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28. 18:30ㆍC.E.O 경영 자료
[WEEKLY BIZ] 창의 혁명 그만둬라… 사소한 아이디어 키우는 '스케일 업' 혁명 일어나야
입력 : 2017.07.22 08:00
[WEEKLY BIZ Lounge] (3)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지난 2015년 9월 서울대 공대 동료 교수 26명과 함께 한국 산업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결과를 '축적의 시간'으로 펴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 책 첫장에서 이 교수는 한국 산업의 가장 큰 문제로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를 제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산업은 선진국에서 기술과 설계도를 들여와 이를 빠르게 실행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고 했다.
이 교수가 얼마 전 '축적의 시간' 후속편으로 '축적의 길'을 내놨다. 한국 산업이 진정한 기술 선진국으로 올라서기 위한 전략과 처방을 정리했다. 그가 제시한 한국 산업의 활로(活路)는 무엇일까. "창의 혁명이 아니라 스케일 업(scale up·키우기)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놀라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보다 작은 아이디어를 키우고 구체화하면서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방법을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 교수는 책에서 "기업과 정부 모두 신성장 동력, 특히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는 기발한 아이디어, '블루오션'을 찾는 노력을 그만둬야 한다" "선택과 집중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파격 주장을 했다. 그를 만나 한국 산업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축적의 길'을 들어봤다.
- ▲ 이정동 서울대 공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에는 시행착오로 축적한 역량, 남들이 갖지 못한 고유한 경험을 가진 이른바 ‘고수’가 거의 없고, 대부분의 리더가 같은 일을 반복하며 효율만 추구해 왔다”고 지적했다./박상훈 기자
2단계에서 점프 실패한 한국 경제
―한국 경제 상황을 '1단 로켓 분리 실패와 2단 로켓 점화 실패'에 비유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로켓이 점화되지 않은 0단계에서 출발해서 1단계까지 성공적으로 온 나라도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의 산업은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제 뚜렷한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 더 높이 올라갈 추진력을 상실한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1단 로켓 분리 실패와 2단 로켓 점화 실패라고 했다. 1단계와 2단계의 핵심 역량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1단계와 2단계의 핵심 역량이 어떻게 다른가.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크게 '밑그림 그리기', 즉 '개념설계'와 그 밑그림대로 구매·시공·생산하는 '실행하기'로 나눌 수 있다. 1단계가 실행, 2단계가 개념설계다. 개념설계는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것을 넘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전에 없던 신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을 모두 포괄하는 과정이다. 실행과는 전혀 다른 역량을 필요로 한다.
실행에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즉 노하우(know-how)가 중요하다. 노하우는 매뉴얼 보고 열심히 공부해서 성실히 수행하면 된다. 개념설계를 하려면 먼저 '왜'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즉 '노와이(know-why)'가 중요하다. 이것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본인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선진국과 글로벌 기업의 기준이다. 한국은 구글이 알파고를 만들면 우리도 한국형 알파고를 만든다는 식이다. '왜'라는 질문 없이 그냥 따라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노하우에만 충실했지만 이제는 노와이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
―흔히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취약점으로 원천 기술과 핵심 특허 부족을 거론하는 데 개념 설계 측면에서 어떻게 봐야 하나.
"개념 설계를 하려면 남들이 떠올리지 못한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큰 착각이다. 아이디어에 스케일 업을 곱해야 개념 설계가 나온다. 스케일 업은 희미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이를 현실에서 작동 가능하도록 키워내고 사업화·제품화하는 과정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특허, 논문만 찾고 있지만 사실은 스케일 업을 하느냐 못 하느냐가 개념 설계의 핵심이다. 그동안 한국 경제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을 잘못 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디어 키우기'로 경쟁력 향상 나서야
'축적의 길'에는 독일 소프트웨어 기업인 SAP가 내놓은 데이터베이스 관리 플랫폼 HANA(하나) 개발 사례가 소개돼 있다. HANA는 서울대 공대의 실험실 벤처팀이 개발했지만 한국에서 상품화하지 못했다. SAP는 HANA를 인수한 뒤 6년 동안 검증하고 확장하고 다시 시험하는 지난한 스케일 업 과정을 거쳐 2011년 제품으로 출시했다.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이렇게 작은 아이디어를 키워내고 상품화하는 스케일 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스케일 업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아이디어가 없는 게 아니라 스케일 업을 못 하는 게 한국 기업의 문제라는 것인가.
"스케일 업은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임시변통을 잘하고 융통성 있게 단계와 과정을 생략하면서 실행을 빨리 하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평가해왔다. 실행 과정에 편법과 불법이 있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 한국 엔지니어들이 개인적 역량은 선진국 못지않은데도 창의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들이 스타트업 문화를 도입하겠다며 복장을 자유화하고 호칭을 바꾸고 있지만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반드시 기록을 남기고, 과거 기록을 참조하도록 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매뉴얼을 무시하고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매뉴얼대로 해나가면서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기록하고 매뉴얼을 업데이트하도록 해야 한다."
―고수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스케일 업은 프로세스다. 작은 규모로 조금씩 다르게 계속 시도하는 것이다. 영점(零點) 사격과도 비슷하다. 선택과 집중으로 단번에 목표를 맞추는 게 아니라 한 발 쏘고 조정하고 다시 쏘는 식으로 고정돼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목표에 접근해가야 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 똑같은 일을 반복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가 될 수 있다. 한국 기업에는 이런 고수가 거의 없다. 대부분 리더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효율만 추구해온 사람들이다. 시행착오로 축적한 역량, 남들이 갖지 못한 고유한 경험이 없다. 신참자들보다는 더 빨리 일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차이가 해소된다. 한국 기업이 개념 설계 역량이 없다는 것은 고수가 없고, 고수를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 건 주의'보다 '스몰 베팅'이 중요
―개념 설계를 위해 기업이 더 해야 할 일은 뭔가.
"선택과 집중으로 한 방에 큰 것을 터뜨리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작은 규모의 다양한 시도로 해답을 찾아나가는 스몰 베팅(small betting)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 축적된 역량이 많은 대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 스핀오프(spin-off·분사)와 함께 외부에서 혁신을 가져오는 스핀온(spin-on) 등으로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대기업이라고 해서 모든 일을 내부에서 다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내 대기업들이 진정한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스타트업의 작은 아이디어를 인수해서 스케일 업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선진국 기업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들도 스케일 업을 할 수 있나.
"여럿이 손을 잡으면 된다. 스케일 업에서는 오픈 네트워크(open network)가 중요하다. 혼자 버티는 게 아니라 반드시 손잡고 버텨야 한다. 흔히 말하는 폐쇄적인 사일로(silo)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러 전문가와 기업들이 모여서 새로운 제품 개발을 시도하고, 성공하면 그 성과를 나누는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오픈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중소·벤처기업도 얼마든지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 개념 설계 역량을 쌓을 수 있다."
이정동(50)
-서울대 공대 박사
-서울대 공대 산업공학과 교수
-한국기업경영학회 회장
-한국생산성학회 회장
Knowledge Keyword
개념 설계(conceptual design)
고부가가치의 제품·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밑그림 그리기. 좁은 의미의 설계는 고객 요구를 도면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뜻하지만 개념 설계는 제품·서비스에 대한 전체 기획을 포함한다.
스케일업(scale up)
작은 아이디어를 키워내고 상품화하는 작업. 기술이나 제품·서비스의 수준·규모를 확대해 나가는 것을 지칭할 때 주로 쓰인다. 기업이나 생산의 규모가 커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21/2017072101680.html#csidx7006f0047961416a21c9c6ae0888d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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