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기업이 고객 지갑을 ‘연다’

2009. 12. 1. 00:58C.E.O 경영 자료

‘착한’ 기업이 고객 지갑을 ‘연다’
카이스트 경영대·한경비즈니스 공동기획 - 시장 생태계에서 윤리를 묻다
많은 기업들은 고객관계관리(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를 고가의 컴퓨터 솔루션을 도입해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뒤 매출을 일으키기 위해 고객들에게 카탈로그나 전화·e메일 등으로 적극적인 캠페인 활동을 벌이는 것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활동들은 기업의 일방적인 목표(매출 신장)를 위해 고객 정보를 활용하는데 지나지 않으므로 고객과의 ‘관계 강화’를 목표로 하는 정통 CRM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오히려 CRM이 아니라 타깃 마케팅으로 봐야 한다.

CRM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볼 때 ‘고객과 기업 간에, 상호 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개발하고 유지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코끼리를 춤추게 하라’라는 책을 쓴 루 거스너 전 IBM 회장은 창사 이후 최대의 위기에 몰린 IBM에 부임하자마자 모든 임원들에게 회사로 출근하지 말고 고객사를 방문해 그동안 IBM이 제대로 섬기지 못했던 점들을 파악해 반성문부터 제출하도록 했다. 바로 이런 것이 올바른 CRM 실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한 기업의 CRM은 고객들이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서 느끼는 가치를 최대화함으로써 평범한 고객들을 높은 충성도를 가진 ‘핵심 고객’으로 바꾸고 이러한 핵심 고객과의 관계를 잘 유지·확대해 나감으로써 기업의 미래 ‘고객 자산 가치’를 최대화하는 고객 중심의 조직 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CRM의 중요성은 인터넷의 확산과 이에 익숙한 N세대(network generation)들의 등장으로 기업의 마케팅 초점이 TV나 신문·잡지 등을 통한 불특정 다수 대상 푸시(push)형 광고에서 고객과의 인터랙티브한 커뮤니케이션 활동 중심으로 이동해 감에 따라 더욱 커지고 있다

일방 아닌 쌍방향 소통 통로로 활용

이미 우리보다 앞서 CRM의 중요성을 깨달은 해외 선진 기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객과의 관계를 개발·유지·발전시키고 있다. 먼저 이들은 자사 고객의 식별 및 신규 고객의 획득에 최선을 다한다. 메이시·노드스톰·블루밍게일 등 미국의 내로라하는 백화점들은 자사 백화점에 처음 온 고객들을 회원으로 등록시키기 위해 백화점 카드를 발급 받으면 당일 구매액의 10%를 할인해 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다. 그뿐만 아니다. 이들 대부분의 백화점들은 고객들의 첫 구매는 ‘테스트 구매’로 간주하고 사은품이나 행사 초대 등 고객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해 신규 고객들의 2차 구매를 유도하고 있다.

또한 이베이·구글·캐피탈원·인튜이트 등 CRM 선진 기업들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융단폭격식 광고를 통해 고객을 확보하기보다 충성 고객들의 추천을 통해 기존 핵심 고객들과 비슷한 성향과 니즈를 가진 신규 고객들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이렇게 획득한 고객들에 대해 CRM 선진 기업들은 세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기존의 굴뚝형 제조업체들이나 유통업체들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수준으로 자사 고객들의 성향과 니즈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

인터넷 서점으로 유명한 아마존 사이트에 들어가 로그인하면 첫 화면에 ‘오늘의 추천’이라는 제목이 뜬다.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라는 DVD가 내 추천 리스트에 포함돼 있다면, 그건 내가 그동안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DVD를 여러 차례 샀다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천했을 것이다. 거래하기 위해 내가 입력한 정보가 나의 구매 편의를 위한 추천에 활용되니 구매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 경우 아마존은 고객이 자사 사이트를 방문했을 때 원하는 아이템을 추천함으로써 (매출을 올리면서도) 고객 스스로 행복하게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하지만 만약 아마존이 내가 원하지도 않는 자사의 신제품들을 융단폭격식으로 나의 e메일 주소나 휴대전화, 또는 집 주소로 여러 차례 발송했다면 당신의 반응은 어떨까. 아마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우리 기업들이 CRM 인프라를 갖추고 본격적인 고객관계관리에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CRM의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금융이나 유통 등 유사한 산업 내에 여러 개의 계열사들을 가지고 있는 그룹사들이 요즘 CRM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많이 시행하는 전략은 계열사별 고객 데이터베이스 및 고객관리콜센터, 웹사이트 등을 통합해 운영하는 것이다.

아마도 주목적은 자사의 여러 계열사들을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한번 가입으로 원스톱 서비스(single sign-on, one stop service)’를 제공함으로써 보다 큰 고객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복수 계열사를 이용하지 않는 고객들에게까지 특정 계열사 회원 가입 시 그룹 내 모든 계열사에 회원 가입을 강요하거나 특정 계열사와의 거래 정보를 모든 계열사들에 공개하는데 동의해야만 회원 가입을 받아주는 형태로 제도나 시스템을 운영한다면 이것은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결코 고객 중심의 전략이 될 수 없다.

‘일방적 사랑’만 받으려는 CRM 태반

지난 9년간 카이스트(KAIST)에서 수행한 여러 기업들의 CRM 진단 결과 수백억 원을 들여 통합 CRM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고 연간 수십억 원을 들여 CRM 조직을 운영하는 많은 기업들 중 CRM에 대한 투자 대비 기대했던 결과를 얻고 있는 기업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기쁨 주고 사랑 받는’ CRM의 본질을 벗어나 ‘일방적으로 사랑만 받으려 하거나’ 조금 더 심한 경우는 ‘기쁨 주는 척하면서 사랑’만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무료 영화관이라고 사용자들을 끌어들인 후 데이터 전송료를 영화 한 편에 20만 원씩 부과하는 이동통신사들이나 7.5% 확정금리 개인연금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변액이나 유니버설 보험으로 갈아타기 캠페인을 벌인 생명보험사들의 경우 매년 CRM 조직과 인프라 유지에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더라도 자사에 대한 고객의 신뢰도나 충성도를 높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초고속 인터넷과 이동통신 인프라가 가장 잘 구축돼 있다. 하지만 그런 인프라 위에서 고객을 깊이 이해하고 고객을 위한 가치를 창출해 고객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발전시키는 기업의 CRM 역량 측면에서 보면 우리 기업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결국 CRM 투자가 본래 목표했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 CRM의 정의에서 보았듯이 기업과 고객 간의 관계는 호혜적(互惠的)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고객 정보가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사 제품의 구매를 권유하는 방식은 고객에게 거부감만 줄 뿐이다.

CRM을 실시하고자 하는 기업들은 자사가 고객들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 가치가 고객들이 자사에 기여하고 있는 가치에 비해 공정한지를 항상 확인해야 하며 고객 가치 향상을 먼저 실현한 뒤 기업 가치의 실현이 따르는(‘기쁨 주고 사랑 받는’) 선순환의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CRM을 통해 지속 가능한 고객 기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객을 매출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자사의 프로세스 혁신이나 신제품, 신서비스 개발의 파트너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CRM을 통해 고객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고 이러한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고객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기업들은 고객의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한 더욱 세심한 배려를 할 필요가 있다.

고객 동의 없이 고객 정보를 수집하거나 타사에 공유 또는 판매해서도 안 되겠지만 고객이 사용 동의한 정보라고 하더라도 이를 남용하거나 소홀히 관리해서는 안 된다.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대기업 및 온라인 기업들의 고객 정보 유출 사고나 금융회사 담당자들의 고객 정보 유용 사례들은 제대로 된 CRM을 하려는 많은 기업들에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김영걸 교수는…

1983년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90년 미네소타대 경영학 박사(PH.D), 미 피츠버그대 교수(1990~1993년), KAIST 지식경영연구센터장(2001~2007년), KAIST E-MBA 프로그램 책임교수(2003~2007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1993년~현).

케이스 스터디│매일유업

수요 적은 ‘특수분유’ 10년째 생산


매일유업 사장님과 직원들께

안녕하세요. 이 편지를 누가 읽으실지 모르겠지만 누구든 매일유업 직원분이시겠죠. 저는 2개월 된 아기를 둔 아기엄마입니다.(중략)

저는 포항에 살고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결혼해 임신을 하고 남들 하는 대로 순리대로 이루어졌기에 출산도 그런 줄 알았죠. 그런데 임신 8개월 태아수종이라는 진단에 아기의 생명이 아주 위험해졌습니다. 제 몸도 나빠져 33주 만에 조산하게 되었는데 아기는 유미흉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중략)

모유 먹을 가능성을 물어보니 우리 아기의 경우 MCT 분유가 있었기에 살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매일유업 사장님과 모든 직원분들께 절이라고 하고 싶었습니다.(중략)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서 양쪽 폐에 찬 물을 빼기 위해 그 가녀린 몸에 관을 꽂고 있던 우리 아기 곧 퇴원해서 집으로 갑니다.(중략)

모두 행복하세요. - 승우 엄마

매일유업 김정완 사장은 지난 2006년 10년 감사의 온정이 담긴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에는 감사의 말로 가득했다. 편지를 읽은 김 사장은 즉시 임직원 명의로 편지를 보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던 건 분유가 아니라 엄마의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따뜻한 편지를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중략) 늘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매일유업이 고객관계관리(CRM)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신 출산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많은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유산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예비엄마교실을 열고 사회공헌 행사를 벌이기 시작한데서부터 시작됐다. 오프라인에서 한 해 3만~4만여 명이 참가한 이 행사는 매일유업의 대표 고객 서비스로 커져 2000년 9월 우리아이닷컴이라는 고객 정보 사이트를 공식 오픈하게 된 계기가 됐다.

매일유업의 고객 서비스가 경영학계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CRM을 마케팅 도구로 활용하지 않고 사회봉사 차원으로 접근해 기업 이미지를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10년 전부터 선천성대사이상 질환 유아들을 위한 분유 생산을 해 온 것이다. 창업주인 김복용 전 회장의 지시로 선천성대사이상 질환 유아를 위한 페닐케톤뇨증(PKU) 분유 등 8종의 특수 분유를 생산한 것이 올해로 정확히 10년째다. 앞서 소개한 편지는 매일유업이 생산한 분유를 구입한 고객이 보낸 감사의 편지 일부다.

특수 분유는 만드는 과정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설비 투자비만 7억~8억 원이 든다. 한 번 제작으로 2만 개 이상이 생산되지만 국내에서 팔려나가는 분유는 고작 2500통에 불과하다. 나머지 1만7500개는 모조리 폐기 처분된다. 회사로서는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다. 비단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유업은 매년 선천성대사이상 질환 아이 가족 캠프(사진) 등도 후원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다문화가족 지원 사업을 실시하고 베트남 결혼 이민자 850명에게 무료로 유아용품을 전달하는 한편 우리아이닷컴과 똑같은 내용의 베트남어판을 별도로 오픈해 서비스를 벌이고 있다. 매일유업 한도문 상무는 “한국에 시집 온 베트남 결혼 이민자들은 대부분 육아에 대한 기초 상식이 부족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면서 “반응을 봐가며 앞으로 이를 다른 나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CRM을 효과적으로 벌이기 위해 분유 샘플과 책자 등을 무료 제공하면서 고객을 자연스럽게 평생 회원으로 만드는 것도 매일유업 고객 서비스의 특징이다. 매일유업 제품을 구입한 고객들이 온라인상에서 차곡차곡 쌓은 포인트를 제휴사에서 사용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재단·대한적십자사·월드비전 등 5개 구호 단체에 후원할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것도 특색이다. 현재 매일유업의 온라인 고객은 250만여 명에 이른다. 지난해 아이를 낳은 임산부 중 52.2%가 이 회사 온라인 회원으로 가입했을 정도로 매일유업 유아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들의 만족도는 높다.

김영걸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 ygkim@business.kaist.ac.kr

송창섭 기자 realsong@kbizweek.com

입력일시 : 2009년 11월 24일 15시 55분 5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