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매장 화사해졌다.

2009. 4. 8. 08:33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경기불황에 모두가 울상인 요즘 지하철역 매장은 상황이 좀 다르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진 사람들이 지하철을 더 많이 이용하는데다 중저가 위주의 제품들이라 경기 한파의 직격탄을 피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매출이 늘어난 매장도 많다. 게다가 유명 패션디자이너의 상품 코너가 등장하는 등 분위기도 달려졌다. 판매 업종도 훨씬 다양해져 소비자의 선택폭도 그만큼 넓어졌다.

지난 6일 오후 7시 퇴근시간. 서울 2·7호선 환승역인 대림역에 있는 한 잡화점에는 ‘무조건 1000원부터’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10여명의 손님들은 50cm도 채 안되는 진열장 사이를 간신히 지나가며 물건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2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이곳을 지나던 직장인 주미연(30)씨는 “평일에 바빠 생활용품들을 못사는 경우가 많은데 집에 가는 길에 생각나서 소쿠리 두 개와 컵받침을 구입했다”고 말했다.

바로 옆 점포에는 ‘팬티 200원부터~’라는 문구가 걸린 한 속옷 매장. 역시 재고정리를 위해 쌓아놓은 속옷들을 팔고 있었다. 주부 김주인(45)씨는 “매번 사야지 사야지 하고 안사다가 동네 속옷가게보다 저렴한 특가라고 해서 몇 개 골랐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점심시간 무렵, 1·4호선 환승역 동대문역에 있는 한 제과 매장에는 친구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정미진(17)양은“친구들하고 쇼핑하기 위해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정했다”며 “찾기도 쉽고 기다리기도 편하다”고 말했다. 3·7호선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한 화장품 가게 역시 20대 여성들로 붐볐다. 진명은(27)씨 “지하철에서 내려 바로 마을버스를 타는데 집으로 가는 길에 화장품을 살 곳이 마땅치 않아 지나던 길에 들렀다”고 말했다.

요즘 지하철 내 매장은 불황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린다. 2ㆍ3호선 환승라인의 한 스낵바 판매원은 “경제가 좋지 않아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곳보다 매출이 큰 폭으로 떨어지지 않아 상대적으로 좀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화장품업체 더페이스샵의 어린이대공원역점, 연신내역점, 숭실대역점은 2월 대비 3월 매출액이 30% 증가했다.

‘지하철역 매장’이 경기 불황의 짙은 그늘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지리적 이점= ‘2008 서울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하루평균 712만명의 시민이 지하철을 이용했다. 10년 전 지하철 승객(449만명)보다 40% 증가한 수치다. 잠재 고객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한 연구소가 ‘유가변동에 따른 대중교통 영향’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휘발유 가격이 1원 상승할 때 대중교통 이용객은 60.5명씩 증가한다. 고유가일수록 지하철 이용객도 늘어난다. 지하철역 매장은 업종별로 차이는 있지만 지하철 첫차 시간부터 막차 시간까지 주ㆍ야간, 공휴일 영업이 가능하는 점도 이점으로 꼽힌다.

◇중저가 타깃=지하철역 상점에는 '동대문표' 의류 매장, 편의점, 싸롱화 매장, 제과점, 액세서리점, 1000원숍 등이 입점해 있다. 1000원 한 장으로 귀걸이, 슬리퍼, 스타킹, 화분, 속옷, 샌드위치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업종에 따라 상품가는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대부분이 저가다. 큰 부담없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살 물건들이 많다는 것이다. 최근엔 유명디자이너 매장까지 지하철 안으로 들어왔다. 지난 1월 사당역에 들어선 국내 한 유명 디자이너의 매장은 백화점에서 200만원대에 팔리는 옷을 40만원 이하로 판매했다.

◇선택 폭 커져=지하철 내 점포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업종 분포도 다양해지고 있다. 서울도시철도공사(5~8호선)의 경우 2007년 179개였던 점포가 올해 4월 현재 427개로 늘었다. 2년새 2.5배가 증가한 수치다. 서울메트로(1~4호선)에도 현재 507개 점포가 운영되고 있다. 서울메트로측은 “기존의 유휴 공간을 늘려 지하철 이용객에게 상품 선택권을 넓혀주고 있다”고 말했다. 업종 분포는 초기엔 편의점과 제과점이, 현재는 의류, 화장품, 액세서리, 잡화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업종 변경 쉽다=지하철 내 매장도 계절을 탄다. 개인 사업자가 등록한 매장은 계절마다 변신이 가능하다. 용산역에 있는 한 간이음식점은 겨울엔 와플과 방한용 의류를, 여름엔 아이스커피와 여성용 샌들을 판매한다. 매장 입찰 신청 때 ‘A업종 5년’ 계약서를 내지만 때에 따라 다른 상품 판매가 가능하다. 점주는 지하철측에 업종 변경서를 제출하고 승인을 받으면 된다. 서울메트로는 최소 3개월, 도시철도는 상황에 따라 변경 승인을 내려준다고 한다.

◇이미지 변신=지하철 내 매장의 이미지가 예전보다 많이 화사해졌다. 브랜드 이미지를 고려해 입점을 꺼렸던 일부 잡화, 화장품 업체 등이 들어서면서 깨끗한 이미지로 손님을 끌고 있다. 더페이스샵 서희주 매니저는 “유동인구가 많은 점을 주목해 지하철역 매장을 ‘움직이는 홍보관’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도시철도공사측은 “웬만한 상권보다 지하철 매장의 수익이 큰 것으로 안다. 앞으로 ‘지하철 명품’ 매장으로 가꿀 생각"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부 매장도 없지 않다. 과도한 호객행위나 폐업처리를 위해 박스를 아무렇게나 쌓아놓고 물건을 파는 경우다.

이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