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

2009. 10. 15. 22:57이슈 뉴스스크랩

발가벗기고 찌르고 살육하며 ‘마녀사냥’
그리스도교의 잔인한 진실
로마의 관용덕에 세상에 나왔으나 무자비하기만
오른 뺨 치면 왼 뺨까지 대라던 ‘예수’는 어디로
하니Only 조현 기자
미켈란젤로가 ‘천사의 설계’라고 극찬했다는 판테온. 2,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신전의 연륜보다 나는 한 건물에 온갖 신을 다 안고 있는 그 정신에 더욱 끌렸다.

‘판’이란 ‘모두’를, ‘테온’은 ‘신’을 뜻한다. 무려 30만의 신이 있었다는 로마. 판테온은 그 모든 신에게 봉헌하는 품이 넓은 집이었다.

정면에서 10여 개의 거대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건물 안으로 백인들이 들어가고, 이어 약간 거무스름한 사람들이 들어갔다. 그리고 한국의 여성 수도자들도 뒤따랐다. 그 많은 신들의 후예들이 들어섰다. 천장엔 햇살이 쏟아지도록 직경 9미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햇살이 수녀님과 스님과 교무님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로마의 상징 판테온엔 30만 신이 한 집에서 오손도손

이 판테온이 왜 로마 시대 정신을 상징한다고 했을까. 신이란 인간 정신의 표징이다. 로마는 이처럼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신의 다양성을 인정했다. 그것이 천년 왕국, 세계 제국 로마의 힘이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경제력에선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진 로마인들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그 해답을 로마 인의 현실주의와 관용성에서 찾았다. 내 신만이 아니라 남의 신을 인정할 줄 아는 이런 관용의 정신이 바로 로마의 예지였다는 것이다.

판테온에서 베네치아 광장으로 향하는 동안 누군가 우리가 스쳐지나간 ‘진실의 입’에 대해 얘기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도 나오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의 입구 회랑에 있는 ‘진실의 입’은 거짓말을 하면 손이 빠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로마를 찾은 사람들은 과연 로마의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특히 ‘자신의 종교’에 대해.

베네치아 광장에 이르자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있는 비토리아노가 순례단을 맞는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으로 가는 길에 “정적들에게도 관용적이었다”는 카이사르의 동상이 서 있다.

카이사르 옆을 지나 콜로세움으로 향할 때 가이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일렀다. 멀리서 아이들 네다섯 명이 달려오며 옆을 지나쳐 갔다. 이들이 바로 로마의 유명한 소매치기들이란다. 저 원형극장을 달리던 기마병의 후예일까. 도로와 보도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내 옆을 바람처럼 지나는데 쏜살같았다.

소년들이 지나간 곳으로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2,000년 뒤에 지어진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위용에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 경기장은 80개의 출구에 5만 5천여 명의 관객이 동시에 입장과 퇴장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는 멸망하며, 그때 세계도 멸망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맹수의 밥이었던 그리스도인의 복수…피는 피를 부른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불빛이 하나둘 밝혀졌다.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한 영화 <쿼바디스>의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펼쳐졌다. 수많은 검투사와 짐승들의 주검과 피, 그리고 군중의 함성이.

콜로세움 낙성식 땐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이 무려 100일 동안 계속됐다고 한다. 이때 검투사 수백 명과 함께 맹수 5천 마리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은 이 경기장 앞에 네로 황제의 거대한 콜로수스(거인상)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네로 황제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해, 훗날 대표적인 폭군으로 불렸다. 그러나 당시엔 콜로세움에서 늘 끊임없는 흥행을 펼쳐 사람들에게 승리의 쾌감을 누리게 했다. 그래서 네로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당시 콜로세움은 약육강식의 밀림으로 꾸며졌다. 산과 숲, 신전을 본 딴 세트장 가운데로 맹수와 검투사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대결했다.

당시 맹수의 밥으로 던져진 이들은 식민지에서 끌려온 노예들과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래서 가톨릭은 로마를 악으로 여겼다. 중세시대 자신들을 그토록 핍박했던 로마의 콜로세움을 파괴했을 만큼 로마의 핍박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원한은 컸다.

기원후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무려 엿새 동안 화마가 로마의 화려한 유적들을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로마 시민들 사이에선 네로 황제가 자신의 뜻대로 로마를 재건설하기 위해 노예를 시켜 로마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네로 황제는 희생양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저기서 맞아죽고, 십자가에 매달려 산 채로 불태워졌다.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은 이미 그들이 로마 인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신을 존중하는 종교관을 가진 로마 인들로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옛날부터 따라온 여호와만을 믿으며 다른 신을 부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독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지하 묘지인 카타콤베에 은거하면서 로마의 노예와 여성 등 약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했다. 엄청난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와 신앙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교세는 갈수록 확장되었고, 점차 원로원과 황실까지 파고들었다.

밀라노 칙령 반포­…노예의 종교에서 황제의 종교로

마침내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다.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유대 식민지 백성의 종교가 세계 제국의 종교가 되고, 노예의 종교가 황제의 종교가 되었다.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라도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 된다.”

밀라노 칙령은 이렇듯 신앙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로마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니시우스는 『고대 로마사』에서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것은 종교에 대한 사고방식이었다”고 평할 만큼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다민족 융합체를 유지하는 나름의 비결이었다.

그런데 그 관용의 정신에 의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온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해 로마 시대 자신들이 받은 핍박보다 훨씬 심하게 인류를 박해했다는 것을 ‘진실의 입’이 말했다. 그 ‘진실의 입’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

2005년에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에 열린 사순절 예배 때 지난 2,000년 동안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역사상 한때 기독교인들이 무자비한 수단과 행동으로 교회의 명성을 더럽혔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가 말한 가톨릭의 과오는 십자군 원정과 종교 재판,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 등에 관한 것이었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1484년 교황이 ‘긴급 요청’ 회칙을 발표해 마녀가 있다고 한 데 이어, 도미니크 수도회 성직자 두 명이 『마녀의 쇠망치』라는 마녀사냥 지침서를 내면서 본격화됐다. 이 지침서는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여자는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 얼굴이 일그러지면 마녀…고문관에겐 상금이

여성들을 잡아오면 먼저 실오라기 하나 없이 발가벗겨 온몸의 털을 남김없이 깎았다. 그런 뒤 철삿줄로 고문대에 꽁꽁 묶어 온몸을 바늘로 찔렀다. 악마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바늘에 찔리면 누구나 마녀처럼 얼굴이 일그러졌기 때문에 심판관들은 ‘마녀임이 분명하다’고 판명했다. 바늘로 찔러도 마녀 같은 기색이 없으면, 손발을 묶어 마녀 욕탕이라는 욕조에 집어넣어 떠오르면 마녀라고 결론지었다. 마녀로 판명되면 그녀의 재산은 고문관에게 상금으로 주어졌다. 고문관은 이렇게 평범한 여성을 마녀로 둔갑시킬 때마다 부자가 되었다.

마녀가 된 여성은 화형 당하거나 산 채로 뜨거운 냄비 속에서 죽어갔다. 18세기 계몽사상이 등장해 마녀사냥이 중단되기까지 이런 방법으로 5만 명 이상의 여자가 죽어갔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여인이 산 채로 매달려 화형을 당하는 장면은 당시 사나이들의 최고 흥행거리였다.

콜로세움에서 맹수의 밥이 되어 로마 인들에게 최고의 흥행을 제공했던 그리스도인 성직자들은 반대로 네로 황제 같은 심판관의 자리에 앉아 ‘여성들의 살육’을 흥행거리로 제공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인류 구원에서 결코 여성도 제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기려는 여성들, 남성 우위의 고정된 교리보다 조금이나마 사상의 자유를 가지려 한 여성들은 처절하게 죽어갔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의 칙령으로 시작해 여덟 차례 원정에서 1,500명의 십자군이 4년 간 무려 7만여 명의 예루살렘 인을 학살한 십자군 원정이나 나치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할 때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그를 방조한 것도 씻기 어려운 죄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저지른 더 큰 죄악은 평화로운 원주민들의 땅을 침략함으로써 원주민 종족과 전통의 뿌리까지 파괴해버린 것이다.

더구나 ‘관용’이란 로마 정신으로 역사의 중심에 등장한 그리스도교가 어떤 관용도 없이 2,000년 동안 지구를 피로 물들이며 평화의 최고 파괴자가 되었다는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고백 이전에 ‘역사적 진실’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 콜럼버스, 자신을 도운 원주민에게…

요한 바오로 2세가 고백하기 전 한국의 그리스도교 원로인 조찬선 목사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저지른 피의 역사를 고발한 『기독교 죄악사』란 책을 펴낸 적이 있다. 조 목사는 감신대와 이화여대 교수, 이화여대 교목, 전국기독교학교 교목을 지낸 원로 목사이다. 그는 신대륙의 침략자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와 미 대륙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그 실상에 대해 ‘진실의 입’이 되어 말했다. 콜럼버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콜럼버스 일행이 마리엔 왕국의 섬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은 신기한 배와 이상한 사람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줄 알고 전원을 초대해 성대한 환영 만찬을 베풀어주었다. 콜럼버스가 타고 온 배 한 척이 파선되었을 때도 온 국민이 나서서 구조하는 일을 도왔을 뿐 아니라 필요한 재료를 모두 제공하고 배 수리까지 도와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콜럼버스 일행은 죽음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가톨릭 신도들은 며칠 뒤 안정을 되찾자 원주민촌을 기습 공격해 전 주민을 살해해버렸다.

또 도미니카 섬의 중심부에 있는 하라과 왕국의 여왕은 우아하고 인자하고 사랑이 넘쳤다. 그녀는 콜럼버스 일행이 왔을 때 낯선 손님에게 호의를 베풀고 수차 죽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그 나라의 유력자와 귀족들 3천여 명을 은혜를 갚는다며 만찬에 초청해 몇 채의 가옥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일시에 불을 놓아 태워 죽였다. 불을 피해 밖으로 뛰쳐나오면 콜럼버스의 군인들이 창으로 찔러 죽였다. 도망가다 넘어진 어린애는 칼로 다리를 잘라버렸다.

 

그러나 이미 멸족됐거나 아무런 힘도 없는 이들에 대한 역사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런 곳에서 죽어간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인’과 ‘복자’로 시성되고 있는 것과 달리. 콜럼버스도 신대륙 발견 400돌을 기념해 ‘성자’로 추천되었다.

 

이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온 이들에게 죽어간 원주민이 무려 8천만 명에서 1억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지구 문명이 이뤄놓은 고귀한 자산인 잉카 문명과 아즈텍 문명을 비롯해 각 마을과 각 섬의 아름다운 전통이 샅샅이 파괴되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