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보느라 법안도 안 만드는 공무원"
한승수 국무총리는 최근 전 정부부처에 '공직기강 확립 업무 추진 지침'을 내려 보냈다. 지침에는 "특정 정당의 당론이나 특정 정치인의 의사에 경도돼 국정과제 수행을 방해하는 등… 정치권 줄대기, 관련업계 이익 대변 등의 목적으로 주요 기밀문건을 고의로 유출한 사례를 엄단할 것"이라고 돼있다. 실제 공무원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국무총리가 이런 심각한 내용의 지침을 내려 보냈을까.
이석연 법제처장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각 부처가 금년에 입법계획을 세운 법률안 중 70%가 아직 준비가 안됐다"며 "이번 정기국회에서 시급하게 처리하기로 한 법률안 200건 중에서도 절반이 제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이념적 충돌이 예상되거나 강력한 이해집단이 관련된 법안은 거의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당의원들의 지적이다.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은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통폐합 법안은 이명박 정부 인수위부터 주문한 것인데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아 결국 당에서 법안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여당이 추진 중인 교원평가제와 관련해 교육부가 당정협의에 들고 온 법안은 평가 결과를 교원 인사에 전혀 반영하지 못하도록 한 전교조 눈치보기용이었고, 금산분리 완화와 관련해서도 공무원들이 제출한 법안은 이명박 정부의 철학을 완전히 무시한 내용이었다는 것이 한나라당 측 얘기이다. 한 여당의원은 "지난 정권에서 관선 이사를 파견한 전국 20여개 대학에 대한 운영상황 점검을 새 정부가 지시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심지어 정부의 기밀문서가 여당보다 야당에 더 빨리 넘어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나경원 의원은 최근 "오전에 청와대에서 회의한 내용이 오후에 국회에서 민주당 의원에 의해 공개된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방송통신위 내부자료가 그대로 야당에 넘어간 적도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환경부 국감 때는 정부의 보안심사위원회 운영 문건이 민주당에 유출됐고, 국정원과 경찰이 국감관련 보고를 받은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이 민주노동당에 흘러들어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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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다" 대통령도 하소연
이명박 대통령도 최근 여당의원들과 만나 "공무원들에게 내 뜻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고 불편한 심기를 표시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국가예산을 10% 절감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더니 조달이나 지출의 효율성을 높일 생각은 않고 자신들의 월급이 10% 깎이는 것 아니냐는 걱정만 하더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또 서민주택 지원책과 관련해 "정부 예산은 딴 거 하지 말고 전액 서민주택 공급에만 투입하라고 했는데도, 만들어온 정책은 거의 모든 중산층에게 푼돈을 지원하는 식이었다"며 답답함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정권 코드' vs '공무원은 피해자'
여권 핵심부에서는 "공무원들의 직무유기에 가까운 행위를 감찰해야 할 사정기관들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불만까지 나오고 있다. 한 여권인사는 "국정원에 과거 정권과 손발을 맞췄던 고위간부가 그대로 있길래 국정원 고위층에 문제를 제기했는데도 전혀 반영이 안됐다"고 했다.
이 같은 현상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여권 내부에선 "지난 정부가 심어놓은 간부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주류 초선의원은 "교육부는 '이해찬의 아이들'이 여전히 핵심"이라고 했고, 한 재선의원은 "중앙부처 국·과장급들이 대부분 386세대인데 이들은 현 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아 '자발적 반발 세력'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공직사회의 볼멘소리도 없지 않다. 한 외교안보 부처 고위 간부는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정치적·이념적 정책에 깊이 관여한 공직자들 '뒤끝'이 안 좋은 것을 뻔히 봤는데 누가 새 정권을 위해 앞장서겠느냐"고 했고, 한 중앙부처 과장급은 "공무원들에게 먼저 적대적 자세를 보인 것은 새 정권 아니냐"고 했다.
한편 여권 내에선 "공직사회에서 코드 논란이 나오고 복지부동 얘기가 들리는 것은 결국 장관들의 무능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란 비판도 적지 않다. 청와대는 최근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장·차관에 대한 업무 평가 작업을 진행 중이며 그 결과를 조만간 인사에 반영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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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열 기자 dykwon@chosun.com]
[황대진 기자 djhwa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