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에 대항하기 위해 뉴라이트 교사연합 만들었다."

2018. 4. 16. 18:51이슈 뉴스스크랩


미래한국 인터뷰 ① "전교조에 대항하기 위해 뉴라이트 교사연합 만들었다."


  




뉴라이트에서 교사 연합 운동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전교조에 대항하기 위해 ‘뉴라이트 교사연합’이 만들어 졌습니다. 전교조가 학교 교육을 정치화 시키는 투쟁을 할 때 막상 전교조에 대항해서 싸울 사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이 ‘뉴라이트 교사연합’이었습니다. 당시에 이상주 부총리나 김진홍 목사, 서경석 목사 등이 투쟁력이 강한 사람을 찾다 보니 저와 연결이 된 것이죠. 그 당시 제가 전국 중등 교사 회장이었는데 서울교총에서도 제 영향력이 강했습니다.

전교조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전투력이 있는 젊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죠.

한번은 김진홍 목사가 저를 보자고 하더군요. 일요일 날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뉴라이트에 합류하라 했습니다. 국가를 위해 제가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장교 출신인데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 9부 능선을 넘은 시점에서 교육과 국가만을 생각해 뉴라이트에 들어가겠다고 대답한 것이죠.

그 후 저는 전교조에 대항하는 ‘뉴라이트 교사연합’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모인 교사가 600~700명가량 되었습니다. 방학 때에 교사들 모이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교사가 600명 넘게 모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죠.

그 당시 전교조는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200억원 정도 조직투쟁기금을 갖고 있었는데 교육계 우파쪽 사람들은 다 괴롭혔어요. 우파들이 가장 불편한 고소 고발을 남발하면서 저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우리는 개인적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진정성이 있고 대화 상대가 된다고 전교조가 판단한 것 같더군요. 두영택은 강력하게 투쟁하지만 합리적으로 투쟁 한다며 상대를 인정한 것이죠. 제가 나서서 전교조와 토론을 하다보면 “오늘은 저희가 또 졌네요”식으로 물러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제 조직이 강해졌고, 뉴라이트 18만 조직에서도 40대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상임대표가 되었습니다. 자리다툼이 심하고 장군출신에 의사연합 등 훌륭한 어르신들이 많이 있었지만 40대 교사 출신인 두영택을 조직의 장으로 인정해 준 것이죠.

뉴라이트에서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이명박 정부를 향해 여러 사람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거든요. 저는 최대한 중간에 서려고 노력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바른 소리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제 동기들은 어르신들에게 좋은 말 9개 하고 나쁜 말은 한개만 하라 했는데 저는 거꾸로 바른 소리를 9개를 했어요. 처음엔 마찰이 있었지만 어르신들이 저의 진정성을 알아주고는 그러한 부분도 많이 인정을 해주셨습니다.

뉴라이트 활동 막바지에 김진홍의장께서 저보고 비례대표 넣어 보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신청했더니 배정을 받았지만 마지막에 교사 출신 몫이 없어졌더군요. 12번까지 받아 놓고도 결국 탈락된 것이죠. “당신이 교사가 아니라 교수였다면..” 공천위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직이 와해되는 것을 보며 여러 가지로 회의감이 들었고, 제가 박사 학위를 받고 난 다음에 지도교수가 명지대로 가라 했지만 저는 교사로서 끝을 보겠다고 했던 저로서는 나름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침 저는 상명대 겸임교수를 겸했는데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서울시교육감 결재 득하고 저 처럼 겸임교수를 겸하는 교사는 2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광주여자대학 총장이 인물을 찾다가 저를 만나게 되었고 연고도 없는 광주에 내려가 9년째 교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교사생활 24년, 대학 교수 9년 생활을 하다가 때가 되었는지 두영택 같은 사람 어디에 있냐며 교육감 선거에 나와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딱 거절했는데, 그것이 또 시대의 흐름이 저를 불러내는 거예요. 교육에 대한 사명감이 다시 솟아나더군요.

지금 교육계 바닥을 보세요, 교육은 없습니다. 교육자도 없고요. 정말 눈물 날 정도로 허탈 합니다. 진정으로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없어진 모습에 시대의 부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죠.


전교조는 강한데 우파는 그러한 조직이 왜 없다고 보시는지요?

우파 교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안 키웁니다. 저 같은 사람이 교육정책 일을 하려고 하니깐 좌파 저쪽에서 저를 공격 합니다. 통진당 이정희 의원이 저를 국회에서 공격했어요. 제가 한나라당 교육정책위원이 되었는데 교사가 정치활동을 한다고 걸었죠.

저는 생각만 하는 지식인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필요 없다고 봅니다.
저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인들은 생각은 하는데 불편하니깐 행동하지 않아요.

전교조 교사들 중에도 훌륭한 사람도 있지만 그 틀 속에 자기 몸을 숨깁니다.
반면에 학교에서 보면 교사 역할도 제대로 안하면서 목소리만 큰 투쟁력이 강한 사람들이 있어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똥이 있으면 돌아가지 않고 내 행동으로 치우겠다고 했어요. 그게 40대 당시의 제 슬로건 이었습니다.

그때는 저를 보고 따르는 세력들이 많았어요. 제가 모이라고 하면 사립학교 교사들 100명씩 모이곤 했었죠. 

광신고등학교는 1년 간 전교조에 장악되었는데 저희가 가서 풀었습니다.
똥이 더러운 때에는 같이 똥칠을 해줘야 수그려듭니다. 교무실에서 회의하는데 목소리 큰 놈이 장땡이라고 목소리 크게 내고 아수라장 만들고 해서 그렇게 해결되는 겁니다.

제가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직속 교육혁신위원회였어요. 좌파 정부에서 저를 들러리로 넣어준거죠. 거기서도 제가 잘 했습니다. 사교육연합 대표, 전교조, 교장회 등 다 들어와 있었는데 교육적인 투쟁을 하면서도 교사로서의 동료애, 적이지만 적당히 이해하면서 투쟁하고 밤샘하면서 토론하고 나오면 서로가 인정하곤 했어요.

좌파 진영은 그러한 사람들 다 키워줬는데 우파에서는 저 같은 사람은 무시하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곤 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