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국 간 ‘적정기술’, 삶을 바꾼다

2010. 1. 28. 09:28C.E.O 경영 자료

빈곤국 간 ‘적정기술’, 삶을 바꾼다

한겨레 | 입력 2010.01.27 15:30 | 수정 2010.01.27 16:00

 

[한겨레] 소외된 사람들 어려움 해결하는 '국경없는 과학'


'사탕수수 숯' '라이프스트로' 등으로 과학 봉사


미국은 강좌 개설…국내도 연구회 발족해 활동

재난의 나라 아이티. 새해 벽두 강진으로 참혹한 재앙을 맞은 아이티는 지진 이전에도 허리케인으로 번번이 재난을 당했다. 온 국민이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니 산림의 90%가 황폐화돼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학생들은 2003년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현지를 방문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취사와 난방 연료로 장작이나 차콜을 사용하는 비율이 95%가 넘었다. 부뚜막에서 나오는 연기로 인한 호흡기 질환율도 심각했다. 학생들은 세계적 사탕수수 생산국인 아이티 농부들이 설탕을 추출한 뒤 사탕수수 폐기물을 그대로 버려두는 데 주목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고안한 공정과 직접 설계한 설비로 사탕수수 숯(차콜)을 만들어 주고, 주민들에게 기술을 전수했다.

소외된 90%를 위한 공학기술

이른바 적정기술이다. 적정기술이란 주로 개발도상국에 적용되는 기술로, 첨단기술과 하위기술의 중간 정도 기술이라 해서 중간기술, 대안기술, 국경없는 과학기술 등으로 일컬어진다. 국내에서 적정기술 활동을 벌이고 있는 크리스천과학기술포럼의 김찬중 박사(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는 "적정기술의 정의가 무엇인지, 어떤 기술이 적정기술에 속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그 기술이 그 나라 어느 지역의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는 데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을 적정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정기술의 연원을 마하트마 간디의 물레로까지 끌고 올라가는 이도 있다. 당시 인도의 목화를 수입해 옷으로 가공한 뒤 인도인에게 비싸게 되팔던 영국에 맞서는 데 물레로 옷 짓는 기술은 말 그대로 '적합한 기술'이었다. "부유한 10%를 위해 공학설계자의 90%가 일을 하고 있다"며 "세계의 수십억 고객들이 2달러짜리 안경과 10달러짜리 태양전지 손전등, 100달러짜리 집을 바라고 있다"고 강조한 정신과 의사 출신인 폴 폴락은 적정기술의 주창자로 꼽힌다. 그는 1981년 국제개발사업(IDE)이라는 가난한 농부들을 돕는 기업을 세워 관개용 페달 펌프, 태양력 정수기 같은 도구를 만들어 팔고 있다.

2003년 미국 엠아이티(MIT) 기계공학과 강사인 에이미 스미스는 디랩(D-Lab)이라는 강좌를 개설했다. 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한 현장 활동을 통해 개도국 현지에 적합한 창의적 공학설계(캡스톤 디자인)를 하고 있다. 해마다 수십개의 아이디어가 쏟아지는 이 강좌는 엠아이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좌의 하나가 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스탠퍼드대, 펜실베이니아의 메시아대, 텍사스의 레투어노대, 아칸소의 존 브라운대 등에도 비슷한 강좌들이 개설돼 있다.

국경없는 과학기술인 활동 시동

국내에서도 지난해 12월 '국경없는 과학기술연구회'(회장 유영제 서울대 교수·생물화학공학)가 발족하고, 한달 앞서 사단법인 '나눔과 기술'(대표 경종민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전기공학)이 창립하는 등 적정기술 활동이 본격화하고 있다. 유영제 교수는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과학자들이 함께 모여 학생들 교육도 하고 기술경진대회도 개최하는 등 조직적 활동을 벌이기 위해 단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경종민 교수는 "1995년 발족한 크리스천과학기술포럼이 중심이 돼 그동안 한동대·한밭대 등과 강좌 개설, 국제 워크숍 등을 해 왔다"며 "활동 지평을 넓히려고 사단법인을 만들어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최근 인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한동대와 한밭대가 지난해 6월 개최한 '소외된 90%를 위한 창의적 공학설계 경진대회'에는 '타이 고산지역 사람들을 위한 화덕 제작' 등 각종 공학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한동대는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해외전공봉사(GEP) 활동을 벌이고 있다. 타이의 고산지역인 매해지방에 나무가 연료이고 바닥이 나무인, 모터 없이 일반 호스를 사용해 자연순환하도록 설계한 온돌식 난방 장치를 만드는 것 등이 과제다. 한윤식 한동대 교수(전자공학)는 "학생들이 국제적 감각을 가지고 인간적인 공학을 하면서 자부심을 갖게 된다"며 "특히 현지에서 주민들의 고민을 해결해 줄 공학적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교육적"이라고 말했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