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안 희 기자 = 정부가 최근 경제회복을 위해 산업계 전반에 적극적인 투자를 호소한 이후 대기업들이 잇따라 신규 사업 등 미래에 대비한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불황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던 올해 상반기에 몸을 움츠렸던 산업계가 정부의 주문을 자극제로 삼아 주요 업종들을 중심으로 선제적인 투자에 나선 것이다.
경기 회복기를 대비해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해 사회적 책무를 다하겠다는 업계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직 경기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투자 규모가 급속히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기는 어렵지만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들이 불러 일으킨 `투자 바람'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될지 주목된다.
◇주요기업 "투자 늘릴 것" = 예산이 상반기에 많이 소진되면서 생긴 공백을 기업들이 메워줘야 한다는 정부의 요구에 대기업들이 먼저 화답했다.
삼성전자는 20일 이른바 `녹색 사업장'을 구축하고 친환경 제품을 개발ㆍ출시하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2013년까지 5조4천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환경친화적인 상품을 만들기 위한 연구개발에 3조1천억원,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설비를 도입하는 데 2조3천억원을 쓰겠다는 것이다.
LG그룹도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최근 투자 계획을 늘려잡았다.
LG디스플레이가 8세대 LCD 생산라인을 증설하는 데 연내 1조원 이상을 집행하기로 하면서 LG그룹의 올해 투자계획은 연초에 잡았던 11조3천억원에서 12조3천억원으로 8.9% 늘어났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올해 친환경차 개발 등 연구개발 분야에 3조원, 시설부문에 6조원을 투입하겠다는 당초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는 한편 삼성전자와 손잡고 차량용 지능형 반도체 개발에 착수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SK그룹의 경우, 올해 상반기에 신성장동력 발굴 및 자원개발 등 분야에 3조원을 투자했으며 하반기에는 최소한 상반기 규모를 상회하는 투자를 할 계획이다.
특히 신재생에너지 등 녹색기술과 IPTV, 와이브로 등 정보통신 기술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R&D)에 SK가 집행하기로 한 투자액은 사상 최대인 1조3천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한화도 최근 하반기 경영전략회의를 열고 올초 잡아놓은 수치보다 12% 많은 1조8천억원을 태양광 사업 분야 등에 집행하기로 했고 STX도 하반기에 조선 등 제조업 분야에만 5천억원 가량을 새로 투자할 방침이다.
KCC그룹은 지난 17일 한국광물자원공사와 `광물자원을 이용한 녹색산업 경쟁력 향상 기술개발 협력 양해각서'를 맺고 태양광 및 발광다이오드, 유기소재 분야에 4년간 2조원 가량을 쓰기로 했다.
◇"산업계, 상반기보다 투자액↑" = 이처럼 국내 대기업들이 속속 신규 투자계획을 밝힘에 따라 하반기에는 산업계의 투자 규모가 상반기보다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이 같은 예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1천여개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반기 설비투자 계획을 조사한 결과 업체들은 하반기에 상반기보다 평균 3% 투자를 늘릴 예정이라고 답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달 초 제3차 민ㆍ관 합동회의에 보고한 국내 30대 그룹 투자 계획에서도 대기업들이 하반기에 상반기보다 22.9% 증가한 40조802억여원을 시설 및 연구개발 분야에 쓸 예정인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 경제지표가 개선되고 국내 경기 전망이 상향조정되는 등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자 기업들의 투자심리가 완화되고 있는 것이다.
업종별로 업황 전망이 점차 밝아지고 있다는 점도 기업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반도체 분야는 제품 단가 상승세가 지속되고 경쟁사인 대만 업체들이 구조조정에 본격 착수하는 등 호재가 있고 조선업종도 석유 시추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에서 발주 재개가 기대되는 만큼 상반기보다 실적이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 분야는 올 하반기 자동차 내수 판매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1% 늘어난 59만대에 달할 것이라는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의 전망이 나오는 등 위축됐던 시장이 원 상태를 회복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경기가 바닥을 찍었다는 확신이 아직 없기 때문에 기업들이 급속히 투자를 늘릴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은 아직 무리가 있다.
전경련이 파악한 30대 그룹 투자계획에서 나온 하반기 투자액 40조802억여원도 작년 동기와 비교하면 6.1% 적은 수치이다.
경기침체가 더 지속될 것으로 판단, 투자에 나서기보다는 당분간 현금을 보유하면서 안전한 경영전략을 선호하는 기업들도 상당수에 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제적 투자가 미래 경쟁력 토대" = 기존 사업에만 시야가 국한돼 투자를 꺼리다 보면 경기 회복 이후 새롭게 재편될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지적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당장의 수익만 따지기 보다는 미래 성장동력이 될 만한 신사업을 발굴하는 데 돈을 써야 불황 이후 더욱 치열해질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세계 1위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국내 조선업체들은 작년 하반기부터 전 세계적으로 `발주 가뭄'이 지속되면서 수주실적이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작년 규모에 버금가는 돈을 신선종 개발 등에 투입하고 있다.
불황이 지나가면 업체간 수주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을 감안할 때 고부가가치 선박을 개발해 중국 조선사 등과 기술격차를 벌려야 기존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국내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불황을 극복한다는 이유로 미래를 위한 투자에도 인색하면 기업의 잠재력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며 "일부 대기업들이 선행 투자에 나서는 것도 불황 이후 국면을 고려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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