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 수천 명을 고친 심선택 선생 

2018. 1. 13. 20:54생활의 지혜



암환자 수천 명을 고친 심선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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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3.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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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를 잘 살피면 어떤 암이든지  고칠 수 있는 법이오

 

"병을 고치는 것도 전쟁이나 마찬가지예요. 병을 못 고치면 사람이 죽는 겁니다. 나는 이 병을  못 고치면 내가 죽는다는 각오로 치료에 임합니다. 그렇게 해야 실수가 없어요. 나한테 오는 사람은 전부 말기 암환자들이예요. 염라대왕 문턱까지 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음식이 안 넘어가고 대변도 안 나오며 몸무게가 20킬로그램이나 30킬로그램이 줄어든 사람이 많아요. 얼마 전에 환자가 한 사람 왔는데 몸무게가 35킬로그램밖에 안 돼요. 병원에서 장암으로 진단을 받았다고 하는데 내가 배를 만져보니 뱃속에 딱딱한 돌멩이 같은 것이 수십 개 꽉 차 있어요. 약을 줘서 덩어리 삭이고 대변 나가게 해 줬더니 이제 살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결국 이 사람이 낫기는 나았어요."  
 
 구석구석 약초 내음에 절어 있는 제기동의 허름한 뒷골목. 어느 녹슨 철대문 안 허물어져 가는 한옥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내는 심선택(沈璇澤 : 64세) 옹은 40년 동안 의술을 연구하여 암, 정신병, 간질 등 현대의학이 포기한 난치병자 수천 명을 치유한 기인(奇人)이다. 그 치료법은 기이하고 효과는 빠르고 정확하며, 숨이 넘어 가는 사람을 살려 내고도 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의사면허가 없어 돌팔이임을 자처하고 있으나 그야말로 진짜 명의 중의 명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복진법(腹診法) 곧, 배를 자세히 관찰하여 병을 진단하고 <상한론(傷寒論)>의 처방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40년 동안 적어도 수백 명이 넘는 암환자를 완치하였으며, 암뿐만 아니라 간경화증, 간질, 정신병, 신경통, 관절염 등 어떤 병이든지 못 고치는 병이 거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가장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방법, 곧 고방(古方)으로 가장 고치기 어렵다는 암을 전문으로 치료한다. 그의 진단법과 치료법은 요즘 한의사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방법과 전혀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가장 깊이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진단법은 복진법, 곧 배를 자세히 살피는 것이오, 치료법은 고방, 곧 <상한론>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배를 잘 살펴 정확하게 처방을 하면 세상에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40년 동안 암환자 수천 명을 고치다
 

"40년 동안 암환자를 치료하면서 죽을 사람을 살리기도 많이 했으나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내가 잘못하여 죽게 한 일도 많았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암이라는 병의 정체를 잘 몰랐어요. 그 때는 내가 살린 사람보다 죽인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치료하던 환자가 죽으면 진흙탕에 꿇어앉아 밤을 새우며 통곡을 했습니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내 잘못으로 죽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제야 암의 정체를 좀 안 것 같습니다. 거의 실수를 하지 않고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한론>은 지금부터 1천 7백년 전 중국 후한(後漢)의 장중경(張仲景)이라는 사람이 쓴 동양의학의 고전으로 상한(傷寒)이라고 하는 급성 열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경과에 따라 기술한 책이다. <상한론> 말고 <금궤요략(金櫃要略)>도 장중경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주로 만성질병의 증세와 치료법을 적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한론>과 <금궤요략> 등에 기재되어 있는 처방을 고대의 의학사상으로 회귀한다는 뜻에서 고방(古方)이라고 하고, 그 뒤 금(金), 원(元), 명(明), 청(淸)나라 때와 현대에 만든 처방을 후세방(後世方)이라고 한다. 요즈음 우리나라, 중국, 일본을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동양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후세방을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심선택 옹은 철저하게 고방을 고집하고 반드시 고방을 써야만 근본적으로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후세방에는 복진법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정확하게 진단을 해서 약을 쓸 수가 없고 본래 고방에 있던 처방에다 약재를 하나 둘씩 계속 보태다 보니 처방만 복잡해진 겁니다. 한 처방에 약재를 대개 30-50가지씩 넣어요. 나는 한두 가지, 많아야 7-8가지밖에 안 넣어도 병이 잘 나아요. 잘 낫는데 처방을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주변에서 약 짓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후세방을 공부하는 사람들이고 고방을 연구하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어요. 그러니 고방을 하는 사람은 참 외롭습니다.
 고방과 후세방을 총에 비교하면 고방은 외알탄과 같고 후세방은 산탄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고방을 목표물을 정확하게 조준해서 상대방을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고 후세방은 산탄을 수없이 퍼붓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탄총으로는 그 파편에 맞는 것도 있고 안 맞는 것도 있으며 빗맞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결국 산탄총 파편에는 정확하게 맞아도 잘 나가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곰을 잡으려면 총알이 굵은 총으로 한 방에 쓰러뜨려야지 꿩 잡는 총으로 잡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고방은 한 방에 상대방을 나가떨어지게 하는 위력이 있지만 그만큼 까다롭고 위험이 따릅니다. 잘 쓰면 어려운 병을 약 한두 첩에 뿌리뽑을 수 있지만 잘못 쓰면 오히려 목숨을 잃게 할 수도 있습니다. 대신 후세방은 위험은 적지만 병의 뿌리를 완전히 뽑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후세방을 쓰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처음에는 병이 잘 낫다가 웬만큼 지나면서부터는 효과가 없다고 해요. 이것이 후세방의 한계입니다. 처음에 잘 낫다가 갑자기 콱 막히면 방법이 없는 거예요. 고방은 참 어렵습니다. 병의 경중과 허실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고방을 쓸 수 있습니다." 
 

상한론은 한의과대학에서 반드시 배우는 책이지만 그 내용이 너무 어려워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고 배우기도 어려우며 실제 임상에서도 그다지 쓰지 않는다. 중국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상한론>은 거의 버려진 의학이다. 심선택 옹은 이 버려진 의학에 통달하여 어떤 병이든지 마음대로 고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다  
 

심선택 옹은 청송 심씨로 경북 청송 사람이다. 여섯 살 때 고향을 떠나 강원도 평창군의 깊은 산골에서 자랐다. 어려서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으며 학교라곤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다. 시골에서 농사 짓고 땔나무 구하러 산에 다니면서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의술공부에 몰두하게 된 것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서른 두 살 때 그는 와사풍 곧, 안면신경마비증에 걸렸다. 어느 날 갑자기 얼굴 근육이 마비되어 한 쪽 눈을 감을 수 없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몇 군데 병원에 가서 약을 지어 먹고 치료를 받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자기 병을 스스로 고쳐 보기로 작정했다.
 

"내 병을 고쳐 보겠다고 의학을 공부했어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책을 보고 혼자 공부했지요. <방약합편(方藥合編)>, <동의보감(東醫寶鑑)> 같은 책을 보니 꽤 재미가 있어요. 가끔 환자 치료를 해 보니 잘 낫고. 그런데 내가 의학을 좀 안다고 소문이 나자 암, 중풍, 폐결핵 같은 이런 난치병자들만 몰려왔어요. 그래서 <동의보감>이나 <방약합편>에 나와 있는 대로 약을 써 보니 잘 낫지를 않아요. 그래서 의술의 근본이 뭐냐, 근본을 찾으려면 <방약합편> 같은 후세방(後世方) 보다는 고방(古方)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고방이란 어떤 것이냐, 이건 수천 년 전에 성인들이 만든 처방이라. 후세방은 무언가 결함이 있지만 고방은 완전해요. 그래서 고방을 찾다가 상한론(傷寒論)을 공부한 거라. 스승이 없으니 순전히 경험으로만 공부를 했지요. 나뭇짐 지고 오면서도 책을 읽고, 버스 타고 가는 중에도 책을 읽고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공부했지요.
 병을 치료하는 것, 특히 암환자를 고치는 것은 전쟁과 같습니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겁니다. 환자 치료도 마찬가지예요. 병을 고치지 못하면 내가 죽겠다는 자세로 의술을 다루어야 하는 겁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호랑이 굴에 들어가겠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의사가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죽을 사람을 살린 감초의 신비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의술공부에 몰두하여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그는 시골 한의원에 취직을 했다. 그가 환자를 잘 본다는 소문이 나자 사방에서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의 처방대로 약을 쓰면 신기하게도 잘 나았다. 중풍, 관절염, 신경통, 암 난치병자들만 줄지어 몰려 왔고 그는 열심히 치료를 했다. 자궁암을 몇 사람 고쳐 주었더니 자궁암을 잘 고친다고 소문이 나서 자궁암 환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온 적도 있었다. 평창, 영월의 주천, 제천 등에서 환자를 보다가 1983년에 서울로 올라왔다.   
 병원에서 골수조직구암으로 사망 직전에 있는 사람을 살린 것이 서울로 올라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암환자를 한 사람 고치는 바람에 서울에 오게 됐어요. 어떤 한의사의 친척 형님인데 서른 다섯 살이고 키가 크고 똑똑한 사람이라. 그 때는 취직하기가 어려웠는데 이 사람이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해서 밤낮없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쓰러져 의식을 잃었어요. 병원에서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조직검사를 보니까 골수조직구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어요. 그 병원이 서울대학교 병원입니다. 골수 조직구암이 그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라. 그전에는 그런 병이 없었대요. 그러니 치료법이 있을 리 없지요.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주시오 하고 가족들이 부탁을 해서 저독성 항암제를 경구투여 했어요. 그랬더니 환자가 의식이 회복되는 듯 하다가 그 다음날 다시 항암제를 투여했더니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어요. 죽은 것처럼 되어버린 거라.
 의식을 잃은 지 4일 째 되는 날에 연락을 받아 가 봤어요. 병원에서는 아무 치료도 하지 않고 알부민 주사로 목숨만 붙어 있게 할 뿐이라. 내가 진찰을 하러 들어가니 친척 동생인 한의사가 먼저 기도를 해요. 하나님께서 심선생님한테 능력을 주셔서 형님이 빨리 살아나게 하시든지 아니면 천국으로 보내시든지 하나님 뜻대로 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환자는 얼굴과 온 몸이 노랗고 눈동자가 축소되었으며 혀가 나오지를 않아요. 열은 40도가 넘고 맥은 1분에 220번 뛰고 땀이 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이미 시체와 다름없는 사람한테 무슨 약을 줄 수 있겠어요. 가족들한테 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화타나 편작 같은 명의가 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을 하는 중에 무언가 이마에 와 닿는 느낌이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약 한 첩만 써 보십시오' 이렇게 말이 나왔어요.
 그런데도 가족들은 아무 표정이 없어요. 이미 죽었다고 단념한 거지요. 나는 환자의 동생을 데리고 한의원에 와서 감초 7돈(26.5그램)을 싸 주며 달여서 세 번 입에 넣어 주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환자의 동생이 와서 '형님이 살았습니다. 아침 식사도 하시고 신문도 보시고 걸어다니기도 하십니다' 하는 거라. 나는 꿈인지 생신지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믿을 수가 없어서 급히 한의원 원장을 불러서 병원에 갔어요. 키가 훤칠하게 큰 환자가 문 앞에 걸어나오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우리는 굳게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어느 사이에 피부의 노란 색이 완전히 사라지고 살결이 하얗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내가 감초를 준 것은 환자가 과로로 쓰러져 탈진한 상태인데 독한 항암제를 써서 죽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환자는 암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항암제의 독성 대문에 목숨을 잃는 것이 틀림없다, 눈과 온 몸이 노란 것도 항암제의 독 때문이다 이렇게 판단한 것이지요. 그러면 감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해독제라. 항암제의 독도 풀고 전에 석유를 마시고 죽으려 죽어 가는 사람을 감초로 살려낸 적이 있어요.
 그 뒤로 환자는 기력이 회복되어 한의원으로 나를 찾아왔어요. 다들 죽은 사람이 살아왔다며 기뻐했지요. 그 일 뒤에 시골로 바로 내려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한의사들한테 소문이 났어요. 한의사들이 앞다투어 찾아와서 선생님 그 좋은 의술을 저희들한테도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 바람에 서울에 눌러앉아 지금까지 15년 동안 한의사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배를 살피는 의술

 그는 환자의 배를 보고 병을 진단한다. 배의 모양을 눈으로 살피고 손으로 눌러서 아픈 곳이나 딱딱한 곳을 찾아내어 병이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중한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는 어떤 병이든지 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배를 잘 살피면 만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곧 환자한테 어디가 아프냐고 물을 필요도 없이 배만 만져보면 병의 원인과 증상, 치료법 같은 것은 망할 것도 없고 그 사람의 성격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진단법에는 복진법이 으뜸이라. 배를 보면 모든 병을 다 알 수 있어요. 뱃속이 비었는지, 꽉 찼는지 막혔는지 오장육부의 상태가 배에 정확하게 나타나는 것이오. 맥은 그 부위가 좁아서 판별하기 어렵지만 배는 면적이 넓잖아요. 복진법의 대가인 일본의 오스까 선생은 마지막에는 맥도 보지 않고 배만 보고 모든 환자를 다 치료했어요. 암이 있는지 없는지 병원에서는 사진을 찍고 조직검사를 해 봐야 알지만 우리는 만져보면 알아요. 말 안해도 만져보면 다 아는 거예요. 병원에서 진단한 것과 내가 만져서 진단한 것하고 병명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가 진단한 것이 더 정확해요. 병원에서는 사진을 보고 판단하고 나는 실물을 보고 판단합니다. 어떤 것이 더 정학하겠습니까? 사진에는 안 나타나도 실물이 만져지는 것이 많아요. 다른 병도 아니고 암을 고치려면 병원보다 더 정확하게 진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병원에서는 암이 위장에 있다고 했는데 내가 보니까 대장에 있어요. 이럴 때는 대장에 있는 암을 목표로 치료를 해야 하는 거라. 병원에서 나온 진단대로 치료를 하면 암만 치료해도 낫지를 않아요. 그런데 내가 진단한 대로 치료를 하면 병이 나으니까 내 방법이 더 정확한 게 틀림없지요."   

 복진법은 옛날에도 있었다. <상한론>에 복진법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배를 눌러보면 꼴꼴 하고 물소리가 난다거나 딱딱한 덩어리가 만져진다거나 하는 등 복진법에 대한 설명이 적지 않게 나온다. 그러나 복진법은 예절을 중요시하는 유교 사회의 전통 때문에 곧 잊혀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체가 높은 부인이나 규수를 진맥하려면 직접 손목을 잡을 수가 없으므로 실을 손목에 매어 문 밖으로 내어 의원이 그 실 끝을 잡고 진맥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남자한테 손목을 잡히기만 해도 정조를 잃은 거나 다름없이 여기던 시대에 어찌 의원이 병을 진단한답시고 부인들이나 규수들의 속살을 내놓게 하여 들여다보고 만질 수 있었겠는가.     
 완전히 잊혀졌던 복진법을 후대에 되살린 사람은 일본인 의학자 오스까 선생이다. 심선택 선생은 오스까 선생의 책을 보고 복진법을 익히고 또 스스로의 경험과 연구로 오스까 선생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증상을 찾아내어 복진법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내 스승은 오스까 선생입니다. 그 분을 만난 적은 없지만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지요. 나는 고방이 완전한 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장중경 선생이 지은 상한론은 182장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상한론은 4백 7장인가 됩니다. 중국 것은 3백 82장인가 되고요. 일본의 상한론 역시 3백 80장이 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본래 장중경 선생이 지은 것은 182장뿐인데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를 거쳐 내려오면서 후인들이 해석을 해서 계속 덧붙여서 지금처럼 내용이 많아진 겁니다. 그걸 오스까 선생이 다 떼어내고 본래대로 182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후세사람들이 덧붙인 복잡한 것은 안 배우고 182장만을 수없이 읽고 연구하여 통달했습니다."
 
 무덤 속에서 시체와 누워서 밤을 지내기도

 그 동안 암환자를 치료하면서 겪은 사연이 적지 않다. 의사는 자기가 치료를 맡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 마련이다.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가 음식을 잘 먹고 힘이 나고 몸이 좋아져서 병이 나으면 하늘에라도 올라가는 것처럼 기쁘지만 환자의 병세가 기울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통증으로 고통을 받게 되면 의사도 환자 못지 않게 괴로운 것이다. 정성을 다해 약을 지어 주고도 혹 환자가 약을 먹고 잘못되지나 않을까 늘 가슴을 졸여야 한다.

 "치료하던 환자가 나으면 기분이 제일 좋지요. 그런 보람에 의사 노릇을 그만두지 못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치료하던 환자가 죽는 바람에 곤욕을 당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부인이 말기 암으로 치료를 받다가 죽었는데 그 남편이 깡패두목이었습니다. 남편이 네가 내 아내를 죽였으니 대신 죽어야 한다면서 밤중에 공동묘지로 끌고 가서 구덩이를 크게 파 놓고 부인의 시체 옆에 누우라고 했습니다. 구덩이 속에서 시체와 함께 누워 덜덜 떨면서 밤을 지샜습니다. 그 때는 환자의 증상만 살필 줄 알았지 암을 치료하는 법을 잘 몰라서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는 자궁암, 유방암, 간암, 위암, 폐암, 직장암, 임파선암, 뇌암 등 갖가지 암환자를 치료하여 성공을 거두었지만 식도암만은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가 그의 어머니가 식도암에 걸려 물도 넘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식도암을 치료하면서 암을 치료하는 중요한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

 "식도암에는 이격탕이라는 약을 쓴다고 책에 나와 있어요. 그런데 이격탕을 식도암 환자한테 써 보니 초기에는 낫는 것 같다가 나중에는 환자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죽어요. 암 덩어리가 커지면서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 겁니다. 못 먹으니 체력이 쇠약해져서 죽을 수밖에요. 책에 써 놓은 대로 해 봐도 낫지 않으니 책이 틀렸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에 어머니가 식도암에 걸렸습니다. 밥을 한 숟갈도 못 드시고 물이나 우유도 안 넘어가게 된 겁니다. 못 드시니까 몸이 몹시 쇠약해졌어요. 보약인 십전대보탕에 이격탕을 합하여 써 보았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 약을 드시고 식도암이 나았어요. 허(虛)가 보이면 먼저 보(補)하라는 원칙이 있는데 그걸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걸 몰라서 환자들을 죽게 한 거지요. 그런 것까지는 책에 적혀 있지 않으니까요.
 병을 치료하는 것은 바둑이나 전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공격을 먼저 할 것이냐, 방어부터 한 다음에 공격을 나중에 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만약에 적군이 강하고 아군이 약하면 기습공격을 할 것이냐, 아니면 천천히 아군의 힘을 기른 다음에 적을 무찌를 것인가를 신중히 판단해서 치료를 해야 하는 겁니다. 전쟁을 하려면 무엇보다 적군보다 아군이 강해야 합니다. 병과 싸우려면 무엇보다도 체력이 강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암을 치료하려면 먼저 보약을 써서 체력을 키운 다음에 암을 쳐 없애는 약을 써야 하는 겁니다.  
 나한테 누가 최고의 암치료약이 뭐냐고 물으면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이라고 대답합니다. 암은 체력소모가 많은 질병이고 체력이 쇠약해지면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몸의 면역기능이 떨어져서 좋은 약을 써도 몸에 잘 흡수되지 않고 제대로 그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이럴 때 보약을 쓰면 살이 지고 힘이 나며 체력이 좋아집니다. 십전대보탕은 쇠약한 것을 치료하는데 제일 좋은 보약이지요. 그런 뒤에 치료약을 쓰면 효과가 훨씬 빨리 나타납니다. 어머니의 식도암을 고친 뒤로 식도암 환자를 몇 사람 치료했는데 모두 먼저 몸을 보한 다음에 이격탕을 쓰니 모두 효과가 있었어요."
 
 병을 치료하는 것은 전쟁과 같아  

 그를 찾아오는 환자는 대개 말기 암환자들이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갈 형편이 못되거나 병원에서 이미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여 치료를 거부한 환자, 또는 병원에서 수술, 항암제, 방사선 치료를 받았으나 낫기는커녕 병원치료의 부작용으로 온 몸이 파김치같이 되어 죽음 일보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다.

 "병을 고치는 것도 전쟁이나 마찬가지예요. 병을 못 고치면 사람이 죽는 겁니다. 이 병을  못 고치면 내가 죽는다는 각오로 치료에 임합니다. 그렇게 해야 실수가 없어요. 나한테 오는 사람은 전부 말기 암환자들이예요. 염라대왕 문턱까지 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음식 안 넘어가고 대변도 안 나오며 몸무게가 20킬로그램이나 30킬로그램이 줄어든 사람이 많아요. 얼마 전에 환자가 한 사람 왔는데 몸무게가 35킬로그램밖에 안 돼요. 병원에서 장암으로 진단을 받았다고 하는데 내가 배를 만져보니 뱃속에 딱딱한 돌멩이 같은 것이 수십 개 꽉 차 있어요. 약을 줘서 덩어리 삭이고 대변 나가게 해 줬더니 이제 살 것 같다고 해요.
 암이 말기라고 해도 체력만 있으면 완치할 수 있어요. 밥 잘 먹고 변 잘 보고 잠 잘 자면 고치기가 쉽고 병원에서 초기라고 해도 음식을 먹지 못하고 체력이 약하면 고치기 힘들어요. 항암제나 방사선 요법을 쓰면 환자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요.
 전에 한 여자가 폐암 말기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해서 가 봤는데 가서 보니 몸이 마치 씨름꾼 같아요. 식욕이 얼마나 좋은지 남의 밥까지 다 빼앗아 먹고 건강한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몸무게도 80킬로그램이나 된다는 거라.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 잠이 잘 오지 않고 목이 마르며 기침이 난다고 해요. 그런데 엑스레이 사진으로는 암이 온 몸에 퍼졌다는 거라. 이는 허증(虛症)이 아니고 실증(實症)이라, 실증에는 거기에 맞는 약을 써야 돼요. 약을 주었더니 그 약을 먹고 불면증이 없어졌어요. 두 번째 약을 주었더니 그 약을 먹고 갈증이 없어졌고 세 번째 약을 주었더니 그걸로 기침이 나았어요. 그 뒤로 이 여자는 완전히 나아 지금까지 건강해요."

 그는 암 말고 간경화증, 당뇨병, 간질, 정신병, 신경통, 관절염 등을 치료한 경험도 많다. 암에 견주면 다른 병은 고치기가 한결 쉽다고 한다. 암환자 중에서는 아직 백혈병 환자가 한 번도 찾아 온 적이 없어서 치료해 보지 못했고 위암, 자궁암, 폐암 같은 것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고쳤다. 나병이나 에이즈를 고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병환자가 찾아오면 한 번 치료해 보고 싶어요. 지금 생각 같아서는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이즈 환자도 마찬가지예요. 전에 어느 다방 아가씨가 몸이 너무 헤퍼서 밑이 헐어서 진물이 흐르고 사타구니가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을 고쳐 준 일이 있어요. 아랫배 윗배 할 것 없이 늘 배가 쓰리고 아프고 얼굴이 핏기가 하나도 없어요. 진단을 해 보니 소건중탕증이 나와요. 그래서 소건중탕에 오적골(五賊骨)을 한 제에 6백 그램을 넣어서 달여 줬더니 그것을 먹고 싹 나았어요. 단 한 번만에. 그 아가씨가 다음에 와서 하는 말이 그 약을 먹고 나니 기운이 펄펄 나고 남자를 아무리 많이 상대해도 이제는 괜찮다는 거라. 이 병이 지금 생각하니 에이즈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사람에 따라 걸리는 병이 달라요. 성병은 피부빛깔이 검은 사람한테 잘 걸려요. 피부빛깔이 검은 것도 여러 가집니다. 황갈색이 있고, 흑갈색이 있으며, 홍갈색이 있고, 적갈색이 있어요. 성병은 천갈색, 또는 천흑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한테 잘 걸려요. 이런 사람은 성관계를 하지 않아도 매독이나 임질 같은 병에 걸리는 수가 더러 있어요. 이를테면 트로코모나스 질염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런 병은 천흑색 피부를 가진 부인들한테 저절로 생겨요. 흑인들한테 에이즈가 많은 것을 봐도 피부빛깔과 성병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죽기 전에 똑똑한 제자 하나 두었으면 

 그는 요즈음 제자를 키우는 일에 부쩍 정성을 쏟고 있다. 평생의 지식과 경험을 전수해 줄 제자를 찾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복진법과 상한론을 가르친 제자가 한둘이 아니다. 서울에 와서부터 13년 동안 가르친 제자가 수십 명이다. 제자 중에는 한의사도 있고 일반인도 있으며 가정주부도 있다.
 대개 특별한 비방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꼭꼭 감추어 두고 혼자만 써먹으려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심선택 옹은 자신이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배운 지식을 한 마디라도 더 남한테 전해주고 싶어한다. 자신의 지식을 온전히 물려받을 수 있는 똑똑한 제자 하나 두는 것이 소원이다.

 "제자 중에 한의사들이 많아요. 실력 있는 사람이 많지요. 다들 배운 것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병을 잘 고칩니다.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을 제자들이 발견하고 나한테 가르쳐 주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의사가 암을 안 고쳐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한의사는 보약만 잘 지으면 되는 걸로 알고 일반인들도 한의원은 병을 고치는 데가 아니라 보약만 짓는 곳인 줄 알아요. 한의학으로 못 고치는 병이 없습니다. 양방 병원에서 치료하는 어떤 병이든지 한약으로 다 고칠 수 있어요. 양의학보다 병도 잘 낫고 돈도 적게 들고 부작용도 없어요.
 내 나이가 이제 예순 다섯인데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전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죽기 전에 나보다 더 나은 제자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 제일 큰 소망입니다. 나한테 배워서 평생 써먹고 그것을 책으로 남겨서 후세에 영원히 전할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나한테 배운 것을 20년쯤 써먹고 나면 책 한 권은 나올 수 있겠지요. 그 때는 내 방법보다 훨씬 더 나은 의술이 나올 겁니다. 내가 경험한 것은 죽기 전에 다 전해야지요.
 요즈음 한의학을 양의사들이 인정하지 않고 또 한의사들도 양의사들을 무시하며 서로 원수로 여기고 있는데 만약 양의사들이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면 의학에 엄청난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양의사들이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옛날에는 진짜 대단한 의술을 지닌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그 의술을 지닌 채로 죽었어요.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 의술을 무덤까지 갖고 가 버린 겁니다."
 

그는 용약(用藥)에도 능하다. 병이 능히 사람을 죽이지 못하나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만큼 그는 약을 몹시 신중하게 쓴다. 무릇 상한론은 처방이 정확하면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을지라도 한두 첩에 신효(神效)를 볼 수 있으나 만약 조금이라도 틀리면 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한론에 쓰는 처방은 약재의 종류가 적은 대신 분량이 많다. 반하(半夏), 마황(麻黃), 부자(附子), 세신(細辛), 석고(石膏), 망초(芒硝) 등 독성이 세거나 성질이 극렬한 약재도 많이 쓴다. 상한론은 정확하게 증상에 맞추어 증상을 없애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처방이 정확하게 맞으면 한 번에 병을 고칠 수 있으나 만약 처방이 한 치라도 틀리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약재는 그 배합에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한다. 이를테면 감초를 단방으로 쓸 때는 해독제로 쓰고 다른 약재와 함께 쓰면 중화제로 쓴다. 그런데 용약의 묘미는 배합에 있다.

 "감초 같은 것은 쓰임새가 무궁무진해요. 같은 약이라고 해도 어디에 붙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작용이 나타나요. 감초에 계지를 같이 쓰면 심장 뛰는 사람이 나아요.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서 심장에 손을 대고 다니는 사람, 곧 협심증이 나아요. 이게 계지감초탕(桂枝甘草蕩)이라. 그런데 감초에다 건강을 떡 갖다 붙이면 손발이 차고 오줌이 저절로 나오고 가슴이 답답하고 토하는 증상이 없어져요. 이건 건강감초탕(乾薑甘草蕩)이라. 그리고 호흡이 곤란하고 숨을 헐떡거리는 데에는 마황을 감초 뒤에 갖다 붙이는 것이라. 이건 마황감초탕(麻黃甘草蕩)이고. 또 감기로 목이 쉬고 기침이 나는 데에는 감초에 길경, 곧 도라지를 갖다 붙여요. 그 다음에 뇌성마비로 팔다리가 오므라들고 몸이 마비되는 데에는 작약과 감초를 쓰는 것이라. 이 작약감초탕(芍藥甘草蕩)으로 팔다리가 오그라들어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고쳐 준 일이 있어요. 근위축증이나 근육이영양증으로 앉은뱅이가 된 어린이도 작약감초탕을 오래 복용하면 완전히 나을 수 있어요. 이처럼 다 같이 감초를 쓰는데 어떤 것과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효과가 완전히 달라져요. 이것을 아는 공부가 상한론이예요. 3-5가지 약재가 어울려서 어떤 작용을 하는가, 그걸 공부하는 것입니다. 후세방에는 복진법이 없으니 약초를 처방에 한두 가지씩 보태다 보니까 지금처럼 한 처방에 30-50가지 약재가 들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많은 약재가 들어가니까 약효가 서로 중화되어서 두루뭉실한 효과밖에 안 나는 거예요."     

         
 
 평생의 경험과 지식을 집대성한 필생의 역작을 집필하다

 병을 치료하려면 좋은 약재를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더구나 암 환자처럼 목숨이 위험한 환자를 다룰 때에는 약재를 선택할 때 한층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전에는 좋은  약재들이 많이 나왔으나 요즘 한약 건재상에 나오는 약재들은 대부분 믿을 수 없는 것들이다. 수입 약재들은 중금속과 농약에 오염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도 야생약초는 거의 구경하기 어렵고 비료와 농약으로 재배한 것뿐이다. 또 몇 년씩 묵어 색깔이 변하고 곰팡이가 생기고 벌레 먹고 부패한 것도 많고, 또 부패를 막느라고 방부제와 살충제를 듬뿍 친 것도 많다. 예전에는 약재를 정성 들여 찌거나 삶아서 법제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요즘에는 제대로 법제할 줄 아는 사람도 없고 법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없다. 사정이 이러니 몸에 좋으라고 먹은 약 때문에 오히려 병이 생길 지경이다. 이런 판이니 환자들한테 어떻게 한약을 안심하고 먹으라고 권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암환자의 약을 지을 때 반드시 약재를 스스로 선택한다. 비용이 훨씬 많이 들더라도 가장 값이 비싸고 품질이 좋은 약재를 고른다. 전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좋은 약재를 구할 수가 있었으나 이제 거의 모든 한약재가 오염되어 아무리 애를 써도 좋은 약재를 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요즘 심선택 옹은 40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배운 의술을 책으로 엮는 일로 여념이 없다. 필생의 역작이 될 이 책은 그 동안 암환자 수백 명을 치료한 경험과 복진법과 <상한론>으로 암, 간경화증, 정신병, 간질, 신경통 등을 고치는 방법과 배를 살펴서 병을 찾아내는 방법, 맥을 보는 법, 질병에 따른 약재의 종류와 분량 등을 쉽고 자세하게 적어서 누구든지 그 책을 보기만 하면 자신의 병을 스스로 찾아내서 약을 쓸 수 있도록 할 작정이다. 한문을 공부한 사람이라 요즘 사람 말투에 맞게 쓰기도 쉽지 않고 어려운 전문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어 쓰기도 쉽지 않다. 
 그 전에도 <한방암치료법 해설>, <상한론 해설>, <복진법 해설> 등의 책을 필사본으로 펴낸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한문과 전문용어가 많이 섞여서 한의사가 아닌 일반인이 보기에는 너무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이번 책은 무엇보다 쉽게 쓰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고 자신의 평생 경험을 요약하여 담았으며 어려운 이론은 빼 버리고 실제 병 치료에 필요한 사항만 간결하게 싣고 또 환자치료사례들을 많이 실어서 재미있게 읽는 동안에 저절로 치료법을 배울 수 있게 하였다. 또 복진법에 따른 상한론 처방뿐만 아니라 실제로 암 치료에 효험이 높은 민간요법과 민간요법으로 효과를 본 사례들을 많이 실어서 환자들이 집안에서 스스로 약재를 구해 스스로 치료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서 그 책 내용 중에서 머리말과 암, 정신병, 간질 등을 치유한 30여 사례를 소개하여 이 책을 읽는 이들한테 참고자료가 되게 하려 한다.


 
 머리말
 
 이 책은 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내가 실제로 임상해 본 대로 소신껏 엮었다.
 한방으로 암을 고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암은 한방의학으로 치료하는 것이 원칙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나 역시 한방의학을 배울 때에는 한방의학으로는 암을 고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1963년에 자궁암 후유증을 고치고 내 손윗동서가 담도암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고치는 데에 성공했다. 그 다음에는 친구의 간암을 완치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도암을 고치는 데는 모두 실패했다. 그런 중에 어머님이 식도암에 걸려 물도 넘기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몸이 몹시 쇠약했으므로 보약으로 십전대보탕에 식도암 약인 이격탕을 합쳐서 약을 지어 드렸더니 그 약을 드시고 건강해지셨다.
 1970년대에는 자궁암 환자를 많이 접했는데 참으로 빠르고 좋은 성과를 올렸다. 간경화증도 효과가 좋았다.
 나는 암을 치료하다가 많은 고난을 겪었다. 암을 치료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성공하는 경우보다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암환자를 치료하다가 그 환자가 죽으면 진흙탕에 꿇어않아 몇 시간씩 빌었다. 한번은 자궁암 환자가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저녁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시체 옆에서 꼬박 밤도 새워 보았다. 그러나 환자가 죽어 가는 고통에 견주면 내가 받아야 할 고통은 달게 받아야 하는 고통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순전히 내 잘못으로 환자가 죽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내 나이가 63세, 그러고 보니 암을 치료하기 시작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이제는 암 치료에 약간 자신이 생기는 것 같다. 지금까지 암을 치료하면서 얻은 결론은 복진법으로 진단을 해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고 또 처방을 정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암은 거의 복부에 있고 복부에 없는 암이라 해도 복부를 진단하면 그 치료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복진법을 한방의 과학화라고 생각한다. 일반인, 특히 암환자들이 이 책을 보면 자신의 암이 어느 유형에 해당하는지 쉽게 알 수 있도록 책을 엮었다.
 어려운 한의학을 쉬운 말로 설명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입장이고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본다.
 독자들께 부탁이 있다. 이 책을 중간부터 보지 말고 처음부터 읽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한번 설명한 것은 되풀이하여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암환자 여러분은 낙심하지 말고 이 책을 두 번 세 번... 열 번 정독하면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눈에 뜨일 것이다.
 또 하나의 부탁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처방이 결정되면 약을 정해진 분량의 반쯤이나 3분지 1쯤을 복용하시라. 여러분이 결정한 처방이 잘못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씩 복용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며 또 반쯤씩 복용해도 효력이 충분히 나타나는 까닭이다. 몸이 쇠약할 때에는 4분지 1로 했다가 차츰 2분지 1로 늘리는 것이 옳다. 1첩 분량을 하루 양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믿으시라. 이 책에는 암을 고치는 데에 대한 이론은 없고 다만 임상사실만을 기록한 것이다. 간간이 복진법의 선구자인 일본의 오스까 선생의 기록도 들어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필자는 백혈병을 치료한 경험이 한 번밖에 없어서 한 예밖에 싣지 못했다. 암을 고치는 방법뿐만 아니라 예방하는 방법, 그리고 다른 질병의 처방도 들어 있다. 질병을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이 책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암환자 여러분, 건강한 마음으로 암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시라.
                                                                    
 (1) 수술을 포기한 위암을 고치다

 환자는 67세 남자로 원주 기독병원에서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암이 아랫배 전체에 퍼져서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집에 와 있는 상태였다. 광대뼈가 험상궂게 튀어나오고  눈 언덕이 쑥 들어가 있으며 창백한 얼굴에 간신히 화장실 출입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누워 있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아랫배에서 물소리가 꼬르르 꼬르르 들린다.
 복진을 해 보니 손을 약간만 대도 꼴꼴 꿀꿀 소리가 난다. 심하(心下)에 저항은 경미한 편이다. 뱃가죽이 얇고 당겨져 있다.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고 할 정도로 말랐다. 얼굴은 푸르고 손발은 차갑고 배도 차갑다. 6월 하순인데도 환자는 춥다고 한다. 구토를 그다지 심하게 하는 편은 아니지만 우유도 먹으면 다 토하므로 마실 수 없고 다른 어떤 음식도 먹지 못했다. 음식을 못 먹으니 대변을 20일에 한 번씩 본다.
 육군자탕(六君子蕩)에 소건중탕(小建中蕩)을 합방하고 춥다고 하니까 附子를 더하고 또 몸이 쇠약하므로 인삼을 배로 해서 하루 한 첩씩 복용하게 하고 효소식품을 겸하여 복용하게 했다.
 10일 뒤에 갔더니 흰죽을 한 그릇 맛있게 먹고 있다. 배도 손도 따뜻해지고 구토도 완전히 멈추었다. 다시 10일동안 약을 복용하고 병이 완전히 나았다. 그러나 한 달 뒤에 친구 환갑잔치에 갔다가 술과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 체해서 사망했다. 위암을 고쳐 놓았더니 음식을 폭식해서 죽은 경우가 너무 많다.
 
 (2) 암이 온 몸에 퍼진 것을 고친 사연

 환자는 32살의 젊은 부인으로 윗배와 아랫배가 교대로 아파 경희의료원에 가서 상복부를 수술로 열어봤더니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하복부를 열어 봤으나 역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병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경희의료원의 소견서를 가지고 원자력병원으로 갔다. 이 때 환자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느꼈다고 한다.
 원자력병원에서는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하였다. 그 때 내가 전에 위암을 고쳐 준 환자의 딸이 환자를 집으로 모셔다 놓고 나를 초대했다. 환자는 가만히 누워서만 지내고 역시 윗배와 아랫배가 번갈아 아프다고 한다. 윗배는 체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구토는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음식을 먹으면 설사가 나고 대변을 보고 난 뒤에도 뒤가 무직하여 변이 덜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맥을 짚어 보니 활약(滑弱)이다.
 배에서 물소리가 나고 체한 느낌이 들며 배가 물렁물렁한 것은 육군자탕증이요, 윗배와 아랫배가 교대로 아픈 것은 시복통에 해당하고 설사를 하고 뒤를 보고 나서도 뒤가 무직한 것은 소건중탕증이다.
 육군자탕에 소건중탕을 합하여 처방했다. 4첩을 복용하고 모든 증상이 다 없어졌다. 다시 6첩을 주어 복용하게 했다. 이를 복용하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발하지 않았다.


 
 (3) 장례준비 중인 환자를 살려내다

 1997년 봄에 33살 된 부인이 제천 중앙병원에서 내시경 검사결과 위 전체가 까뭇까뭇하게 깨를 뿌린 것처럼 암이 퍼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환자는 건강해 보이고 활동도 잘 할뿐더러 자기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환자는 살결이 희고 작은 키에 약간 땅땅한 형이다. 배가 몹시 아프고 설사가 나며 배에 가스가 차며 대변을 보고 난 뒤에도 뒤가 무직하여 변이 아직 남아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배는 차갑다. 맥은 침약(沈弱)이다.
 소건중탕을 써야겠으나 환자가 건강하니까 계지작약탕(桂枝芍藥蕩)이 적합할 것으로 판단했다. 계지작약탕은 소건중탕에서 흑설탕을 뺀 처방이다. 내가 계지작약탕을 써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부인이 남편과 성행위만 하면 몸이 극도로 피곤해서 꼼짝 못하고 하루종일 방에만 누워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성행위를 하고 나서 몸이 피곤해지는 증상과 성신경쇠약증을 몸이 몹시 쇠약해서 그런 것으로 보고 처방을 바꾸어 소건중탕 4첩을 주었다.
 그런데 그 약이 매우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6첩을 주었다. 약을 먹는 동안 경과가 좋았는데 다 먹고 나서 환자는 갑자기 숨이 끊어졌다. 셋방에 단둘이 사는 형편이라 죽은 아내를 방에다 혼자 두고 남편은 밖에 나가서 장례준비를 해 놓고 새벽에 돌아와 보니 죽었던 아내가 눈을 멀뚱히 뜨고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남편은 깜짝 놀랐다. 배가 아프지 않으냐고 물으니 속이 시원해지고 전혀 아프지 않다고 한다.
 그 날 즉시 제천 중앙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받아 보니 위 전체에 까뭇까뭇하게 퍼져 있던 암세포들이 깨끗하게 사라졌다고 했다. 이 부부한테 일비일희(一悲一喜)가 하루사이에 일어났다. 남편은 부인한테 한복을 곱게 해 입히고 즐겁게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때는 봄이었고 이 여행은 신부의 부활을 축하하는 여행이었으리라.
 
 (4) 급성 위암을 고친 이야기

 환자는 42살 된 남자로 말기 위암이다. 음식을 먹으려니 배가 불러 먹을 수 없고 하루 종일 굶어도 배가 전혀 고프지 않다고 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굶어죽은 귀신인 아귀가 배에 붙어서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고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또 배가 고파 먹으려고 하면 금방 배가 불러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데 이와 같은 아귀(餓鬼)의 장난에는 인삼탕을 복용하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환자는 인천 길병원에서 말기 위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미 늦었으므로 수술도 할 수 없고 약도 주지 않더라고 한다. 환자는 몹시 낙담하고 있었다. 보통 체질이고 먹지를 못하니 몸이 피곤할 뿐이다. 더운 음식을 좋아하며 손발이 차갑지는 않다. 만약 손발이 차면 부자를 넣어 주어야 한다. 인삼탕(인삼, 감초, 백출, 건강 각 8그램) 10첩을 주었다. 이것을 다 복용하고 나서 환자는 건강한 모습으로 와서 '이제 다 나았습니다' 라고 했다. 재발을 막기 위해서 인삼탕 4첩을 더 주었다. 이 환자의 경우에는 효과가 왜 이토록 빠른가. 그것은 환자의 병이 급성병이기 때문이다.
  
 (5) 우유도 못 넘기는 위암을 완치

 1989년 9월 4일 59살 된 부인이 찾아왔다. 위암 말기로 필자의 딸 친구의 어머니라고 했다. 이 부인은 젊어서 남편이 하도 속을 썩여서 계속 밥을 굶었다고 했다. 위암으로 진단을 받은 지 1년이 넘었으나 죽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음식은 일체 먹을 수 없고 우유도 토해 버리고 넘어가지 않는다. 먹는 것이 없으니까 변은 한 달이 넘어도 나오지 않는다. 간신히 영양제 주사나 보혈제 주사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고 했다.
 복진을 해 보니 제일 아픈 곳이 명치 밑이고 그 부위에 아기 주먹만하고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만져졌다. 그 부분에 손을 대기만 해도 몹시 아프다고 했다. 환자는 '제발 이 덩어리만 없어도 살 것 같다'고 한다.
 맥은 1분에 100번을 뛰고 침세활삭이었다. 몸무게는 작년에 59킬로그램이었으나 지금은 39킬로그램으로 17킬로그램이 줄었다고 했다. 실로 가죽과 뼈만 남은 상태이다. 뱃가죽을 왼쪽으로 밀면 왼쪽으로 쌓이고 오른쪽으로 밀면 오른쪽으로 쌓인다. 배꼽 왼쪽에 있는 오이처럼 생긴 덩어리만 힘있게 꿈틀거린다. 배를 손으로 눌렀다가 손을 떼면 손가락 다섯 개 자국이 그대로 배에 찍혀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는다. 육군자탕, 억간산(抑肝散)에 진피(陳皮)와 반하(半夏)를 더한 것, 그리고 윤장탕(潤腸蕩)을 합하여 처방했다. 세 가지 처방을 합친 것이다. 먼저 4첩을 주면서 하루 한 첩씩 복용하게 했다.
 9월 7일, 하루 복용하고 나자 대변이 두 번이나 많이 나오고 구토가 덜해졌으며 음식을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었다.
 9월 8일, 대변을 많이 보고 죽을 반 그릇 먹었다. 손가락 굵기의 7-8센티미터쯤 되는 검은 핏덩어리를 세 개나 토했다.
 9월 9일, 대변이 묽어서 설사처럼 나왔다. 시커먼 피를 많이 토했다.
 9월 10일, 약 3첩을 5일분으로 나누어서 주었다.
 9월 11일, 가슴 밑에 있던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사라졌다. 아랫배에 있던 변덩어리도 없어졌다.
 9월 26일, 환자는 음식을 잘 먹고 대변도 잘 본다. 배에도 탄력이 생기고 여러 모로 건강한 사람처럼 되었다.
 9월 30일 환자는 산에 도토리를 주우러 갔다.
 그 뒤로 환자는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6) 급성 위암에 걸린 한의사를 고친 사연

 환자는 72살 된 한의사로 병명은 급성 위암이다. 1989년 12월 24일 내기 바둑으로 밤을 새우던 중에 구토가 심하게 나서 영등포성모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급성 위암으로 판정을 하고 이틀 뒤에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환자는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한의사로 체격이 건장하고 성격이 날카로웠다.
 환자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구토는 육군자탕에 용안육(龍眼肉), 백두구(白荳?)를 가해서 쓰면 전부 그쳤는데 나한테는 이 약이 효과가 없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토하니 비화음(比和飮)을 먹어야 될 것' 이라고 했다.
 구토가 몹시 심하여 쫘악, 쫙 하고 노란 물을 토하는데 토액에는 음식물이 약간 섞여 있다. 혀에는 백태가 두껍게 끼어 마치 빈대떡을 붙여 놓은 것 같고 혓바닥은 기름을 바른 듯 미끄럽다. 혀를 봐서 소시호탕을 써야겠다고 결정했다. 흉협고만(胸脇苦滿)이 강하게 나타나고 맥은 1분에 72번을 뛰고 힘이 있으며 변비 때문에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혀에 있는 백태만 아니라면 대시호탕을 써야 한다. 그러나 백태가 있을 때는 소시호탕을 쓰는 것이 절대적이다. 소시호탕에 구토가 심하므로 생강과 반하를 12그램으로 늘리고 대자석 4그램을 넣어서 4첩을 주었다.
 그 날 저녁 8시 무렵에 한 번 복용하고 그 맹렬하던 구토가 딱 그쳤다. 환자의 장남이 '선생님, 이것은 기적입니다.' 한다. 아들 5형제와 며느리들이 다 와서 모두 기뻐했다.
 환자가 '그 약 참 맛이 좋아요. 이 약에 용안육을 넣었지요?' 라고 묻는다. '예, 넣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백두구도 넣었지요?' 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그 약은 비화음이 아닌가?' 라고 하기에 나는 '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소시호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곧이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환자는 그때까지 속이 울렁거리는 증상이 있어서 약 두 첩을 더 복용하게 했다. 다음 날인 일요일날 보았더니 오심도 사라지고 혀에 백태도 없어졌으며 대변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그 다음 날 병원에서 담당의사가 수술을 하기 전에 검사를 다시 했더니 분명히 사흘 전에 있던 암덩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다시 한 번 검사를 했으나 암덩어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의사는 이번에는 폐가 부었으니 폐를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환자가 멀쩡하고 다른 아무 이상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 다음 날 퇴원을 했다. 이 분은 그 뒤로 5년을 더 살다가 돌아갔다.    
 
 (7) 임종직전의 위암과 자궁암을 고친 이야기

 1988년 초여름에 어느 내과의사의 부인이 찾아왔다. 나이는 31살이고 자궁암에서 위암으로 전이하여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 부인은 자궁외임신으로 인공유산을 했다. 의사인 남편이 검사를 해서 자궁암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남편은 수술로 자궁을 들어내지는 않고 일주일에 4일 동안은 방사선 치료를 하고 3일은 쉬는 식으로 4주일 동안 치료를 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심하게 구토가 나서 물이나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써 봐도 구토는 조금도 멎지를 않았다. 그래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위에 큰 암덩어리가 있어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2개월 동안을 계속해서 토하기만 하고 나니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혼자서는 일어날 수도 걸을 수도 없다. 말도 겨우 하고 화장실도 부축해 줘야 갈 수가 있다.
 맥을 보니 양쪽 합곡혈까지 뛴다. 1분에 120번 뛰는데 이런 것은 죽은 맥이라고 했다. 전에 어느 환자가 임종하기 전에 맥을 보니 합곡혈에 맥이 강하게 뛰고 십선혈(十先穴 : 열 손가락의 끝)에 맥이 다 뛰는 것을 보았다.
 나는 치료를 거절했다. 보호자인 남편도 없는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환자를 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환자와 함께 온 환자의 오라버니는 울면서 꼭 약을 달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입장이 난처했다. 아마 이 환자는 3-4일은 더 살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난날을 한 번 돌이켜 보았다. 이 환자보다 더 위험한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결국 약을 주기로 했다.
 환자는 흉협고만이 심하게 나타나고 변비도 심하다. 맥은 가늘고 손발이 차다. 몸도 몹시 쇠약했다. 그래서 소시호탕에 녹용을 보통 사람의 3배를 넣고 인삼도 보통사람의 3배인 12그램으로 하고 구토를 멈추게 할 목적으로 생강, 반하도 12그램으로 하고 대자석 4그램을 가하여 4첩을 주었다. 약을 주고 나서 집에 와도 잠이 오지 않는다. 행여나 이 환자가 밤 사이에 죽지 않았는가 걱정을 하다가 아침에 전화를 했다. 환자는 구토가 멈추고 식사를 약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대답을 했다.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 뒤로 환자는 몸이 좋아졌다. 남편인 내과의사는 처남한테 '그 한약 참 신기한 약이군' 하고 한마디를 하더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나한테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8) 말기 간암을 완치

 1989년 5월 24일, 환자는 52살 된 여자로 원자력병원에서 간암 말기로 진단을 받았다. 키는 158센티미터에 몸무게 42킬로그램으로 병을 발견한 뒤로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나 줄었다고 했다. 환자는 눈을 감고 머리와 팔이 축 늘어진 채로 의자에 기대어 있고 말소리도 작고 가늘어서 귀를 가까이 대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오른쪽 엄지손톱이 파랗고 말라 있으며 맥은 1분에 88번을 뛰며 침소약(沈小弱)이다.
 맵고 짜고 단 음식을 좋아하고 시고 쓴 음식을 싫어한다. 복진을 해 보니 제변동계(臍邊動悸)가 나타난다. 제변동계란 배꼽주위가 펄떡펄떡 뛰는 것을 말한다. 이런 환자는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이 적당하다. 그런데 양쪽 갈비뼈 밑을 눌렀을 때 심한 통증이 오는 흉협고만이 있을 때에는 소시호탕을 써야 한다. 이 부인은 두 가지 증상이 다 있으니 보중익기탕에 소시호탕 반량을 합하여 쓰는 것이 마땅하다.
 부인은 말하기도 힘든 상태이고 남편이 말하기를 지난 겨울부터 몸이 좋지 않았고 한 달쯤 전부터 옆구리가 욱신욱신 달아오르고 뜨끔뜨끔하면서 아프며 음식을 먹기만 하면 토했다고 한다. 원자력병원에서 혈액검사와 컴퓨터단층촬영검사를 받았는데 모두 간암으로 나타났다. 남편은 부인이 간암이라는 얘기를 듣고 까무라쳤다. 그래서 혹 오진이 아닌가 하는 기대로 서울대병원으로 가서 혈액검사와 컴퓨터단층촬영검사를 받았는데 거기서도 역시 위암으로 나타났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원자력병원으로 와서 수술을 받으려고 할 때에 어느 나이 든 의사 한 분이 은밀히 말하기를 수술을 하는 것은 의사들의 배만 부르게 할뿐이니 집으로 돌아가서 깨끗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 의사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냥 아내가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 때까지 환자는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추웠다가 더웠다가를 반복하는 왕래한열(往來寒熱) 증상이 심했다. 열이 오르면서 이마에 땀이 나고 등이 뜨겁게 달아오르다가 그 다음에 오한이 와서 덜덜 떨다가 속이 울렁거리고 음식을 먹기만 하면 토하곤 했다. 식욕이 없고 억지로 먹으면 속에 있는 것이 다 넘어오려고 한다. 입맛이 쓰고 신경이 날카로우며 양쪽 옆구리와 가슴부분이 욱신욱신 쑤시고 뜨끔뜨끔 아프다고 하였다.
 나는 보중익기탕에 소시호탕 반량을 합하고 계지(桂枝), 백작약(白灼藥), 목향(木香), 곽향(藿香) 각 4그램, 흑설탕 20그램을 더하여 처방했다. 10첩을 복용하고 나서 환자는 통증이 오후에만 나타나고 식욕이 생겼다. 다시 10첩을 주었다. 복진을 해 보니 양쪽 갈비뼈 안쪽의 흉협고만이 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뒤로 환자는 모든 통증이 사라졌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9) 담도암이 한 달만에 나아

 1986년 9월 내 손윗동서가 간암에 걸려 찾아왔다. 환자는 57살로 평소에는 고뿔도 한번 안 걸리는 건강한 체질이며 대주가(大酒家)로 소주 한 병을 큰 그릇에 부어서 단숨에 들이키곤 한다. 그러다가 86년 4월에 폭음을 하고 나서 술병이 들어 자녀들이 원주기독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진단을 받았다. 검사결과는 담도암이며 간에도 전이가 되었을 것으로 의심이 간다고 했다. 의사의 권고대로 수술을 했는데 갈비뼈를 하나 잘라내고 배를 넓게 째서 담낭을 떼어내어 버렸다. 수술 뒤 경과는 좋다고 하지만 환자는 몹시 춥고 몸이 피곤하여 견딜 수 없었다. 춥다고 하는 것과 피곤해 하는 것이 모든 만성 암환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복진을 해 보니 환자의 뱃살은 두껍지만 맥은 부지약으로 1분에 60번이 못 된다. 좌우 갈비뼈 안으로 흉협고만이 심하여 손도 들어가지 않았다. 명치 밑에도 딱딱한 덩어리가 만져졌다. 변비는 없고 대변을 묽게 본다. 나는 흉협고만과 맥이 부약한 것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고 시호계지탕을 쓰기로 했다. 시호계지탕에 오한과 설사 증세가 있으므로 사역탕(四逆蕩)을 합하여 처방했다. 사역탕이란 처방은 건강(乾薑), 감초(甘草), 부자(附子) 각 6-8그램으로 되어 있고 오한이 있거나 손발이 차고 먹은 음식이 잘 삭지 않고 남아서 설사를 하는데 쓴다.
 환자는 내가 준 약을 복용하고 오한과 피로가 사라졌으며 약을 먹고 나서 마을로 나가면 몸이 훈훈해지고 기분이 좋아서 마을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 했다. 식욕이 나고 얼굴에 화색이 돌며 설사도 없어졌다. 30일 동안 약을 복용하고 양쪽 갈비뼈 밑에 있던 흉협고만이 없어졌다. 명치 밑에 딱딱한 덩어리만 약간 남아 있었는데 그것도 역시 칼을 대지 않고 약을 써서 깨끗하게 없애버렸다.
 병원에서는 그 때 같이 암으로 왔던 사람은 다 죽었는데 이렇게 건강해진 것은 우리 병원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기록으로 남길 것이라고 하였으며 환자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우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10) 죽마고우의 간암을 고치다

 1987년 4월 어느 날 나의 죽마고우가 간암으로 찾아왔다. 나는 20년 전에도 간경화증으로 다 죽게 된 것을 고쳐 준 일이 있다. 그는 술을 좋아하여 병이 생겼다. 술을 마시면 피를 토하고 피를 토하고 나면 다시 술을 마시기를 반복했다. 이왕 죽을 바에야 실컷 마시다가 죽겠다는 것이다. 20년 전에는 <방약합편>에 있는 처방인 대금음자(對金飮子)에 오리나무 껍질을 더하여 써서 나았다.
 그는 몇 년 동안 술을 끊는가 했더니 다시 부지런히 마셨다. 그러다가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가니 간암이라는 진단이 나온 것이다. 간암에 걸렸으면서도 활동하는 데에 지장이 없었는지 강원도 평창에서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나한테 왔다.
 환자는 갈비뼈 밑에 흉협고만이 강하게 나타나고 추웠다 더웠다 하며 속이 울렁거리고 구토가 난다고 했다. 음식은 거의 먹지 못하고 맥은 부약(浮弱)이니 시호계지탕을 쓰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판단했다. 시호계지탕을 한달 동안 복용하게 했다. 그 뒤로 상태가 매우 좋아져서 스스로 약을 구하여 복용하고 7월 하순 몹시 무더울 때 겨울철에 입는 내의를 입고 찾아왔다. 몹시 춥고 찬물이 피부에 닿으면 그 주변까지 가려워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시호계지탕에 건강과 부자를 각각 8그램씩 더하여 복용하게 했다. 환자는 그것을 복용하고 추운 것과 찬물에 닿으면 몸이 가려운 증상이 없어졌다.
 그 뒤로 한 달이 지난 뒤에 부인과 아들딸을 다 데리고 와서 고맙다고 치하를 했다. 복진을 해 보니 흉협고만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른쪽 갈비뼈 밑에 가벼운 저항만이 느껴졌다. 시호계지탕을 3개월 동안 써도 여전하던 흉협고만이 건강과 부자를 더하여 쓰니 이렇게 빠른 속도로 사라진 것이다.
 
 (11) 말기 간암이 피를 몇 바가지 쏟고 5일 만에 나아

 1981년 6월 온양온천 부근에 산다는 간암환자가 암을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제천까지 나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간염으로 병원에서 주는 약을 계속 먹다가 더 심해져서 간경화가 되고 복수가 심하게 차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았더니 간암이 되었다고 한다.
 환자는 배에 물이 가득 차서 북처럼 되어 있고 핏줄이 퍼렇게 거미줄처럼 덮여 있으며 뱃가죽이 얇아 마치 투명한 것처럼 보였다. 환자는 '제 병을 고쳐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음식이나 조금 먹게 해 주십시오'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듯 했다.
 환자의 증상은 명치 밑이 꽉 막혀 있고 설사를 하루에 두 세 번씩 한다. 또 배에서 돌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것이 심하비갱(心下??), 복중뇌명(腹中雷鳴) 하리(下痢)인 것이다. 이 3가지 증상이 나타나면 병명과 상관없이 감초사심탕(甘草瀉心湯)을 쓰는 것이 옳다.
 감초사심탕을 본방대로 약을 주어 보내고 나서 뒤 몇 시간 뒤에 환자의 부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약을 먹고 나서 반 요강 정도 피를 쏟고 쓰러졌는데 아무리 흔들어봐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죽었다면서 빨리 오라는 것이다. 나는 태연하게 '아주머니, 당황하지 말고 요강 속을 자세히 보세요.'라고 했더니 '피 쏟은 걸 봐서 뭣해요?' 한다. '글쎄 빨리 한번 자세히 보시라니까요.' 했더니 '안 볼래요. 남편이 죽었으니 빨리 와요.' 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다음 전화를 기다렸다. 몇 시간 뒤에 전화가 다시 왔다.
 "선생님, 그이가 하혈을 또 했는데 엄청나게 많이 나왔어요. 새까만 것이 중국집 짜장 같은 것이 나왔어요. 큰일났어요. 빨리 와보세요."
 "그 검은 피가 계속 나와야 댁의 남편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약을 드리세요."
 이 부인은 사흘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편이 하혈을 계속하니 큰일났다고 전화를 했다. 4일째는 새까만 피가 입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나는 그 약을 계속 먹이라고 했다. 5일째가 되어서야 출혈이 멈추고 배도 푹 꺼졌다고 연락이 왔다.
 한 달 뒤에 환자의 장인과 장모가 선물을 갖고 찾아와서 사위가 병이 완전히 낫고 건강해졌다고 인사를 했다. 감초사심탕의 효력으로 간암이 5일만에 전멸하고 복수와 죽은피까지 몰아내어 죽어 가는 목숨을 살린 것이다.
 
 (12) 간경화를 고친 거짓말 같은 사실

 1968년 50살 된 남자가 간경화증에 걸렸다면서 그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원주 도립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진단을 받고 원주기독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니 역시 간경화증이라고 한다고 했다. 환자의 부인이 하는 말이 '여러 한의원과 한약방을 다 가서 물어 보았더니 가는 데마다 '고칠 수 없는 병이니 아예 단념하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라도 고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절대로 거짓말일 터이니 속지 마십시오.'라고 했다면서 내가 간경화증을 고친 일이 있다고 해도 전혀 믿지를 않는다. 나는 부인한테 '설사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고통이라도 덜어 드릴 수는 있을 것이니 환자한테 한 번 가 봅시다'라고 말했다.
 환자는 보통체격으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몸이 피곤하여 날마다 그늘에서 쉬고만 있다고 했다. 맥은 폭이 좁고 약간 깐깐하다. 양쪽 갈비뼈 근처에 흉협고만이 강하게 나타나고 배꼽위에 강한 동계(動悸)가 있다. 잠을 잘 자지 못하고 밥맛이 없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며 변비가 심하며 구토가 난다고 한다. 이런 증상에는 시호가용골모려탕(柴胡加龍骨牡蠣湯)을 쓰는 것이 옳다.
 시호가용골모려탕에 대황(大黃)을 4그램 넣어 8첩을 주었다. 환자는 이 약을 먹고 피로감도 없어지고 불면증도 사라졌으며 변비도 없어지고 밥맛도 좋아졌다.
 그 무렵에 환자 집에 결혼식이 있어서 일가친척이 모였다. 친척 중에 하나가 말하기를 한약이 간경화에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그 병을 고친 역사도 없고 고쳤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으니 틀림없이 그 약에는 진통제를 넣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환자는 그 뒤로 오지 않았다.
 그 뒤 3년이 지나고 나서 우연히 그 환자를 만났다. 그는 선생님이 준 약을 먹어서 그런지 술을 끊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별 탈없이 지내고 있다고 했다.
 
 (13) 간경화를 고치고 큰절을 받아

 1979년 봄이었다. 환자는 간경화증이고 중학교에 다니는 내 딸의 담임선생님의 장인이었다. 환자의 딸이 간경화증을 고칠 수 있는 선생님이 계시니 아버지를 모시고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네 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최고가는 병원에서도 못 고친다는 판정이 났다. 그런데 산골짜기에 사는 엉터리의사가 고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약을 공짜로 준다고 하는데 그 약도 틀림없이 엉터리일 것이니 그만두라며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고 한다. 딸은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한테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환자는 60살쯤 되어 보였으며 살결이 거무스름하고 바싹 말랐으며 키가 크고 허리가 가늘며 몸이 앞으로 굽어 있다. 이런 형은 전형적인 팔미지황탕(八味地黃蕩) 체질이다.
 환자는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먹어도 전혀 내려가지 않으며 대변도 꽉 막혀서 관장을 해야 간신히 볼 수 있으며 소변도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입이 심하게 말라도 물은 먹지 않으며 하반신이 마르고 고조(枯燥)하여 하얀 가루가 묻은 것 같다. 하반신이 마르고 하얗고 까칠까칠하다. 환자는 우선 음식이나 좀 먹을 수 있고 소화나 되게 해 주시오 한다.
 복진을 해 보니 배 한가운데에 세로로 볼펜 굵기 만한 딱딱한 덩어리가 배꼽 아래로 길게 뻗어 있다. 소화가 안 되고 대소변이 다 잘 통하지 않으니 팔미지황탕에 우슬(牛膝), 차전자(車前子)를 각각 6그램씩 더하여 5일분을 주었다.
 5일 뒤에 환자는 다시 와서 '그 약이 몸에 맞는 것 같습니다. 소화가 잘 되고 대변이 잘 나옵니다.' 한다. 다시 10일분을 주었다. 그러자 거의 모든 증상이 사라졌고 몸이 좋아졌다. 그 후 환자는 나한테 오지 않고 서울에 있는 일류한의원에 가서 20일간 약을 지어 먹었는데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또 다른 간경화를 전문으로 고친다는 한의원에 가서 약을 썼다. 그래도 점점 대변이 나오지 않고 병이 더 깊어졌다. 환자의 부인이 남편을 데리고 일류한의원, 전문가라는 사람, 박사들만 찾아다녔던 것이다.
 약 50일쯤 뒤에 이 부인이 강원도에 있는 나한테 먼길을 걸어서 찾아왔다. 뚱뚱한 중년부인으로 한복을 잘 차려 입고 있었는데, 대뜸 나한테 큰절을 하면서 '선생님을 몰라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환자는 약을 2개월 동안 더 복용하고 완쾌되었다. 5년 뒤에 소식을 들으니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 나라 한의학에는 복진법이 없다. 아무리 한의학 박사라도 복진법을 모르면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지 않겠는가.   
 
 (14) 자궁암이 5일만에 나아

 1977년 40대의 부인이 찾아왔다. 병명은 자궁암이라고 했다. 아랫배가 아파서 걸음을 걸을 수 없다고 한다. 두 손으로 아랫배를 누르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며 간신히 걷는다. 병원에서 수술을 권했으나 돈이 없어 수술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몸이 몹시 쇠약해 보였다.
 복진을 해 보니 눌러서 아픈 데도 없고 배가 물렁물렁하다. 또 배를 이리저리 밀면 상하좌우로 당긴다. 이런 증상에는 당귀작약산(當歸芍藥散)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 또 당귀작약산은 몸이 잘 붓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랫배가 결리고 아픈 데는 반총산이요, 아랫배를 누르면 이리저리 당기고 아픈 것은 당귀작약산을 써야 한다.
 그래서 당귀작약산과 반총산을 합방하여 5일분을 주었다. 5일이 지나자 통증이 훨씬 줄어들었다고 했으며 10일 뒤에는 완전히 나았다. 추위를 심하게 탈수록 또 아픈 증세가 심할수록 회복도 더 빠른 것 같다.


 
 (15) 인공항문을 단 대장암 환자를 살려내다

 1980년 4월, 50세쯤 된 부인을 남편이 등에 업고 왔다. 내려놓으니 부인은 축 늘어졌다. 멀리 포항에서 왔다고 하니 여독도 심했을 것이다. 이 환자는 처음에 왼쪽 아랫배가 아파 부산 백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았더니 대장암이라고 하여 수술로 대장을 상당한 길이로 잘라냈다. 그리고 그 부분에 주먹 두 개만한 비닐주머니를 달아서 대변이 이 주머니로 나오게 하고 직장을 떼어버리고 항문을 꿰매어 버렸다.
 수술을 하고 나서 집에 오니 이번에는 배꼽 밑의 아랫배가 몹시 아팠다. 다시 백병원에 갔더니 자궁암이라면서 너무 늦어서 수술도 할 수 없으니 집에 가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죽기는 너무 억울하여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체격은 약간 뚱뚱하지만 물렁살이며 몸이 잘 붓고 냉증이다. 수술을 한 왼쪽 아랫배와 항문부위도 몹시 아프다고 한다. 소변은 항상 시원하게 나오지 않고 대변은 자동적으로 나오니 비닐주머니가 무거우면 털어 버리면 된다. 사람을 개조하여 망가뜨려 놓은 데다가 이제 목숨이 위급한 지경이니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약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더니 환자와 남편이 약을 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애원한다.
 수술한 뒤에 유착이 생겨 통증이 온 데는 신효탕(神效蕩)이요, 부종, 냉증, 하복통, 소변불리에는 당귀작약산을 써야 한다. 이 두 가지 약을 각각 10첩씩 주며 하루는 이 약을 먹고 다른 하루는 저 약을 먹는 식으로 복용하라고 했다. 이와 겸하여 유기자연농법연구소에서 공급하는 효소식품을 주었다.           
 나중에 부인은 약을 다 먹고 나서 매우 의기양양하게 걸어서 왔다. 약을 복용하니 아픈 것이 없어지고 소변이 잘 나오더라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 처방을 10일분씩 주어 보냈는데 그 뒤로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3개월쯤 지난 7월에 그 남편이 와서 말하기를 소문(小門 : 성기)으로 좀 굵고 길며 매우 질기고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나왔는데 그 뒤부터 건강해져서 모내기철에 힘든 뒷바라지를 혼자 다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두 가지 처방 각각 4일분에 효소식품을 같이 주었다. 그 약을 다 먹고 와서 연락이 오기를 이제는 그 약이 먹기가 싫다고 했다. 그래서 보중익기탕에 당귀작약산을 합하여 주었다.
 그 뒤로 연락이 없다가 4년이 지나서 한 번 연락이 왔는데 그렇게 인공 변주머니를 옆구리에 차고서도 건강하게 지낸다고 했다.
 이 처방을 한 번 더 쓴 적이 있다. 1984년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50대 부인이 왼쪽 아랫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대장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대장을 잘라내고 항문을 막아 버리고 비닐주머니를 달았다. 며칠 후 아랫배가 심하게 아파서 다시 그 병원에 갔더니 자궁암이라서 수술을 할 수 없다면서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이나 먹다가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역시 신효탕과 당귀작약산을 겸복하고 효소를 겸하여 치료를 했다. 약을 먹으니 배아픈 것이 없어졌다. 그 뒤로 전화연락이 없어서 죽었느니 살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 뒤로 내가 급한 일로 멀리 떠나 있을 때 3번 전화가 왔다고 한다. 지금 이 환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연락할 방법이 없다. 이처럼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환자가 건강을 되찾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다시 한방의술의 신기한 효력에 감사를 드린다.
 
 (16) 한약 백 첩을 먹어도 못 고친 자궁암을 고치다

 1963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무렵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현대의학이 지금 같지 않아서 암검사도 서울에 와야만 할 수 있었다. 환자는 자궁암에 걸린 40살 된 부인으로 전기로 환부를 지져서 치료를 했다. 부인은 그 후유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이 심하게 나고 온 몸에서 물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땀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환자는 체격이 건장하고 얼굴전체가 붉다. 혀는 앞은 백태가 끼고 뒤는 황태가 끼었다. 환자를 가까이 하니 입에서 악취를 풍긴다. 맥은 빠르게 뛰고 발작적으로 심한 복통이 오고 구토가 난다. 대변은 니상변(泥狀便 :진흙을 묽게 이겨 놓은 것 같은 상태의 변) 으로 항상 잘 나오지 않는다. 이 부인은 서울에서 제일 이름난 한방병원, 한의원 등에서 한약을 백 첩이 넘도록 복용했으나 아무 효과도 보지 못했다.
 이 환자의 증세를 정리해 보면 얼굴이 붉고 열이 나며 땀이 나니 황련(黃蓮)과 황금(黃芩)을 쓰는 것이 옳다. 복통과 구토에 쓰는 처방이 많지만 황련과 황금이 든 처방을 골라야 한다. 반하사심탕을 쓸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복통이 너무 심하다. 결국 입냄새, 혀의 상태, 복통, 구토는 황련탕증이 확실하다. 그리고 배꼽 주위의 복통과 니상변은 황금탕을 써야 하는 증세인 것이다. 그래서 황련탕과 황금탕을 합방하여 주었다.
 이것을 복용하고 열이 내리고 복통과 구토 설사도 멈추었으며 땀도 그쳤다. 다시 6첩을 주었더니 이것으로 병이 완전히 나았다. 이 부인은 다음해 4월에 또 열이 나서 다시 황련탕과 황금탕을 합하여 10첩을 주었더니 다시 좋아졌다. 다음 해에도 5첩 이렇게 5년간 복용하고 완전히 건강해졌다. 암이 아니더라도 얼굴이 붉은 사람의 복통에 여러 차례 썼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17) 결혼 직전 처녀의 유방암을 고친 이야기

 24살 된 처녀가 유방암으로 찾아왔다. 2개월 뒤에 결혼하기로 날짜를 잡아놓은 처녀이다. 오른쪽 유방 젖꼭지 위쪽에 직경 1센티미터, 길이 3센티미터의 약간 단단한 종양이 생겼다. 열도 없고 아프지도 않다. 병원에서는 암이 너무 크다며 유방의 일부를 들어내야 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몸이 허약하고 오한이 나고 열이 나며 맥이 긴장되어 있긴 하지만 유방에는 아무런 통증이 없다. 그래서 갈근탕(葛根蕩) 5일분을 주었더니 3분지 2쯤 증상이 없어졌다. 몸이 허약하므로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을 주었다. 그러나 종양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귀기건중탕 10일분을 10일분을 주었다. 10일 뒤에 내가 만져보니 종양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환자는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멀리 울산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곳에 가서 귀기건중탕 10일분을 보내달라고 했다. 벌써 5년이 지났지만 재발하지 않았다.
 
 (18) 유방을 도려낸 유방암 환자

 환자는 45살 된 부인이다. 유방암으로 왼쪽 유방을 완전히 도려냈다. 유방이 있던 자리가 까맣게 되어 있고 겨드랑이 쪽에는 아직 시퍼런 진물이 흐르고 있다. 유방을 들어냈는데도 그전과 꼭 같이 가슴을 조이듯이 아프다고 한다. 맥은 1분에 190으로 빠른 편이고 부활(浮滑)하다.
 이것은 유방이 아픈 것이 아니고 가슴이 아픈 것이다. 곧 흉통이다. 흉통을 유방암으로 의사가 오진을 하여 잘라낸 것으로 보인다. 소함흉탕을 3일동안 복용하게 하였더니 흉통이 줄어들었고 다시 6일을 복용하게 하였더니 흉통이 사라졌다.
 그러나 환자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우긴다. 수술한 자리의 염증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날마다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그 뒤로 소식이 없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다.
 
 (19) 폐암을 치료하다 그만 둔 얘기

 1987년 초여름, 부인이 부축하여 한 남자가 왔다. 나이는 40살이고 키는 18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42킬로그램으로 마른 장작개비와 같다. 입이 말라 계속 물로 입을 축여야 하며 기침이 심하여 잠도 잘 수 없고 입이 쓰며 식욕도 없다. 손발이 차고 냉증이며 열은 없다. 복진을 해 보니 흉협고만이 있고 배꼽주변에 동계가 있다. 가장 큰 증상은 기침이다.
 시호계지건강탕에 황기, 별갑(鱉甲)을 더하여 주었다. 3일 복용하여 기침이 줄어들고 10일을 복용하니 기침이 80퍼센트 줄어들었으며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때 어느 후세방을 하는 친구가 폐농양을 수십 명 고친 약이라고 하면서 암 박사의 추천서도 들어 있는 알약을 가지고 와서 환자한테 복용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기침이 몹시 심해져서 각혈을 하게 되고 환자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어떤 좋다는 약도 복진법으로 진단하여 얻은 처방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0) 피를 토하는 폐암을 완치

 1990년 1월 16일, 서울 도봉동에 사는 35살 된 남자가 병원에서 폐암으로 고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천호동에 사는 친구의 소개로 찾아왔다. 환자는 1달에 한두 번씩 피를 토하며 피를 토한 뒤에는 가슴이 몹시 아프다고 한다.
 얼굴이 희고 체격이 단단하며 폐암으로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매우 건강했다. 키는 162센티미터에 몸무게는 71킬로그램이며 술을 마시면 구토를 한다고 한다. 대변은 하루에 한 번 되게 본다. 배에 늘 포만감이 있고 뜨거운 방에서는 잠을 자지 못한다. 뱃가죽이 두껍고 양쪽 옆구리가 단단하며 흉협고만이 강하게 나타난다. 갈비뼈 밑을 손으로 눌러도 손이 들어가지 않는다. 또 배꼽 주위가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맥은 무겁고 힘이 있다.
 흉협고만이 강하고 비만증이 있으며 맥에 힘이 있는 데에는 대시호탕이요, 배꼽주위가 딱딱하고 비만한데는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이 옳다. 결국 대시호탕에 방풍통성산을 합하여 계속 복용하게 했다.
 거의 한 달 뒤인 2월 19일, 피를 토하는 증상은 없어지지 않았으나 흉통은 없어졌다. 그리고 3월 4월 5월까지 한 번도 피를 토하지 않았다. 약을 복용한지 4개월 째에 대변이 많이 나오고 배의 포만감도 없어졌다. 이 환자는 여름에도 배를 덮고 자지 않으면 설사가 났는데 그 뒤로는 배를 덮지 않아도 설사가 나지 않았다. 환자는 배가 따뜻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가운 성질의 약이 배를 따뜻하게 해 준 것이다. 또 배가 푹 꺼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한다. 칼을 쓰지 않고 이렇게 암이 깨끗하게 낫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21) 재발한 췌장암을 약 열 첩으로 치유

 1985년 4월, 환자는 어느 약국 종업원의 외삼촌. 58살 된 남자로 어느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복통이 몹시 심하다고 하며 전에 췌장암으로 수술을 했는데 그 자리가 또 아프다는 것이다. 환자는 그 자리를 다시 수술하는 것이 몹시 겁이 나서 수술을 거부하고 나한테 왔다.
 환자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약간 야윈 편이다. 배가 몹시 아프고 구토가 심하게 난다. 복진을 해 보니 흉협고만이 심하게 나타나고 환부에 약간 손을 대기만 해도 몹시 아프다고 한다. 소시호탕에 복통을 그치게 하는 데는 작약이 좋으므로 백작약 12그램을 넣어서 4첩을 주었다. 과연 환자는 복통과 구토가 사라졌다. 다시 6첩을 주었더니 그것을 복용하고 쾌유되어 시골로 갔다.
 그리고 얼마 뒤에 환자의 아들과 며느리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어떠냐는 질문에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럴 리가 없으니 모시고 오라고 했다. 환자는 아직 속이 울렁거리기는 하지만 배는 아프지 않아서 아들과 며느리가 돈을 쓰는 것이 안쓰러워서 괜찮다고 했다고 한다. 약을 20첩 주었다. 그리고 3년 뒤에 그 약방 종업원을 만났다. 외삼촌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무런 탈이 없다고 했다.
 
 (22) 다 고친 췌장암 환자 항암제로 사망

 1990년 2월, 환자는 성남시에서 떡방아간을 경영하는 사람이다. 지난 해 여름부터 가끔 배가 아팠다. 음력 설 무렵에 부부가 쌀 10가마니를 떡을 만드느라 계속 밤을 세워 일을 했다. 너무 무리해서 그런지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니 췌장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병원에서 권하는 데로 수술을 했는데 배를 열어 보니 암이 전체에 퍼져서 그대로 도로 덮어두고 환자한테는 수술했다고 속였다고 한다.
 환자는 40살 된 남자로 키는 15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45킬로그램인데 병원에 갔다오고 나서 7킬로그램이 빠져 38킬로그램이 되었다. 내가 제자들과 같이 갔을 때 복통이 심해 말을 못하고 맥은 1분에 200번이 넘게 뛰었다. 뱃가죽이 심하게 오그라들어 마치 꼽추처럼 되어 누울 수도 없고 옆으로 새우처럼 꼬부리고 있었다. 배를 만져 보니 배 전체에 나무 판자를 깐 것처럼 딱딱하고 췌장부위에도 플라스틱 관을 꽂아 췌장 즙이 나오도록 해 놓은 것으로 보였다.
 환자는 복통이 극심하여 물어도 대답을 할 수 없고 다만 배를 잡고 뒹굴 뿐이다. 암이 너무 심하므로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고통이나 덜어보자고 북진에 나타난 대로 소건중탕을 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환자가 너무 쇠약하니 황기, 인삼을 각각 6그램을 더하여 6첩을 보냈다. 그런데 놀라운 효과가 나타났다. 그 맹렬하던 복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환자는 음식도 잘 먹고 외출도 마음대로 했다. 부인은 환자가 다 나은 것으로 믿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게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보고 암이 더 넓게 퍼졌다면서 배에 꽂아놓은 플라스틱 관을 통해 아마 항암제인 듯한 가루약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집에 오자 환자는 아파 죽는다면서 미친 사람처럼 날뛰고 부인을 두들겨 패고 부모한테도 막 대어들고 펄펄 뛰며 닥치는 대로 마구 집어던지며 소동을 피웠다. 아마 뱃속에 무슨 극약을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암환자가 통증이 없어지면 상대적으로 엑스레이 사진에는 더 나빠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일이 오스까 씨한테 두 번 있었고 나한테도 두 번 있었다. 오스까 씨한테 있었던 한 예는 환자의 상태는 점점 더 좋아지는데 사진에서는 더 나빠졌다. 그런데 그 환자는 3년이 지나도 재발하지 않았다.
 환자가 난리를 피운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과 함께 갔다. 환자는 한두 시간 안에 죽을 것 같았다. 시골에서 농업용 살충제 원액을 먹고 날뛰다가 죽어 가는 사람과 꼭 같았다. 부인은 천주교회에 기도하러 가고 없더니 얼마 뒤에 돌아왔다. 환자의 혀를 보니 가마솥 밑의 검댕 이처럼 까맣게 타 들어가고 물기라곤 하나도 없어 먼지가 날 정도였다. 혀를 보니 승기탕(乘氣湯)을 쓰는 것이 옳겠다. 병원에서 넣은 가루약의 독성 때문에 환자가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 환자를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감초뿐이다. 나는 항암제의 독성으로 4일 동안 가사상태에 있는 환자를 감초 7돈으로 살려 낸 적이 있다. 감초가 들어가는 승기탕은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뿐이다.
 환자의 부인과 부모, 그리고 동생이 응급조치를 취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죽어 가는 사람한테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죽게 하는 약이 있을 뿐이라고. 환자의 동생이 그렇다면 그 약을 제발 빨리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나는 처방을 말해 주었다. 감초 8그램에 대황(大黃), 망초(芒硝) 각각 2그램이다. 동생이 급히 약을 지어 와서 약탕기에 달이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이 약이 목에 넘어가면 환자는 죽을 것이다. 그러니 죽는 것을 보기 전에 돌아가자 하고 제자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런데 환자는 그 약을 먹고 날뛰고 뒹굴고 하던 것이 잠잠해지고 심하던 복통도 없어졌다. 그리고 환자는 늘어져 깊이 잠들었다. 그것을 보고 환자의 동생이 와서 다시 처방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소건중탕에 황기, 인삼을 각각 6그램씩 넣어 주라고 했다. 그러나 환자는 3-4일 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갔다.
 나는 엑스레이 사진에는 더 나빠진 것으로 나타났더라도 소건중탕을 계속 복용했다면 이 환자는 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병원의 입장에서 보면 암이 악화되어 있으니 항암제를 쓰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문제는 환자의 부인한테 있었다. 기적과 같은 효력이 있는 데도 한방은 믿지 않고 죽어도 병원치료만 믿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엑스레이 사진에는 나빠져도 환자는 더 건강해졌다. 3년이 지나도 암은 재발하지 않았다. 과연 이 말을 누가 믿을 것인가.
 1991년 10월 4일, 국립과학수사연구팀이 병원에서 죽은 시체 111구를 부검한 결과 45.8퍼센트인 시체 54구가 담당의사의 오진으로 죽은 것으로 나왔다고 했다. 이것을 보면 엑스레이 사진에서 나빠진 것으로 나타나도 반대로 환자는 좋아지는 경우도 45.8퍼센트는 되지 않겠는가.


 
 (23) 골수조직구암으로 죽은 사람을 감초로 살려내다

 1984년 8월 24일, 몹시 무더울 때에 있었던 일이다. 환자는 35살 된 남자로 육상선수이며 머리가 천재여서 수학을 잘 한다고 한다. 전국 주산대회에서 1등을 해서 육영수 여사가 주는 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회사에 취직을 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과로 끝에 어느 날 쓰러져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검사를 했지만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다시 검사를 하면서 조직검사를 했더니 골수암이며 조직구암이라서 골수암은 치료할 가망이 있지만 조직구암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며 치료방법도 없다고 했다. 가족들이 젊은 나이에 죽기는 너무 억울하다 그러니 할 있는 한 최선을 다 해 달라고 병원에 부탁했다. 병원에서 할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저독성의 항암제를 경구투여 하여 입으로 먹게 하는 것이었다.
 항암제를 투여하자 첫날은 의식이 약간 맑아졌다. 그런데 다음날 또 약을 투여하니 환자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 뒤로 혼수상태가 계속되었다. 그저 알부민 주사로 생명만 연장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병원으로 갔을 때는 8월 24일 오후로 의식을 완전히 잃고 혼수상태에 빠진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환자는 한의원 원장의 고종사촌형이며 가족으로 부인과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들이 와 있었다. 한의원 원장이 천주교 신자여서 하나님께 약 20분간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하여 주시든지 아니면 주님의 뜻대로 편안히 가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 기도가 영험이 있는 것 같았다.
 부인은 만삭인 몸으로 남편을 간호하러 나와 있었다. 기도를 마친 후 나는 환자 옆에 갔다. 발병한지 1주일밖에 안 되므로 환자의 체력은 좋아 보였다.
 환자는 이미 눈이 감겨져 있었다. 눈을 열어 보니 눈알인 샛노랗다. 눈뿐만 아니라 온몸이 다 샛노랗다. 온 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열이 활활 난다. 병상에 붙어 있는 기록에는 체온이 섭씨 39-40도이고 항암제 때문인지 머리가 다 빠지고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았다. 맥은 툭툭 치는 형용인데 1분에 220내지 240번 정도 뛴다. 혀는 이미 오그라들어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속마음으로 이 사람은 죽은지 오래 되었구나, 다만 알부민으로 숨만 남아 있을 뿐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환자의 가족들한테 이미 끝난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가족들은 이미 체념을 했는지 그다지 슬픈 표정을 짓지도 않고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하며 애원했다. 그 때 문득 내 머리가 맑아지더니 번개처럼 어떤 한 느낌이 스쳤다. 이 환자는 과로 끝에 힘이 빠져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상태이니 사역탕을 몇 첩 복용하게 하고 의식이 회복되면 십전대보탕으로 조리를 하면 될 나을 것인데,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는 사람한테 독한 약인 항암제를 썼으므로 항암제 중독으로 죽게 된 것이다. 온 몸이 노랗게 된 것과 머리가 빠진 것까지 모든 것이 항암제 때문이지 암 때문은 아니다. 라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는 가족들한테 한약 한 첩만 써 보십시오 하고 감초 5돈(26.25그램)을 주며 달여서 하루 세 번 복용시키라고 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튿날 아침 일찍 환자의 동생이 나한테 달려와 말했다.
 "선생님, 우리 형님이 살았습니다. 식사도 하시고 지금 신문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을 살리려고 나온 항암제가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감초의 강한 해독작용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나는 곧 병원으로 달려가서 키가 후리후리하게 큰 환자와 서로 껴안고 악수를 나누었다. 누가 이 기쁨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환자가 아니라 멀쩡한 사람 같았다.
 그 다음에는 사역탕에 인삼을 더한 처방으로 몸조리를 하게 했다. 이 약을 10일쯤 복용하니 집 주변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고 택시를 타고 나한테도 다녀갔다. 한 달 뒤에는 거의 건강을 되찾았다. 그 무렵 부인이 첫아들을 낳았고 그 가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환자가 어느 날 내가 있는 한의원에 오기 위해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택시를 타려는 사람이 많이 밀려 있었고 바로 그 옆에서 고성능 분무기로 가로수에 농약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이 농약냄새가 몹시 싫었다. 누군가가 택시 타는 순서를 양보해 주기를 바랐지만 아무도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그는 한참동안 농약냄새를 맡았다. 농약냄새에 취한 뒤로 비실비실 아프더니 며칠 뒤에 환자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면역력이 약한 아기들이나 허약한 사람은 농약냄새만 맡아도 죽는 일이 많다. 이 환자도 그 농약 독을 견디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24) 식도암을 고친 이야기

 1993년 초여름, 서울 제기동 경동시장의 어느 약국 주인의 부친이 식도암으로 10년을 고통에 시달리다가 나를 찾아왔다. 약국 주인은 권위 있는 암박사만 찾아다니며 약을 썼다. 10년 동안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한방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책방에 와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나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아버지가 식도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부친의 병을 고치려면 이 약을 한 번 써 보시오 하고 이격탕에 십전대보탕을 합친 처방을 일러주며 내가 식도암을 치료한 사례를 들려주었다.
 환자는 이 약을 한 달 동안 복용하고 식사를 잘 할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식도암으로 고생하는 두 사람을 완치시켜 주었노라고 말하면서 몹시 기뻐했다.
 나는 만성 식도암에 이 처방을 여러 번 활용했다. 그 뿐만 아니라 십전대보탕 합 갈근탕, 십전대보탕 합 오령산, 십전대보탕 합 소시호탕 등 몸이 쇠약한 암환자한테는 십전대보탕을 활용하여 좋은 성과를 얻었다.
 
 (25) 약으로 귀신을 내쫓다

 1974년 음력 정월 보름께다. 70살 된 할아버지가 16살 된 손녀를 데리고 와서 잠시 망설이다가 선생님, 귀신 들린 병도 고칩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런 질문에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다.
 "할아버지께선 귀신을 보셨습니까?"
 그러자 할아버지는
 "예, 귀신을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하면서 귀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데리고 온 손녀가 어느 날 무엇에 놀랐는지 갑자기 까무러쳐서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자 동네사람들이 여럿 모여 걱정을 했다. 그런데 모인 사람 중에 침을 놓는 사람이 있어 귀혈(鬼穴)에 침을 놓았다. 그랬더니 문밖에서 굵은 남자 목소리로 '어이 따가와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이 아니고 침을 찌를 때마다 문밖에서 어이 따가와라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사람들이 놀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러나 문밖에는 하늘에서 눈이 펄펄 내리고 땅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바깥이 추우므로 모두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침놓는 사람이 다시 환자한테 침을 놓았다. 그러자 다시 바깥에서 '아이 따가와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뒤로 손녀는 하늘에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만 나도 놀라 까무러치곤 했다. 하도 잘 놀라기 때문에 버스도 탈 수 없어서 20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나한테 왔던 것이다.
 환자인 손녀를 보니 하얗게 창백한 얼굴에 눈이 퀭하니 힘이 없다. 영리해 보이지만 몸이 몹시 허약하다. 복진을 해 보니 배에 힘이 없고 배꼽 왼쪽에 오이처럼 생긴 긴 덩어리가 있는데 이것이 펄쩍펄쩍 뛴다. 배꼽 왼쪽이 펄쩍펄쩍 뛰는 것을 좌변동계(左邊動悸)라고 한다. 이런 증상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억울하게 당하고 사는 사람이나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 또는 남편이 속을 많이 썩이거나 남편한테 억울한 일을 당한 여성, 선천적으로 소극적이고 조금만 속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밥을 굶는 형의 사람들한테 많이 나타난다. 이런 사람은 심장이 약해서 항상 근심걱정이 많고 놀라기 쉬우며 신경이 예민하고 겁이 많으며 늘 우울하다. 혹 불면증이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억간산에 진피와 반하를 더하여 10첩을 주며 손녀는 심장이 약해서 그런 것이니 이 약을 복용하고 심장이 튼튼해지면 귀신이 쫓겨 갈 것이라고 했다. 소녀는 이 약을 복용하고 나서 혼자 버스를 타고 나한테 찾아왔다. 30첩을 복용하고 나서 까무러치는 일도 없어지고 귀신 소리도 사라졌다.
 
 (26)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를 고친 이야기

 1975년 초여름, 제천 서부시장 근처에 사는 39세 남자를 어머니가 데리고 왔다. 환자는 외아들이며 부모한테 물려받은 땅이 많다. 일부는 남한테 소작으로 주고 나머지는 직접 농사를 짓는데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여 일을 하고 밤에는 들에 나가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 여러 날을 과로한 뒤에 병이 생겼다고 한다.
 환자는 키가 크고 뼈대가 굵어 힘센 장사 같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그릇 같은 것을 집어던지고 또 방에 들어가 장롱을 열어 남의 옷을 마당에 내던지곤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한테는 선생님 선생님 하며 태도가 고분고분하다. 이 환자는 발작했을 때 자기가 한 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 스스로 자기가 한 짓을 말해 주었다.
 평소 집에서 잠을 잘 때 자기는 윗목에 자고 딸과 아내는 아랫목에 자는데, 어느 날 자다가 일어나 앉아 있으니 자고 있는 부인과 딸을 갑자기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부엌에 있는 칼을 들고 와서 자고 있는 부인의 배를 찌르려고 하다가 찌르지는 못하고 발로 힘껏 걷어찼다. 잠을 자다가 변을 당한 부인은 잠옷바람으로 딸을 들쳐업고 이웃집으로 도망을 가서 위기를 모면했다.
 이튿날, 작은아버지가 그 소문을 듣고 와서 아무래도 네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면서 근처에 있는 다방으로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그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작은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낳은 것은 제가 처치해 버려야지요.' 했다는 것이다. 작은아버지는 '이놈이 정말 큰일 내겠구나'하고는 제천에 있는 정신병자수용소에 데리고 가서 가두었다. 이 수용소에서는 손발을 묶어 놓고 몽둥이로 때리고 손발에 전깃줄을 대어 전기로 지져서 고문을 했다. 그러면 환자는 쭉 뻗어 버린다. 이렇게 하루에 한 번씩 전기로 감전을 시켜 고문을 하는데, 나는 미치지 않았으니 제발 고문을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을 했더니 너는 제 정신을 차리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더 강한 전기로 고문을 했다고 한다.
 그는 고문을 견디다 못하여 철조망을 넘어 도망을 친 다음 집으로 갔다가 나한테 왔던 것이다. 맥을 보니 굵고 크게 뛰었다. 배에는 복직근이 좌우 양쪽에 힘있게 뻗어 있다.
 억간산 5일분을 주었다. 5일 뒤에는 혼자 차를 타고 와서는 그 약이 참 맛이 좋으니 그런 약이라면 얼마든지 먹겠다고 한다. 그는 20일 동안 약을 더 복용하고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서 서울로 취직이 되어 올라갔다.


 
 (27) 상사병을 약 몇 첩으로 고쳐

 1988년 4월, 전에 정신질환을 고쳐 준 적이 있는 학생의 누나가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뒤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나한테 왔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혼자 짝사랑한 남학생이 있었다.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자나깨나 이 남학생 생각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남학생을 찾아가서 나는 너를 죽도록 좋아하니 한 번만 만나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남학생은 공부하기에 바빠 만나 줄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몇 번을 찾아갔지만 계속 거절을 당했다. 나중에는 귀찮게 하지 말라면서 발로 차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정신이 몽롱해지고 헛소리를 하다가 몹시 우울해졌다가 슬퍼하며 울다가 그 남학생 이름을 부르며 밖으로 뛰어나가곤 했다.
 증상을 관찰해 보니 얼굴이 붉고 윗배의 중간지점인 중완혈 자리를 누르면 아프다고 하고 왼쪽 배꼽 옆에도 또 눌러서 아픈 부위가 있다. 이 환자는 쓴맛이 나는 음식을 매우 좋아하여 커피를 가루 채로 먹던가 아니면 진하게 타서 마신다. 이란 증상에는 삼황사심탕을 쓰면 정확하게 듣는다.
 삼황사심탕은 맛이 몹시 쓰다. 10첩을 주었더니 다 먹고 와서는 선생님 더 쓰게 약을 지어 주십시오 한다. 그대로 약을 지어 주었더니 약이 맛있다면서 하루에 4첩씩이나 먹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조용해져서 방에 들어박혀 사람 만나기도 싫고 겁이 난다면서 문을 잠그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약을 지나치게 많이 먹지 못하게 하고 억간산을 몇 첩 주었더니 이런 증상이 없어졌다.      
 그런데 이 환자는 생리 때만 되면 근처에 있는 가게에 가서 물건을 훔쳐 왔다가 생리가 끝나면 도로 가져다주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복진을 해 보았더니 소복 급결이 틀림없이 있었다. 삼황사심탕에 도핵승기탕을 합방해서 10일분을 주고 아직 그 남학생 생각이 나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이제는 그 남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 뒤로 이 환자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이 환자의 언니도 정신이 좀 이상하여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고 동생도 내 동생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환각증상이다. 역시 삼황사심탕을 써서 그런 증상이 없어졌다. 황련이 들어 있는 처방은 환각증세를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 이 집안의 세 자녀를 모두 치료하느라 한 동안 바쁘게 지냈다.
 
 (28) 갑자기 미친 병을 고치다

 1986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23살 된 남자가 갑자기 발광한 것을 어머니와 누이가 데리고 왔다. 무엇이든지 손에 닿는 대로 집어던지고 아무한테나 마구 덤벼든다. 같이 온 누이를 마구 때리고 발로 차며 어머니한테도 대들다가 갑자기 옷을 벗어 던지고 달음박질하다가 하늘을 쳐다보고는 '저 태양도 내 거다. 태양도 내 부하다'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밖에 뜻도 모를 소리를 마구 떠들면서 이리저리 날뛰는데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내가 맥이라도 짚어 봐야겠는데 환자한테 맞을까봐 겁이 난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던 중에 미친 놈한테는 겁을 줘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야 이놈!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옛' 하고 대답을 하기에 '너 몇 살이냐?' 고 물었다.
 "스물 세 살입니다."
 "나는 쉰 세 살이니 네 아버지뻘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그러면 여기 앉아."
 앉으라고 했더니 의자에 앉는다.
 "누워."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한다.
 손바닥에는 기름 같은 땀이 줄줄 미끄러지도록 흘렀고 맥을 보니 부약(浮弱)이다. 복진을 했다. 배는 나오지 않았고 살이 단단하다. 이 환자한테는 승기탕이 옳은데 배가 나오지 않았고 맥이 약하니 대승기탕도 소승기탕도 아니요, 조위승기탕이 가장 옳다. 조위승기탕 2첩을 주었다. 집에 갔다가 그 다음 날 왔는데 조용하고 고분고분하며 얌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자리에 없었고 다른 사람이 진찰을 했다. 맥이 부약하고 복진을 해도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인삼탕 2첩을 주었다.
 그런데 이것을 먹고 더 미쳐 날뛰게 되어 청량리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이듬해 3월에야 퇴원했는데 심하게 날뛰는 증상은 없어졌으나 멍청하게 바보처럼 되어 헛소리를 계속한다. 조위승기탕을 10일분씩 3번 보냈더니 이것을 복용하고 완치되어 지금 어느 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을 잘하고 있다고 한다.
 
 (29) 간질과 정신병을 한꺼번에 고치다

 1975년 4월에 있었던 일이다. 환자는 친구의 딸이다. 간질 증상이 심하여 왔다. 결혼한 부인으로 시집가기 전까지는 괜찮았다고 한다. 시집을 가니 남편은 수족을 못 쓰는 병신이었다. 거기에다 몹시 가난하여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흙집에 살았다.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집에서 매우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환자는 그 무렵 27살로서 젖먹이와 3살 된 아이가 있었다. 속아서 시집 온 것에 불만이 많지만 남편을 버리고 떠나려니 남편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져 고민하던 중에 병이 생겼다.
 때는 봄이었다. 나물을 캐서 시장에 내다 팔아서 연명을 해야 했다. 나물 바구니를 캐서 머리에 이고 시장에 가다가 갑자기 간질이 발작하여 앞으로 엎어지면 이마를 깨서 피가 흐르고 뒤로 넘어지면 뒤통수를 깨서 피가 흐른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라 새마을사업이 한창이었다. 그 마을 반장의 주선으로 새마을 사업장에 나가 일했다. 그런데 공사장 감독이 발작하는 광경을 몇 번 보더니 저 아주머니는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 했다.
 그렇게 되니 이 부부는 먹고 살 길이 없다. 그래서 집에서 돼지를 몇 마리 길렀으나 돼지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손해만 봤다.
 이 부인을 관찰했다. 얼굴은 햇볕에 타서 까맣고 얼굴상이 찡그려져서 보기에 흉하다. 맥은 매끄러우면서 빠르다. 배는 말랑말랑하고 배꼽 왼쪽에 오이처럼 생긴 덩어리가 세게 팔딱팔딱 뛰고 있다. 이것은 정확히 억간산에 진피와 반하를 더한 처방이 옳은 증세이다. 
 지금까지 침도 맞고 절에 가서 치성도 드리고 기독교 장미회에서 주는 약도 열심히 먹었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나는 억간산에 진피와 반하를 더한 약을 10일치 주었다. 이 약을 다 먹을 때까지 5일 동안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10일분을 다시 주었다. 이것을 다 복용하는 동안도 아무 탈이 없었다. 그런데 다시 10일치를 주었더니 이것을 복용하는 동안에 정신이상 증상으로 바뀌었다.
 그 때는 여름철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밤에 뒷산에 있는 공동묘지 아까시나무 숲에 가서 춤을 추고 노래하고 통곡을 했다. 흐트러진 머리에 온 몸이 피투성이 흙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세간을 때려부수니 보는 사람이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편은 팔다리를 못 쓰는 사람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남편은 성한 왼손으로 부인의 상태를 자세하게 글로 적어서 나한테 계속 보냈다. 그 때는 전화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약을 먹이지 말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죽든지 살든지 결판이 나야 한다면서 약을 계속 먹였다. 환자가 약을 잘 안 먹으려 하므로 10일분의 약을 한 달 동안에 먹였다.
 그런데 초가을이 되니 남편의 편지가 오지 않는다. 아마 죽었으려니 생각하고 있는데 추석에 친정어머니가 그 집에 가 보았더니 딸이 다 나았더라고 연락이 왔다. 내가 가서 보았더니 그 어둡던 얼굴이 활짝 피어 미인이 됐다. 복진을 해 보니 배꼽 주위에 있던 동계가 간 곳이 없고 배에 탄력이 생겼다. 병이 나아 새마을사업장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한 대가로 밀가루 9포대를 받아 쌓아두고 있었다. 그 뒤로 20년이 지났으나 이 부인은 건강하다.


 
 (30) 부잣집 외아들 간질치료에 실패한 이야기

 환자는 어느 개인병원 원장의 외아들이다. 22살 된 남자로 5살 때부터 간질발작이 있어서 아버지가 한 알에 만원이 넘는 비싼 알약을 지금까지 17년 동안 먹이고 있었다. 그 때는 쌀 한 가마니 값이 4-5천 원 할 무렵이었다.
 환자는 키가 크고 얼굴이 희멀겋다. 맥은 부약 같기도 하고 부활 같기도 하다. 배 양쪽에 직근이 서 있으니 억간산을 써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억간산에 황련 2그램, 작약 6그램을 더하여 주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느 날 감기에 걸렸는데 뒷목이 당기고 오한이 나고 맥은 부약하여 계지를 더한 용골모려탕에 갈근 12그램을 더하여 주었더니 감기도 나았고 간질 발작이 가벼워졌다. 그 약을 1달 분을 주었다. 그 약을 복용하고 나서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얼굴빛이 좋아지고 살이 쪘으며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 환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몹시 기뻐하며 내가 갈 때마다 가계수표로 10만원씩 준다. 1년 뒤에 다시 가 보았으나 발작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2년 뒤에 다시 가 봤더니 또 전과 같이 발작이 가끔 온다고 했다. 내가 1달만 약을 써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환자의 아버지는 약으로는 되지 않는다면서 내 제의를 거절했다.
 
 (31) 결혼식 날 간질발작은 멈추게 해 주었건만

 1976년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이 때에는 처녀총각이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먼저 살림살이를 하다가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 부부도 그런 경우였다. 남편이 장사를 잘 해서 돈을 벌어 결혼식을 날을 잡아두었는데 갑자기 부인이 전부터 있던 간질발작이 부쩍 더 심해졌다. 남편이 멀리 대전에서 부인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결혼식이 보름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이전에 빨리 낫도록 해 주십시오 하며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환자는 키가 아주 크고 몸집도 매우 크다. 눈에 검은 자위는 작고 흰자위가 많으며 희멀건 눈알이 빙글빙글 돌아 인상이 무섭다. 복진을 해 보니 뱃살이 단단하고 두텁다. 흉협고만은 없고 심장 아래위를 누르면 아프다고 하고 제상동계(臍上動悸 : 배꼽 위가 펄떡펄떡 뛰는 증상)가 있으며 대변은 하루에 한 번씩 본다고 한다.
 나는 심장 아래 부분에 누르면 아파 하는 증세를 흉협고만의 한 변형으로 보고 시호를 더한 용골모려탕(龍骨牡蠣蕩) 10일치를 주었다. 환자는 이것을 복용하고 나자 허옇던 눈이 정상으로 되고 발작을 멈추었다. 그래서 아무 탈 없이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다시 약을 10일치 주었다. 그러나 이 약을 다 먹은 뒤에도 7-10일 간격으로 약한 발작이 왔다. 내가 약을 더 써볼 것을 권했으나 남편은 이제 그만 먹어도 되겠습니다, 차츰 좋아지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약을 먹이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 환자가 완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32) 11살 여자아이의 간질을 고치다

 환자는 11살 된 여자아이다. 시내 어느 약국에 자주 오는 손님의 딸이라고 한다. 부모는 이 아이의 병을 고치려고 온갖 유명한 의사를 찾아다니며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어느 여름에는 산에서 100일 동안 치성을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환자의 아버지는 이 아이가 얼마나 신경질이 많은지 식구들이 견딜 수 없을 지경이며 집에서 마치 임금과 같다고 했다. 간질발작은 아주 어려서부터 있었다고 한다.
 아이는 눈초리가 예리하고 입술이 빨갛다. 복진을 해 보니 양 복직근이 희미하게 있고 뱃가죽이 얇다. 흉협고만이 배 양쪽에 민감하게 느껴진다. 소건중탕에 소시호탕 반량을 합하고 땀이 많이 나므로 황기 6그램을 더하고 또 변비가 있으므로 당귀 8그램을 더했으며 또 간질을 고칠 목적으로 법제한 용골(龍骨)과 모려(牡蠣)를 6그램씩 더하였다.
 이 약을 20일 동안 복용하니 식욕이 좋아지고 뱃살이 단단해지고 성격이 온순해졌다. 그러나 약간 줄어들기는 했지만 간질발작은 계속되었다. 나는 이 약을 계속 복용하게 했다. 3개월 뒤에는 키가 7센티미터나 더 크고 엉덩이가 넓어져서 건강해졌다. 6개월 뒤에는 1달에 1번씩 가벼운 발작이 오다가 8개월 뒤에는 발작이 완전히 멎었다. 한 번 환자가 약을 복용하는 중에 심한  복통과 설사가 났다. 그래서 작약의 양을 늘리고 당귀를 빼 버렸다. 이 증상은 3-4일만에 없어졌다.
 간질환자를 치료해 보면 맹렬한 발작은 10-30일 치료하면 그치는데 경미한 발작이 없어지기까지는 8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이 병은 성질과 체질이 바뀌어져야만 치유되는 것이며 나이가 어릴수록 효과가 빠르고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며 결혼한 사람은 효과가 느리게 나타난다.
 
 (33) 간질 완치하고 10년이 지나도 재발 않아

 환자는 원주중학교에 다니는 15살 된 남학생이다. 손이 덜덜 떨리면서 어어 하는 소리만 하면 이어서 발작이 온다고 했다. 복진을 하고 나서 시호를 더한 용골모려탕을 반량으로 하여 복용하게 했다. 손울 떠는 증상이 줄어들고 화도 내지 않고 경과가 좋았다. 그런데 6개월쯤 복용하고 나니 약을 먹는 것이 싫다고 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름철이었는데 얼음과자를 많이 먹고 땀을 많이 흘리고 밥맛이 없어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 이런 증상에는 소건중탕을 복용해야 한다. 나는 소시호탕에 소건중탕을 합친 시건탕(柴建湯)을 주었다. 이 약을 3개월쯤 복용하고 나서 발작도 멈추고 손 떨림도 없어졌다가 1년 뒤에 손이 떨리는 증세가 다시 나타났다. 약을 20일치 주었고 다시 그 이듬해 20일치를 주었더니 그것으로 완치되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발하지 않았다.
 
 (34) 술 마시면 까무라치는 술상무를 고친 이야기

 1980년대에 술을 전문으로 마시는 직업이 생겼다. 이름하여 술상무라고 하여 손님을 접대하는 일만 하는 회사원이다. 한 40대 남자가 술상무인데 손님을 접대하려니 술을 마셔야 하고 술만 마시면 까무러친다. 손님한테 흉한 꼴을 보일 수 없으니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겠냐면서 나를 찾아왔다.
 전에 어떤 남자가 잔칫집에서 술만 마셨다 하면 쓰러지곤 하던 것을 삼황사심탕을 복용하게 하였더니 그런 증상이 없어졌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번에도 삼황사심탕을 계속 복용하게 했다.
 환자는 이 약을 복용하고는 술을 마셔도 쓰러져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밖에 술을 마시고 피를 토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럴 때에도 삼황사심탕을 복용하면 피를 토하는 것이 멎는다. 토혈이나 하혈이나 피가 붉게 나오는 것에는 삼황사심탕으로 다스릴 수 있다.   

 

  심선택 선생은 10여 년 전에 별세하셨습니다. 심선택 선생은 별세하시기 전에 일생 동안 갖가지 암을 비롯한 난치병을 고친 경험과 처방, 복진법 등이 담긴 저서 두 권을 직접 손으로 써서 완성한 원고를 운림한테 맡기셨습니다. 본래 운림의 암 치료법과 합쳐서 공동 저작으로 책을 내려고 했던 것이나 돌아가시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운림은 미흡한 부분을 보충하여 책으로 펴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