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새로운 비전이 우리 땅을 통치할 것이다. 이 순간부터 통치 비전은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다.”
2017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제45대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국정철학으로 선언한 건 단지 미 국민을 향한 국내용이 아니었다. 세계를 향해 자유무역과 다자 국제기구라는 미국이 주도해 만든 국제질서에서 스스로 결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원래 아메리카 퍼스트는 20세기 초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전쟁에 미국이 개입해선 안 된다는 고립주의 운동의 구호였다. 국제주의자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조차 1916년 대선 슬로건으로 내세워 재선에 성공했다. 1917년 윌슨의 1차 세계대전 참전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완전히 사라졌던 고립주의를 트럼프가 100년 만에 되살린 셈이다.
트럼프 취임 이후 지난 3년 동안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탈퇴했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를 폐기했으며 중국과의 무역 전쟁은 세계 경제를 불확실성의 볼모로 잡았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월 15일 1단계 무역합의에 서명했지만, 중국 대미 수출의 63%에 해당하는 품목에 평균 19.3%의 고율 관세가 남아있다. 더 무서운 건 미국의 동맹과 국제기구에 대한 이탈이었다. 트럼프는 2016년 3월 26일 대통령 당선 6개월 전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중국·일본·중동 등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며 뜯기지 않을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엔에 불균형적으로 돈을 대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우리는 가난한 나라고 채무국이다. 다시 부자가 되지 않으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없다.”
다행히 미국의 나토 탈퇴나 동아시아 철수 같은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외교정책에서 '거래적 접근'은 돈이 되지 않는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선 탈퇴하는 대신 동맹을 상대로 한ㆍ미 자유무역협정, 미ㆍ일 무역합의,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 개정으로 이어졌다. 안보에서도 돈을 내지 않으면 철수하겠다는 위협으로 민주주의 동맹 질서를 흔들고 있다.
보수주의 학자인 엘리엇 코언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학장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비전은 국제정치를 약육강식의 세상으로 보고 가차 없이 '거래적 접근'을 한다는 것”이라며 “그는 과거 미국적 가치는 거추장스럽고 국제기구와 국제법은 사기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진짜 우려는 좌ㆍ우 양쪽에서 미국이 세계 질서에서 퇴각해야 한다는 새로운 합의가 힘을 얻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미국 우선주의가 트럼프 대통령 개인 성향을 넘어 구조적 조류로 장기간 미국 외교를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 세계 질서의 파괴자로 나서자 세계인의 미국의 리더십 평가는 곤두박질쳤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가 1월 초 공개한 세계 32개국 조사 결과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 문제에서 올바른 일을 할 것이라고 신뢰한다'는 응답은 29%, '신뢰하지 않는다'는 64%였다.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에 '신뢰한다'가 64%였다. 주요 5개국 지도자와 비교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앙겔라 마르켈 독일 총리(46%),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41%)은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33%)에게도 뒤졌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28%)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같은 결과는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강한 거부감을 샀기 때문이다. 외국에 대한 관세 확대(68%), 파리 기후협약 탈퇴(66%), 멕시코 국경장벽 설치(60%), 이민 억제(55%), 이란 핵 합의(JCPOA) 탈퇴(52%)에 반대가 절반을 넘었다. 유일하게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핵 협상 지지(41%)가 반대 의견(36%)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가운데 2020년 세계는 트럼프 대통령을 걱정하지만, 워싱턴의 최대 걱정은 중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 기반인 중부 농촌 주(州)의 농산물 구매와 대중 무역적자 축소라는 눈앞의 이익을 신경 쓰지만 국가안보 전문가들에겐 중국과 21세기 강대국 패권 경쟁(Great Power Competition)에서 어떻게 승리하느냐가 과제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10일 악시오스와 신년 인터뷰에서 “중국이 미국이 직면한 최대(No.1) 지정학적 도전”이라고 아예 공개적으로 밝혔다.그는 “미국은 중국과 같은 동급 경쟁자를 만나 본 일이 없다”며 “중국의 세계 무역과 경제를 지배하려는 국제적 야망과 명백한 목표 때문에 중국을 아주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오브라이언 보좌관은 “우리는 중국을 포함해 누구도 감히 군사적으로 우리에게 도전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강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당면 과제는 군사·안보적 패권의 토대가 되는 중국의 세계 최대 경제국 부상을 어떻게 저지하느냐다. 대응책에 대한 논의는 중국이 지식재산권을 보호하도록 하고, 국영기업 보조금을 철폐하게 해 자유무역 질서에 편입하는 수준을 뛰어넘고 있다.
캐서린 힉스 전략국제연구소(CSIS) 수석부소장은 최근 ‘2020년 도전’ 행사에서 “수년 전엔 중국과 생산적 협력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디커플링(경제적 상호의존 탈피)'만 얘기한다”며 “과거 미ㆍ소 냉전 때처럼 미국 주도 경제와 중국 주도 경제체제로 갈라서는 것이 미국의 최종 목표인지, 또 그것이 가능한지도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애런 프리드버그 프린스턴대 교수는 대중 경제 전략으로 중국과 ‘부분적 결별’(Partial Disengagement)을 주장했다. 미국이 중국의 지정학적 패권 추구에 대한 방어 조치로 중국으로의 첨단 기술 및 정보 유출은 물론 일정한 중국 상품·자본·인력의 미국 시장 접근을 차단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이 유럽ㆍ아시아의 선진공업국 동맹과 높은 수준의 다자 무역·투자 협정을 맺고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중국 등 비시장국의 참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