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자동차부터 꽃·마스크팩·한우까지… 진화하는 자판기

2018. 9. 1. 19:27C.E.O 경영 자료



[Why] 자동차부터 꽃·마스크팩·한우까지… 진화하는 자판기


자판기 사업 新전성시대

#1. 당신의 운을 시험해 보고, 여기서 당신의 돈을 절약하세요!

서울 가로수길을 걷다 보면 이 같은 문구가 적힌 두 개의 자판기가 나온다. 국내 화장품 기업 코스온과 중국 유미도그룹이 최대 주주로 있는 넥스트아이 합작의 화장품 편집숍 '빌라쥬 11 팩토리'에서 설치한 것이다. 옆에 매장이 있지만 자판기를 통해 24시간 물건을 살 수 있도록 했다. 사용 방법은 영어·일본어·중국어로 적혀 있어 외국인 관광객도 구입이 가능하다.

#2. "세븐일레븐 익스프레스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조선일보

①미국 육류업체 애플스톤미트가 미 동부 스톤리지에 있는 본사에 설치한 ‘고기 자판기’. ②유니클로가 미 서부 할리우드버뱅크공항에 설치한 의류 자판기. ③파머스 프리지가 미국 시카고 노스슈어 대학병원 내 설치한 샐러드 자판기. ④배스킨라빈스가 서울 강남 브라운 청담 매장에 설치한 아이스크림 자판기. / 배스킨라빈스 등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29일 오후 4시 서울 중구 시그니처 빌딩 17층. 10m 정도 되는 고속철도 모양의 자판기 5대 앞으로 걸어가니 이 같은 기계음이 들렸다. 왼쪽에 있는 자판기부터 과자, 음료, 도시락, 컵라면, 생활용품 순으로 제품이 분류돼 있었다. 자판기 사이에 있는 터치 스크린으로 인터넷 쇼핑하듯이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으면 한 번에 3개까지 구매할 수 있었다. 이 자판기들은 세븐일레븐이 기획한 무인형 점포로 현재 총 4곳에서 시범 운영하고 있다.

편의점이 내몰았던 자판기의 복귀

최저임금 인상으로 유통업계가 인건비 폭탄을 맞으며 자판기 사업이 신(新)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저장·보관 기술의 진화로 가공식품뿐 아니라 신선식품으로 품목도 확대됐다. 결제 방식도 신용카드뿐 아니라 핸드페이(손바닥 정맥 결제), 비트코인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국내 자판기 사업은 1977년 롯데산업(롯데상사의 전신)이 일본 샤프로부터 커피 자판기 400대를 수입해 지하철에 설치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음료수·과자 등으로 급성장했으나, 커피 전문점과 편의점 확산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20여 년간 자판기 사업은 연평균 5%가량씩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러나 이 시장이 지난해부터 전년 대비 10%가량 성장하고 있다. 내년에는 최소 2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판기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한때 자판기의 대척점에 있었던 편의점 업계다. 이마트24도 작년 9월부터 자판기를 이용한 무인 편의점 9곳을 운영하고 있다.

조선일보

싱가포르 부킷 메라에 중고차 판매업체 아우토반모터스가 설치한 자동차 자판기. 페라리·맥라렌 등 고급 스포츠카들이 투명 케이스 안에 들어 있다. / 플리커

화장품 업계도 자판기 사업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다. 화장품의 경우 매장 내 직원이 설명해주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점도 영향을 줬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1월부터 이니스프리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자판기형 매장인 '그린라운지'를 여의도역 등 6곳에서 운영 중이다. 화장품 편집숍 '시코르'를 운영하는 신세계백화점도 지난해 12월부터 강남역점을 시작으로 전국 11곳에서 자판기를 운영 중이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자판기의 부활은 대면 문화를 부담스러워 하는 요즘의 '언택트' 추세와도 맞닿아 있다"며 "언택트란 접촉을 뜻하는 콘택트(Contact)에 부정·반대를 뜻하는 언(Un)을 붙인 신조어"라고 말했다.

냉장·냉동 보관이 필요한 신선식품 자판기도 확산하고 있다. 농협은 지난해부터 시범 운영하던 '고기 자판기'를 올해부터 확대 보급한다고 밝혔다. 고기 자판기에서는 냉장·냉동된 한우, 한돈 양념 갈비 등을 소량으로 살 수 있다. 배스킨라빈스는 24시간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자판기를 한남점 등 6곳에서 운영 중이다. 그 외에 샐러드 자판기, 책 자판기, 장난감 자판기, 꽃 자판기 등도 인기다. 운동화 등을 자판기로 판매하는 스타필드고양 내 편집숍 하우디 관계자는 "자판기는 쇼핑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도 사용된다"고 말했다.

자동차·샴페인까지 판매하는 외국

미국·일본 등에서 자판기는 하나의 유통 채널로 이미 자리 잡았다. 미국 내 자판기 시장 매출액은 70억달러(약 7조8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옷과 화장품은 여행 시 급하게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공항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화장품 브랜드 에씨·베네피트 등은 뉴욕공항 등에서 화장품 자판기를 운영하고 있다. 기내 반입이 가능한 적은 용량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유니클로는 휴스턴공항 등 10곳에 옷을 판매하는 자판기를 설치했다. 인기 제품인 히트텍 셔츠 등을 판매해 도착지의 날씨를 파악하지 못한 여행객을 겨냥했다.

정크푸드의 도시로 유명했던 시카고는 2013년부터 설치가 시작된 '파머스 프리지'사의 샐러드 자판기가 쇼핑센터 등 170곳으로 늘어나면서 '건강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 외에도 모엣샹동은 최근 미국에서 자판기를 통한 샴페인 판매를 시작했으며, 싱가포르에서는 중고차 판매업체 아우토반모터스가 페라리 등을 판매하는 자동차 자판기를 설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판기 천국인 일본에서는 오븐에 갓 구운 피자를 파는 자판기가 히로시마에 등장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기계 오류에 대한 대응, 골목 상권 침탈 문제와 무인 매장에 대한 거부감 등은 넘어야 할 산"이라고 말했다.

[이혜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