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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데 메디치의 초상화. 남편 앙리 2세가 사망한 후, 항상 검은 상복을 입고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래서 ‘검은 왕비’로 불렸다. |
프랑수아 클루에가 그린 ‘디안 드 푸아티에’. 프랑스 최고의 미녀로 불렸던 디안은 카트린 데 메디치의 남편 앙리 2세가 사랑하던 연상의 애첩이었다. 워싱턴 미국 국립미술관 소장. | |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이끌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하자(1492년), 메디치 가문은 급작스럽게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로렌초의 뒤를 이었던 장남은 ‘불행한’ 피에트로 데 메디치(1471~1503년)로 불렸다. 아버지는 ‘위대한’ 거인이었지만 큰아들은 ‘불행한’ 소인에 불과했다.
아버지로부터 피렌체의 실질적 통치권을 물려받은 지 2년 만에 피에트로는 시민 폭동으로 권좌에서 쫓겨난다. 비록 장남 피에트로는 피렌체 시민이 일으킨 쿠데타로 망명생활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메디치 가문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위대한’ 로렌초의 둘째 아들이자 ‘불행한’ 피에트로의 동생이었던 조반니 데 메디치가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에서 처음으로 교황을 배출한 것이다.
이제 메디치 가문의 희망은 교황 레오 10세가 된 조반니에게 모아졌다.
양모 산업에서 은행가로 변신,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이 마침내 로마 교황청까지 접수한 것이다. 교황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지역을 점령하고 조카(피에트로의 아들)인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우르비노 공작의 작위를 수여했다. ‘위대한’ 로렌초와 이름이 같기 때문에, 이를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그를 ‘우르비노의 공작’으로 부른다. 그러니까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는 ‘위대한’ 로렌초의 손자가 되는 셈이다.
카트린 데 메디치(1519~59)는 바로 이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의 딸로 태어났다(1519년).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증손녀이며 현존하던 교황 레오 10세가 카트린의 작은할아버지였다.
장차 프랑스의 왕비로 등극, 16세기 후반의 유럽 역사를 좌지우지하게 될 메디치 가문의 여걸이 탄생한 것이다.
영웅의 이야기는 언제나 비극과 시련으로 시작된다. 카트린의 생애도 그렇게 출발했다. 카트린은 태어나자마자 몇 주 만에 양부모를 모두 잃는 슬픔을 당했고, 평생 고아로 성장한다. 갓난애 때부터 강력한 후원자였던 작은할아버지 교황 레오 10세가 1521년에 사망하고, 세 살 난 어린아이 카트린은 유럽의 냉혹한 정치판에 내동댕이쳐졌다. 당시 각국의 국왕들은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유럽의 정치적 패권과 자존심을 겨루며 으르렁거리던 왕관을 쓴 괴물들이었다.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로마까지 진격해 ‘영원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1527년).
용병으로 고용됐던 독일 군인들은 종교개혁의 여파로 로마 교황청에 악감정을 품고 로마를 난도질했다. 사제들은 죽임을 당했고 수녀들은 길거리에서 겁탈을 당했다. 굴욕적인 ‘로마의 함락’을 속수무책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교황은 클레멘스 7세(1478~1534)였다. 클레멘스 7세가 교황으로 즉위했을 때, 10대 소녀로 성장한 카트린은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프랑스 궁정에서의 굴욕그러나 로마가 스페인의 황제가 고용한 독일 용병에 의해 초토화됐고 메디치 가문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이 피렌체에 전해지자 다시 피렌체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참주정을 실시하던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고 공화정으로 복귀하기 위해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의 적통을 이어가고 있는 카트린을 제거하려고 했다. 성난 폭도들은 메디치 궁전으로 난입해 값진 보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그곳에 숨어 있던 어린 카트린을 인질로 잡았다.
이 과정에서 카트린은 정치적 격변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야수로 변해가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겨우 수녀원으로 몸을 피해 목숨을 건졌지만,
피렌체 폭도들은 카트린의 목숨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메디치 가문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후환을 없애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열한 살의 어린 소녀였던 카트린은 수도원 정문을 에워싸고 있던 폭도들 앞에서 당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서워 울기는커녕, 그 어린 소녀는 수녀원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또박또박 주장했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어린 소녀는 자신의 뒤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폭도들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성을 잃은 폭도들도 교황의 친척인 어린 소녀의 당당한 태도 앞에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로마 사태와 피렌체 폭동이 진정된 후, 카트린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며느리로 시집을 가게 된다. 프랑스 세력의 도움을 청하기 위한 교황의 정략결혼이었다. 당시 관습에 따라 엄청난 액수의 지참금을 기대했던 프랑수아 1세는 메디치 가문의 열네 살짜리 소녀를 장차 프랑스의 왕비로 삼기로 했다. 교황의 친척을 며느리로 두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정치적 선택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가 빗나가고 만다. 클레멘스 7세가 갑자기 사망(1534년)하고 로마 교황청은 카트린의 지참금 지불을 거절했다. 피렌체의 갑부였던 메디치 가문에서 시집 온 며느리였지만 카트린은 프랑스 왕실이 기대했던 것만큼의 지참금을 가져오지 못했다. 이미 메디치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폭도들에게 빼앗겼으며 새 교황을 맞은 교황청의 지원은 당연히 취소됐다.
더군다나 카트린은 키가 작고 몸은 말랐으며, 금붕어처럼 눈이 튀어나온 영락없는 피렌체 졸부의 딸처럼 보였다. 교황과 메디치라는 배경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동갑내기 왕세자 앙리 2세는 아내 카트린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사람은 연상의 애첩이었던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였다.
앙리 2세는 프랑스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귀부인 디안 드 푸아티에의 무릎에 앉아 어리광을 부리면서 자랐다. 결혼하고 프랑스의 국왕으로 취임했지만 앙리는 디안을 자신의 실질적인 아내로 대우했고 카트린은 이 두 사람으로부터 굴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프랑스 궁정에서 온갖 수모를 견뎌야 했다.
우아한 미소·자태 잃지 않아자신의 ‘정적(精敵)’이었던 디안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카트린은 그대로 받아넘겼다.
어떤 치욕적인 상황이 펼쳐져도 법적인 왕비였던 카트린은 우아한 미소와 고귀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앙리 2세가 국왕으로 취임하던 날, 새 프랑스 왕실의 문장은 앙리와 디안의 첫 글자를 따서 HD로 장식됐다. 자신이 엄연한 법적인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카트린은 왕실이 행진할 때 남편 앙리 2세와 그의 애첩 디안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인들은 아무리 교황의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원래 평민 출신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소녀를 프랑스 왕실의 후손을 이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카트린을 ‘그 이탈리아 여자’라고 호칭하면서 모욕을 주었다. 노골적인 무시와 조롱이 거의 매일 이어졌다. 메디치 가문의 왕비는 이탈리아에서 온 못생긴 들러리에 불과했고 국왕은 아름다운 프랑스 여성 귀족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카트린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것이다. 비록 피렌체의 보석과 재산을 가지고 오지 못했지만 카트린은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책 한 권을 가슴에 품고 왔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이었다. 카트린은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해도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막상 아무도 없는 자기 침실에서는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난 다음, 카트린은 두 주먹으로 남아 있는 눈물을 닦고 ‘군주론’을 펼쳐 들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으며, 권력의 냉정한 현실 속에서 승리자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갔다. 힘이 없을 때는 모욕을 당해도 참을 수 있는 인내를 배웠으며, 아무리 극한 상황에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품위를 학습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최선미·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김상근·연세대 신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