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4. 4. 22:46ㆍ이슈 뉴스스크랩
봉하마을 찾아간 날, 관광객들 틈에 서서 “피곤해 죽겠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다
▣ 김해=글·사진 최성진 기자csj@hani.co.kr
“어, 나온다, 나온다,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님, 안녕하세요~!”
‘노간지’, 아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미스 봉하’처럼 사뿐사뿐 등장한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다. 사저를 향해 전직 대통령을 애타게 불러대던 방문객들은 신이 났다. 카메라 셔터를 여닫는 소리가 쏟아졌다.
“여성분들이 팔짱 끼니 처가 토라져”
“대통령님, 잘생기셨어요.” 40대 여성이 던진 돌발적 질문으로 찰나의 적막이 깨졌다. ‘노무현에게 말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하, 감사합니다. 제가 요즘 그런 소리 좀 듣습니다. 대통령 하고 있을 때는 저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만두고 나니까 잘생겼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대화부터 노 전 대통령 특유의 유머 작렬. 경계가 풀린 듯 방문객들의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때는 바로 그때였다. 수많은 네티즌과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줄 때가 된 것이다. 정작 노간지는 ‘노간지’라는 별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새 별명 붙은 거 아시나요.”
역시 노 전 대통령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그는 말했다.
“압니다. 간지, 노간지.”
“새 별명은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아, 좀 이상해요. 간지… 어감이 이상해요.”
네티즌들은 고향으로 내려간 전직 대통령에게 ‘노간지’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구멍가게에서 담배 한 대 입에 물고 비스듬히 앉은 모습, 발가락 양말에 슬리퍼를 신고 방문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 등이 사진을 통해 소개되자 붙은 별명이었다. 풀이하자면, ‘멋쟁이 노무현’ ‘폼나는 노무현’ 정도의 뜻이다.
정작 노 전 대통령 본인은 ‘노간지’란 별명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눈치였다. 새 별명을 처음 접한 그가 비서관에게 보인 반응은 “간지가 뭐꼬”였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주로 쓰는 표현인 만큼, 다소 생소하게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노간지라는 별명이 자꾸 나오기에 대통령께 직접 보고를 드리기는 했다”며 “‘간지’가 일본식 표현인 줄만 알았는데,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니 ‘간지다’라는 순 우리말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참고로 ‘간지다’라는 단어는 ‘간드러진 멋이 있다’는 뜻의 형용사다. 물론 이 단어가 노간지의 그 간지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일과부터 부인 권양숙씨의 근황에 이르기까지 방문객들의 관심사는 다양했다.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자느냐는 질문까지 나왔다.
“요즘 어찌케 지내신당가요.”
“생각보다 바쁩니다. 엄청시리 바쁩니다.”
“어떻게 바쁜데예.”
“일일이 다 이야기 못합니다. 하여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 일들이 수두룩 빽빽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욕봤심니까. 역대 대통령이 이래 나와가 사는 역사가 없거등요. 마음이 좀 편안할 낀데, 어떻심니까.”
“좋기는 좋은데 고달파요. 피곤해 죽겠습니다. 올라가시거든 ‘가보니 아무것도 볼 거 없더라, 가지 마라’ 좀 해주십시오.”
“여사님은요. 왜 같이 안 나오셨어요.”
“오늘은 그냥 저만 보고 가시죠. 같이 나오면 여성분들이 자꾸 제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고 그러니까 제 처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토라져서 저 혼자 나가라고 합니다.”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나세요.”
“5시에 일어납니다. 밥은 7시에 먹습니다. 그리고 밤 10시에 잡니다.”
시민 노무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한 방문객들이 더 욕심을 냈다. 여기저기서 손 한번 잡아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노 전 대통령이 난색을 표했다. “죄송합니다. 손이 아픈 것은 둘째치고 악수를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뒤엉켜가 난리가 납니다.” 20분가량 방문객들과 인사를 나눈 노 전 대통령은 “이제 할 말도 다 떨어졌고 그만 들어가볼랍니다”라며 자리를 떴다. 방문객들은 사저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노 전 대통령을 직접 대면한 방문객들은 그제야 만남의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 자리는 금세 다른 방문객들로 채워졌다. 사저를 향한 “대통령님 나와주세요”라는 외침은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3월22일 오후 4시 무렵의 봉하마을 풍경이었다.
비서진의 최대 고민, 방문객의 ‘부르심’
일요일인 다음날 낮12시께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문용욱 전 제1부속실장, 김경수 전 연설기획비서관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봉하마을에 있는 유일한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온 것이다. 노 전 대통령 비서진의 최대 고민은 봉하마을을 찾는 사람이 퇴임 한 달이 되도록 전혀 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김경수 전 비서관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2월25일 고향으로 향하는 KTX 열차에서 ‘앞으로는 조용히 쉬고 싶다’고 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거죠.”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사람들이) 안 와도 걱정, 와도 걱정”이라고 말했다.
걱정은 현실이 됐다. 김해시 등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내려온 직후 봉하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평일에는 하루 3천 명, 주말에는 1만 명 안팎의 방문객이 ‘시민 노무현’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문제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이 저마다 한 번씩 전직 대통령을 불러낸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을 부르는 소리도 다양하다. 사저 코앞까지 와서 “노무현, 노무현” 하며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통령님, 보고 싶습니다. 나와주세요”라며 직설화법을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목소리가 커지면, 대통령은 비서진과 함께 사저를 나설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만남은 대개 하루 대여섯 차례 정도 이뤄진다.
김 전 비서관은 “봉화산이나 화포천 등 봉화마을 주변이라도 꾸며놓았으면 덜 미안하겠는데 아직 이런 게 충분하지 않으니 몸이 피곤하더라도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통령 생각”이라며 “퇴임 이후 매일처럼 방문객들이 밀려드는 통에 급기야 어제는 (노 전 대통령이) 가벼운 몸살이 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호철 전 수석이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했다. “차라리 하루에 두 차례 정도 시간을 정해서 정기적인 만남의 시간을 갖는 게 낫지, 안 그러면 안에서 일을 제대로 못하잖아.” 비서진 가운데 한 명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게 시간을 정한다고 해도 분명 그 시간 이외에 불러내는 사람이 있을 거란 말이죠. 시간을 정해놓게 되면 그 시간 이외에는 부르지 못하게 한다든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3천원짜리 물국수를 메뉴로 한 비서진의 ‘오찬 회동’은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끝났다.
봉화산·화포천 등 농촌 가꾸기가 목표
김경수 전 비서관은 “봉화산이나 화포천 등 자연 생태계를 새롭게 가꿔 농촌을 떠난 주민들이 다시 고향을 찾도록 하겠다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의 1차 목표”라며 “책을 읽거나 비망록을 정리하는 일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데 지금으로서는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오후 1시가 넘어가면서 만남의 광장 앞에 몰려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통령님, 나와주세요~!” 1시25분, 사저 문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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