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시행령 공화국’인가
2015. 6. 6. 20:22ㆍC.E.O 경영 자료
대한민국은 ‘시행령 공화국’인가
행정부, 국회 얕잡아보고 마음대로 시행령 만들어… 입법부·사법부 압도
시행령이 논란이 되고 있다. 시행령은 국회가 만드는 법률에 맞춰 행정부가 자세한 사항을 규정한 하위법이다. 헌법 아래 법률이 있고 그 아래 명령이 있다. 이 명령을 시행령이라 부른다. 법률이 헌법을 벗어나면 위헌이지만, 시행령은 법률을 벗어나거나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 담겨도 위헌이다. 국민의 대의기관이 만든 국회입법이 아니라 이를 적용하는 행정부가 만든 행정입법이라서다. 현재 국회와 청와대가 벌이는 논쟁의 핵심은 시행령에 문제가 있을 때 국회가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지다. 이보다 근본적인 게 있다. 시행령이 언제부터 이렇게 비대해졌는지, 어느새 행정부가 입법부와 사법부를 압도하는 현 상황을 놔두어도 되는지이다.
지난 5월 29일 여야 합의로 국회법 제98조의 2 제3항이 개정됐다. ‘상임위원회는 소관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제출한 대통령령·총리령·부령 등의 행정입법이 법률의 취지 또는 내용에 합치되지 아니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소관 중앙행정기관의 장에게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수정·변경을 요구받은 사항을 처리하고 그 결과를 소관 상임위원회에 보고하여야 한다.’ 개정 전과 비교하면 ‘수정·변경을 통보’하던 것이 ‘요구’로, ‘처리 계획과 결과 보고’가 ‘처리 후 결과 보고’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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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운전은 3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1000만원 벌금이다. 징역이 3년까지 나온다는 것은 꽤나 심각한 범죄라는 뜻이다. 실제로 음주운전처럼 징역 3년까지 가능한 범죄를 찾아보면, 허위진단서 작성, 협박, 주거침입 등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서운 음주운전의 기준은 무엇일까. 소주 한 방울이라도 먹으면 징역 3년까지 받을까, 아니면 두 병 정도는 마셔야 음주운전이 될까. 놀랍게도 법률에는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도로교통법에는 ‘누구든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동차 등을 운전하여서는 아니된다’고만 적혀 있다. 입법부인 국회에서 목사님이나 스님이 하실 법한 얘기로 길면 3년까지 감방에 보내겠다고 정한 것이다.
그런데 도로교통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운전이 금지되는 술에 취한 상태의 기준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적혀 있다. 대통령이 징역 3년에 해당하는 범죄가 무엇인지도 정할 수 있게 했다. 대통령이 정하기에 따라 음주운전 기준은 혈중알코올농도 0.05%일 수도 0.15%일 수도 있다. 혹시라도 행정부가 유흥경기라도 살리겠다며 음주운전의 기준을 높이면, 음주운전을 처벌한다는 국회의 결단은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맹탕 도로교통법’이나 법률도 아니면서 사람을 처벌하는 ‘오버 도로교통법 시행령’이 위헌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2006년 국회는 도로교통법 시행령에 있던 혈중알코올농도 기준을 도로교통법으로 올려서 개정했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었지만 대통령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제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행정부에 넘긴 것은 국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회의 무능과 태만함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행정부가 만드는 시행령에 모든 것을 떠미는 ‘맹탕 법률’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으로 선고된다. 법률용어로는 포괄위임 금지라고 하며, 헌법 75조에서 유래한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시각장애인 안마사 자격 독점 조항이다. 시각장애인들이 독점할 수 있는 근거는 의료법이 아닌 보건복지부령에 있었다. 2006년 헌법재판소는 누군가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는 국회의 법률이 정할 일이라며 보건복지부령을 위헌으로 결정해 없앴다. 이후 시각장애인들이 한강에서 투신하는 등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됐다. 국회는 시각장애인 독점 조항을 이번에는 의료법에 넣어 문제를 해결했다. 의료법에 대해서도 다시 위헌소송이 제기됐지만 합헌이 선고됐다. 하지만 맹탕 법률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 고위 관계자는 “핵심적인 내용을 시행령에 떠넘긴 ‘백지 위임’ 법률들에 대해 위헌을 선고해 페지했더니, 아주 간단히 적은 ‘한 줄 위임’ 법률이 등장하고 있는데 위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국회·청와대 ‘시행령 수정 요구권’ 논쟁
국회가 이렇게 엉터리 위헌 법률을 생산하는 이유는 현대사회가 과거에 비해 복잡해지고 전문화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국회가 사회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전문가 집단인 행정부에 권한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또 로비에 대해서도 국회가 행정부보다 상대적으로 취약해, 행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낫다는 말도 있었다. 실제로 국회는 스스로 법률을 만들거나 검토하지 못해 대형로펌에 의뢰하고 있고, 이를 만만히 생각하는 로펌들이 법률 초안을 만들어 국회에 로비하고 있는 실정이다(<주간경향> 1114호 커버스토리 참조).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차라리 맹탕으로 법률을 만들고 나머지는 행정부가 정하도록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헌법재판소 관계자는 “현대국가가 행정국가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근본 원칙은 국회입법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행정입법에 무게를 두다 보면 삼권분립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행정입법의 극단적인 사례는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 직후인 1980년에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다. 156일 동안 215건을 통과시켰다. 야당 정치인의 활동을 금지한 정치활동규제법을 비롯해 언론기본법, 국가보안법 개정안, 노동법 개정안,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이 모두 통과됐다. 이와 함께 1961년 박정희 일파가 쿠데타 직후에 설치한 국가재건최고회의도 마찬가지로 행정입법기구다. 정치인 정화법을 발표해 이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다. 노희범 변호사는 “현재 일본에서 주변사태법 등을 만들어 평화헌법을 무력화하는 것도 비슷한 사례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만든 시행령이 법률의 취지를 벗어나는 것이나, 일본에서 집권 의회가 만든 법률이 헌법을 넘어서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고 설명했다.
사법부도 행정부 시행령에 끌려다녀
최근에는 국회가 무능해 시행령으로 권한을 넘기는 수준을 넘어, 행정부가 국회를 얕잡아보고 마음대로 시행령을 만드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춘석 새정치민주엽합 의원실이 분석한 자료를 보면 이렇다. 정부는 당초 의료관광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의료법을 개정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시행령에 손을 대려 한다는 것이다. 의료법에서는 부대시설로 ‘일반음식점, 이용업, 미용업 등 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사업’이라고 했는데, 복지부령 개정안에서 ‘외국인환자업과 여행업을 신설하고’ 등을 만들었다. 또 국토교통부가 수도권정비계획법 시행령에서 도심 과밀부담금 면제 대상에 금융업소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과밀을 막자는 모법의 취지를 벗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위헌적인 시행령을 손대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누군가 구체적인 사건이 있을 때 소송을 벌이면서 법원에서 위헌을 다투는 것이다. 시행령에 대한 위헌 판단은 판사들이 한다. 그럼 사법부의 상황은 어떨까.
최근에는 사법부마저 행정부의 시행령에 끌려다닌다는 비판이 나온다. 2013년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의 후손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조선적(朝鮮籍) 재일동포가 학술대회 참가차 입국하려는 자신을 막은 외교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 판결했었다. 사건을 담당했던 윤지영 변호사는 “외교부의 결정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재판부가 판결의 주요한 근거로 행정부의 시행령을 들었다. 행정부를 상대로 하는 행정소송에서 시행령을 주요한 근거로 삼으면 사법부가 하는 일은 도대체 뭐냐”고 했다.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법조계 관계자는 “시행령에 대해서는 재판부가 위헌 여부를 판단할 권한이 있지만, 상고돼 대법원에 올라가면 대법관 전원이 전원합의체를 열도록 돼 있다. 그래서 판사들이 어지간해서는 시행령에 손을 대지 못한다”고 말했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삼권분립 원칙이라는 대전제를 제외하면 나라마다 시기마다 그 한계는 제각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전종익 교수는 헌법재판소 실무연구회에서 “입법부와 행정부가 정책결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이 없다. 역사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행정입법의 한계에 대해서도 나라마다 형편이 다르다”고 밝혔다. 행정입법에 엄격한 대표적인 나라는 독일이다. 나치 정권 당시 행정부가 입법부를 압도한 경험 때문이다. 독일헌법인 기본법에서 위임입법의 한계와 요건을 정해두었다. 반면 일본의 경우 행정부가 법체계를 주도하는 편이다. 내각제라는 시스템의 영향도 있으며 오래된 행정부 우위 사고의 결과로 평가된다. 당장 음주운전 기준이 시행령에 있었던 것도 일본법의 영향이다. 특히 현재 아베 행정부가 안보관계법 같은 법률을 만들어 평화헌법을 무력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 국회와 청와대의 논쟁에 대해서는 헌법을 해석해온 헌재의 결정에 비춰볼 때 국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현직 법조인이 더 많다. 장진영 변호사는 “간단히 말해서 국회가 행정부의 시행령 적용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인 시행령 자체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고, 이유는 그 시행령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곳이 국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행령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행정입법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회현상에 빠르게 대처하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시행령이나 법률이나 자주 개정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시행령이 너무 과한 내용을 담으면서 스스로 몸이 무거워졌다는 것이다.
그동안 헌재가 밝혀온 시행령에 대한 입장에서 지금 벌어지는 논란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관점을 얻을 수 있다. “행정기능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이 동시에 입법권을 행사하는 것은 권력분립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며, 다만 행정기관은 국회의 입법에 의하여 내려진 근본적인 결정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필요한 범위 내에서 행정입법권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99헌바91 등) “권력분립 원리는 그 자체가 폭압적인 법률과 집행에 의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고안된 원리이다. 포괄적인 입법의 위임은 행정권의 자의적인 행정법령의 제정과 이를 통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을 높인다.”(2004헌바10 등)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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