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18세기 스웨덴… 중국까지 항해 한 번으로 국가 GDP만큼 벌었다는데…

2015. 3. 24. 22:01C.E.O 경영 자료

[Weekly BIZ] 18세기 스웨덴… 중국까지 항해 한 번으로 국가 GDP만큼 벌었다는데…

  • 허윤·서강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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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5.03.21 03:03

    [무역 이야기]

    허윤·서강대 국제대학원장
    허윤·서강대 국제대학원장

    "이봐 김 마담, 이번에 인천에 배만 들어오면 말이야, 내가 다이아 반지 하나 해 줄게." 50년대와 6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허장강의 명대사다. 허풍쟁이라면 한 번쯤 따라 했던 복고풍 작업 코멘트의 전설, '인천에 배만 들어오면….'

    하지만 무역의 역사는 이런 대사가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돈은 배와 함께 들어왔고, 배는 대박의 설렘을 안고 거친 바다를 오갔다.

    기원전 450년경 고대 아테네는 시칠리아와 이집트에서 곡물을, 스페인과 흑해에서는 염장(鹽藏) 생선을 수입했다. 와인과 생활용품, 각종 공예품을 가득 싣고 나간 배가 밀 400t을 싣고 입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해양 무역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무역은 선주와 무역상 그리고 투자자라는 세 주체가 컨소시엄을 이뤄 주도했다. 무역상은 배의 일정 면적을 빌려 수출입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화물을 담보로 투자자로부터 돈을 빌렸다. 아테네의 무역 거래는 증인 입회하에 구두 형태로 이뤄져 그 전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다행히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란 투자자가 원고로 나선 송사(訟事) 기록이 남아 있다. 뉴욕대학의 라이오넬 카슨(Lionel Casson) 교수는 그의 책 '고대 무역과 사회(Ancient Trade and Society)'에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아테네의 투자자는 선주나 무역상의 배나 화물을 담보로 (저당가는 시가의 50%) 돈을 투자했는데, 이자율은 3개월에 평균 67.5%였고 100%가 넘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시 아테네에서 부동산 투자는 연 8%, 예금은 약 10%, 우량 채권은 10~12%, 비우량 채권은 16~18%, 제조업 수익률은 20%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무역에 100을 연초에 투자했다면 1년에 네 번 무사히 배만 들어온다면 연말에 무려 787이라는 엄청난 원리금을 기대할 수 있었다. 물론 배나 화물이 사고로 사라지는 경우엔 전액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피소된 무역상은 와인 단지 3000개를 담보로 돈을 투자받았는데, 조사 결과 3000개가 아닌 450개만 싣고 떠났으며, 해외에서 물건을 싣고 와서는 다른 곳에 하역하고 그 화물이 태풍 때문에 사라졌다고 거짓 진술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이 송사 기록에는 또 데모스테네스 부친이 돈을 어떻게 굴렸는지에 대한 대목이 자세히 나오는데, 당시 아테네 부자들은 유동 자산의 약 20%를 해양 무역에 투자하고 '아테네항에 배 들어오길…' 학수고대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 초, 프랑스로 배경을 바꿔 보자. 여행가이자 작가였던 장 로크(Jean de la Roque)는 프랑스 동인도사 소속의 배 3척을 이끌고 1년 항해 끝에 1708년 예멘의 모카(Mocca)항에 도착한다. 그는 아프리카를 돌아 홍해로 가는 항해 길을 연 첫 프랑스인이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예멘에서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수입되는 커피를 중간 상인 없이 예멘 생산자와 직거래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의사들은 커피가 인체에 해롭다고 경고하면서 정부에 수입 금지를 요구하는 상황이었지만, 로크는 오히려 커피 시장에서 유럽의 미래를 보았다. 그는 세계의 커피 독점 공급 기지였던 예멘에서 인도 중간 상인에게 사기당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6개월 동안 현지에서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커피 600t을 구입해 프랑스로 금의환향하게 된다. 그의 배가 마르세유항에 들어오면서 프랑스의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단 한 번 거래로 그는 엄청난 돈방석에 앉았다. 2년 뒤 그가 다시 모카를 찾았을 때 그는 예멘의 왕과 식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743년 3월, 스웨덴의 범선 예테보리호는 예테보리항을 떠나 중국으로 세 번째 항해를 시작한다. 자바섬을 지날 때 선원 21명이 괴혈병으로 숨졌지만, 남은 선원 120명은 1744년 9월 마침내 중국 광저우(廣州)에 도착한다. 이들은 배에 실어온 약 250만 스페인 은원(백은)을 들고 중국 무역상에게 달려가 차, 도자기, 비단, 진주 등 유럽인들이 꿈에 그리는 상품 700t을 사고는 다시 9개월 항해를 거쳐 고향 앞바다에 도착한다. 가족들의 환호성에 뒤덮인 부두를 불과 1㎞ 앞둔 예테보리호는 그러나 암초를 들이받고 침몰한다. 리궈룽(李國榮)의 저서 '제국의 상점'에 따르면 배가 가라앉자 선원들은 화물의 일부(약 3분의 1)를 급히 건져 탈출했는데, 그것만으로도 항해에 든 모든 비용과 심지어 선박 건조 비용까지 남겼다고 한다. 이 배가 1차 항해에서 번 돈이 당시 스웨덴의 GDP와 비슷했다고 하니 '예테보리항에 배만 들어오길…' 기다렸던 스웨덴 사람들의 기대와 염원이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무역은 세상을 바꾸었다. 질병과 풍랑, 해적과 싸우며 거친 바다를 누볐던 무역상들이야말로 오늘의 우리를 있게 만든 역사의 주역이다. 오늘 인천에 배 들어오는 모습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