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기밀문서 "박정희 암살 이듬해 박근혜, 총선 출마 원했다"

2020. 5. 16. 00:12C.E.O 경영 자료


美 기밀문서 "박정희 암살 이듬해 박근혜, 총선 출마 원했다"

기사입력 2020.05.15. 오후 6:56 최종수정 2020.05.15. 오후 11:59 기사원문 스크랩

1980년 2월 생성 미 외교문서 기록

"전두환도 '朴 출마'알고 적극 권고"

'5·18 시위대 겨냥 발포 명령'내용은 없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1980년대 중반 육영재단 사무실 근처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사진 왼쪽), 박 전 대통령이 1980년대 말 자신의 사무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전에 그렸던 유화 등을 살펴보고 있다(사진 오른쪽). /조선일보 DB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이듬해인 1980년 차기 총선에 출마하길 원했다는 첩보가 기록된 미국 국무부의 외교문서가 40년 만에 기밀 해제돼 15일 공개됐다. 이런 사실이 미 공식 문서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12·12사태’ 두 달 뒤로 당시 군 보안사령관이자 ‘실권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스물여덟 박근혜’의 총선 출마를 지지했다는 증언도 이번에 처음으로 드러났다.

미 국무부는 이런 정보가 담긴 외교문건 43건(약 140쪽)을 한국 외교부의 요청에 따라 지난 12일 제공하고 정부는 이날 이를 공개했다.

1980년 2월에 작성된 미 국무부 문서는 ‘사정을 잘 아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인용해, “박근혜가 다음 총선에 자신의 아버지 고향이 포함된 지역구에 출마하길 바란다”고 기록했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러한 의사를 알고 박근혜에게 출마할 것을 강력히 권고(urge)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미 문서는 전했다. 문서는 또 전두환이 ‘박정희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이들 일가와 친해졌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을 미 대사관 측에 전한 소식통은 “전두환은 어디에나 있다(CHUN DOO-WHAN is all over the place)”고 말하고 이에 미 대사관 측이 “동의한다(We agree)”고 했다. 전 당시 보안사령관이 각종 사안에 관여하는 등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양측 모두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1981년 3월 25일 치러진 11대 총선에 불출마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번 문건에 정확히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나날이 만족스러웠다. 정치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종종 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고 썼다.

1980년대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만나서 악수하는 모습. /MBC 화면캡처 조선일보 DB

이번에 공개된 미 외교문서에선 전 전 대통령이 12·12 사태 이틀 뒤인 14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군부 내 반대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해 불안해했던 상황도 담겼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또 이 면담를 마친 뒤 본국에 보낸 보고에서 전 전 대통령과 신군부를 1908년 터키에서 군사혁명을 일으킨 젊은 장교들을 의미하는 'Young Turks(청년 투르크)’로 지칭하기도 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과 동료들은 군사적 반격을 저지하는데 미국의 도움을 받고 싶어한다"며 "향후 미국이 매우 곤란한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면담에서 전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한국군의 분열로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고도 했다고 문서는 전했다. 이에 전 보안사령관은 "(나의) 행동은 쿠데타나 혁명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려는 노력"이라며 "개인적 야심이 없다"고 했다고 글라이스틴 대사는 기록했다.

문서에 따르면,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일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면담했다. 이 사령관은 이 자리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들의 공산주의 사상에 우려를 표하면서 "이를 통제하지 않을 경우 한국이 베트남과 유사한 방식으로 공산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월 26일자 외교 전문에서 ‘뉴욕타임스(NYT) 기자가 광주 학생 지도부로부터 글라이스틴 대사가 휴전을 위한 중재에 나서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고 이를 본부에 보고했다. 그는 "대사가 이런 지저분한 상황에서 중재 역할을 맡을 경우 대사관이 한쪽이나 양쪽 모두에 끌려다닐 수(hostage to) 있다"고 적었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앞 대로에서 시민들이 군 병력과 대치하고 있다. /광주시

이번 미 국무부 문서는 작년 ‘5·18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을 위해 한국 외교부가 요청하면서 이번에 공개된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 군인이 광주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다거나 그런 책임자가 있다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외교부는 5·18 상황과 관련된 자료를 미 국방부 등 다른 기관에 추가 요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미 정부가 5·18 40주년을 앞두고 자료를 준 것은 굉장히 우호적인 제스처"라며 "자료 확보의 첫 단계라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 있다"고 말했다.

[노석조 기자 stonebird@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