만원권이 시중에 풀린 이후로는 추세적 하락세를 보이며 지난해 11월 19.5배로 떨어졌다.

김천구 선임연구원은 “통화승수의 하락세가 지속된다면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 함정’이 나타날 수 있다”며 “통화승수 이외에 유동성을 나타내는 지표인 통화유통속도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내림세”라고 말했다.

한은은 이에 대해 “발행과 환수 간에 시차가 존재하는 데다 설 및 추석명절 등 계절적 요인 등으로 큰 폭의 변동성을 보여 대상기간의 장단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면서 “누적액 기준 5만원권 환수율은 1973년 6월 발행 당시 최고액권이었던 1만원권의 환수율과 비슷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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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한국은행 자료를 이용해 현대경제연구원 자체 추정. 화폐 환수율=환수액/발행액×100. 자료=현대경제연구원


◆ 소지 간편해진 5만원권…현금보유 늘린 가계·기업

저물가·저금리 기조가 길어지며 화폐보유에 대한 기회비용도 줄어들고 있다.

현금 보유의 기회비용은 시중금리 정도와 경제주체의 기대인플레이션에 자극을 받는다. 시중금리가 내려가 경제주체들이 은행에 자금을 맡겨도 추가수익을 얻기 어렵고, 미래 물가상승에 대한 눈높이가 낮아지면 현금을 소지하고 있어도 화폐가치의 손실이 적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금은행의 수신금리 하락으로 투자자가 현금을 은행에 예치해도 수익성이 낮다. 순수저축성예금과 시장형금융상품의 수신금리는 2009년 6%대에 육박했으나 올해에는 2%대로 급락한 상태다. 요구불예금과 수시입출식예금의 수신금리도 0%대로 추락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가계의 평균소비성향은 2007년 76.6%에서 2010년 77.3%까지 다소 올랐으나 ▲2013년 73.4% ▲2013년 72.9%까지 축소됐다.

국내기업도 향후 위기에 대비해 투자를 줄이는 대신 현금보유를 늘리고 있다. 설비투자의 장기추세는 2010년 반등했으나 최근 다시 추세적인 하락세로 돌아섰다.

금융위기 이후 국민총처분가능소득 대비 총자본형성 비율인 국내 총투자율은 지난 2013년 28.8%까지 떨어졌다. 한국거래소에 의하면 국내 상장사의 현금유보율은 금융위기 이전인 2008년 712.9%에서 2013년 1023.5%로 높아진 데 이어 작년 상반기말 1092.9%까지 증가했다.

김 선임연구원은 “전세가격 상승, 고령화 및 노후대비 부족, 과도한 빚 부담 등으로 가계가 소비를 줄이고 있다”며 “경기부진으로 가계는 지갑을 닫고 기업은 투자를 축소해 현금 보유를 늘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통화당국은 실물경제에 지속적으로 유동성 공급을 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통화승수가 하락세를 보이면 정책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며 “통화승수 하락세로 가계의 소비침체와 기업의 투자위축이 장기화되고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정책당국이 기업의 투자 확대, 가계의 소비여력 확충 등 유효수요 창출 대책을 마련함과 동시에 경제주체들의 물가상승률 하락 심리를 차단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또 자산시장 활성화 및 금융시장의 대출행태 개선 등을 위한 대안도 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김 선임연구원은 “확장적 재정정책을 비롯해 가계의 소득을 늘려주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저부가 내수업종, 한계 및 차상위계층, 자영업 및 임시·일용직에 정책의 초점을 집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고용서비스의 혁신과 질적 제고에도 주력하고 투자여건을 제약하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세제지원 등 투자인센티브를 제공해 기업의 투자 확대도 유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일경 기자 ikpar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