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박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북한이 한 가장 큰 거짓말은 무엇이냐고. 주저 없이 ‘비핵화를 하겠다는 약속’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래의 표를 보면 왜 비핵화 약속이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 1990년대 초반부터 북한이라는 체제의 일관된 목표는 핵 무력을 완성하는 것이고, 체제 생존을 보장할 ‘강력한 보검(寶劍)’인 탓에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가 가능해 집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이런 북한을 상대로 핵 포기를 위한 협상을 30년째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 역시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 한계에 부딪힌 비핵화 ‘중개’
문재인 정부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핵 포기 의지를 대외적으로 보증하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평창올림픽 참석을 계기로 ‘핫라인’을 가동하기 시작한 현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김 위원장의 핵 포기 의지는 확고하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첫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밑거름 역시 우리 정부의 보증에 기반을 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특사단장으로 평양을 다녀온 정의용 대통령 안보실장은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 목표는 선대의 유훈(遺訓)’ 이라고 한 발언에 주목해야 한다.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고 전했습니다. 서훈 국가정보원장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처음으로 직접 비핵화를 약속한 것에 의미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의용 대통령 국가안보실장(마이크 앞 자리 가운데)이 지난해 3월 백악관 집무실인 웨스트 윙 앞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서훈 국가정보원장 정 실장, 조윤제 주미한국대사.
시진핑 주석 역시 우리 정부와 거의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주석 취임 후 첫 방북 길에 올랐던 시 주석은 김 위원장을 만난 뒤 그의 메시지라며 “비핵화에 대한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고 전했습니다.
● 믿기 힘든 ‘비핵화 의지’
비핵화 의지가 분명한데 왜 비핵화 대화는 진전이 거의 없는 걸까요? 지난 30년간 북한은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하면서 핵능력을 고도화 시켜왔고, 끊임없이 외부세계의 감시를 피해가며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해왔습니다.
어디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그 해답은 비핵화에 대한 정의에서 오는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비핵화 유훈 발언은 사실 2005년 노무현 정부 시절 특사로 방북했던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 직후 처음으로 공개된 말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북한의 비핵화는 사실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찬을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정 장관에게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고 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북한의 핵무기를 해체하는 작업과 병행해 한반도 남측에서도 핵무기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발 더 들어가면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비행기, 함선의 한반도 출입, 통과, 방문 금지 △핵우산 보장하는 조약과 핵무기 저장, 배치 금지 △핵무기 동원되는 군사훈련 금지 △주한미군과 핵무기의 철수 등을 요구하는 것이죠.
비핵화의 의지가 있다는 것은 1) 한반도 남측에서도 모든 핵이 폐기된다는 전제하에 2) 북-미수교와 관계정상화 및 상응하는 보상조치가 모두 이뤄질 경우 미래 핵을 생산하는 조치를 영구히 중단한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경우 이미 생산한 핵의 경우 핵군축 회담을 진행하자고 요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핵 보유국 대 핵 보유국이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말입니다.
● 북한 핵 협상도 피해갈 수 없는 ‘진실의 순간’
물론 협상의 목표는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입니다. 북한이 아무리 허튼 주장을 하더라도 그 목표를 수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지속적으로 과장해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북한 핵 협상 역시 언젠가는 ‘진실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장(부장급·정치학 박사수료)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