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자에서 가정의 개척자로

2009. 1. 30. 05:34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내조자에서 가정의 개척자로

주부들의 자기인식과 사회적 인식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는 생계부양자로서의 남편과 전업주부로서의 아내라는 구도를 무너뜨렸다. 남편 내조와 자녀 교육을 담당해온 주부들이 ‘남편만 믿고 있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맞벌이에 나섰다.

주부가 취업전선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배은경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제위기와 젠더 관계의 개편’이라는 논문에서 “(외환위기 당시) 여성은 그 자신의 실직이 문제되는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실직 위기에 처한 가장을 격려하고 지원할 주부로만 재현됐다”며 아줌마의 현실과 사회적 이미지 사이에 놓인 괴리를 설명했다.

하지만 사회적 경험이 누적되면서 주부들은 점차 강해졌다. 가정의 경제권과 의사결정권을 넘어 시장과 여론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재테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들어진 무한경쟁 시대로 접어들면서 직장을 가진 여성뿐 아니라 전업주부의 역할 역시 커졌다.

특히 정보화 혁명은 아줌마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낸 디딤돌이 되었다. 육아, 살림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생겨난 주부 중심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전문가급의 정보를 생산해내는 ‘스타 블로거’가 생겨났고, 나아가 여러 생각이 모이면서 각종 사회적 담론을 생산해내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광우병 파동과 중국발 멜라민 파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 대책을 마련하고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낸 것은 바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주부들이었다. 

‘억척엄마’에서 ‘알파맘’으로

아줌마들이 아줌마임을 즐기고, 아줌마라서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사회를 바꿔가면서 사회에서 아줌마를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었다.

과거의 아줌마는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일바지 몸뻬 차림,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희화화되곤 했다. 이제 ‘억척엄마’ ‘치맛바람’으로 설명되던 교육열 높은 주부는 ‘알파맘’으로 불리며 주체적이고 똑똑한 주부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담게 되었다.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는 ‘당당하고 능력 있는’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새 이름 ‘싱글맘’을 얻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조적 위치에 만족해야 했던 ‘줌마테이너’(아줌마+엔터테이너)들이 전면으로 부상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등 대중매체에서 아줌마의 활약도 인식 변화에 한몫 했다. 주부 자기계발서 ‘아줌마 손자병법’을 쓴 이상화씨는 “현재 30∼40대 아줌마들은 사회, 경제, 생활과 관련된 모든 것에 주도적으로 나서며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어 요즘을 ‘주부시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며 “특히 환경, 식품안전, 복지 등 생활밀착형 분야에 대한 예리하고 섬세한 관점은 남성이 발휘하기 힘든 장점”이라고 말했다.

불황의 시대, 아줌마를 말한다

외환위기보다 더 극심한 경제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요즘, 가정과 사회의 새로운 주체로서 아줌마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줌마 리더십은 가족의 힘이자, 사회의 힘이다. 1990년대 말의 경제위기 때 사회적 화두가 ‘아버지’였다면 지금은 ‘어머니’라는 점도 상징적이다. 당시에 “아빠 힘내세요”라는 광고문구와 사회에서 소외된 ‘고개 숙인 아버지’가 있었다면 지금은 가족의 그늘에 가려졌던 어머니가 조명받고 있다. 강인한 생명력과 섬세함, 너그러움을 의미하는 어머니를 통해 힘과 용기를 얻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변화순 박사(성평등연구실장)는 “사회 변화를 거치며 아줌마들의 힘이 충분히 장전돼 있어서 언제든지 나와서 걸어볼 만하다 싶은 사회적 이슈가 터지면 움직일 준비가 돼 있고, 이것이 새 사회 변화에 새롭고 긍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을 읽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백소용 기자 swini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