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NO… '100살 아파트' 만든다

2010. 3. 12. 09:16건축 정보 자료실

재건축 NO… '100살 아파트' 만든다

한국일보 | 입력 2010.03.11 22:47

[집, 패러다임이 바뀐다] < 4 > 장수를 꿈꾸다
최초 설계부터 리모델링 염두 '수명 연장'
아파트 측면확장 허용 등 제도 개선 필요

"미국 연수시절이었어요. 월세가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대부분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 밖에 없더라고요. 하지만 특별히 하자도 없고 비교적 깨끗해서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지하실 쪽에 내려가 봤더니 방공호가 있더군요. 이게 왜 있냐고 관리인에게 물어봤더니 글쎄 2차 대전 전후에 지은 아파트라는 거예요."

↑ 윤영선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기획조정실장

↑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당산평화 쌍용예가' 리모델링 사업 개념도. 3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에 지하주차장이 들어서고, 지상층만 운행하던 엘리베이터도 지하주차장까지 이어지며 새로운 모습의 단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집도 장수를 꿈꾼다. 튼튼하게 지어서 세대(世代)가 바뀌어도, 주거공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그런 집. 선진국에선 수십 년 된 아파트가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지만, 우리나라에선 20~30년만 지나면 재건축얘기가 나오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수명연장의 꿈

사실 선진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장수 주택을 향한 정책적 노력을 이어왔다. 일본만해도 2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장기우량주택 인증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장기우량주택보급촉진법을 지난해 도입했다. 장수 인증을 받은 주택에 대해서는 세금과 금리에 있어서도 우대를 해준다.

그런 움직임은 이제 국내 건설업계에서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 핵심은 '섬세한 리모델링'에 있다. 헐고 다시 짓는 재건축이 아니라, 리모델링을 통해 집의 수명을 늘려간다는 컨셉트다.

국내 최초의 민간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지로 꼽히는 서울 마포구 용강동 '대림 e편한세상' 아파트. 1971년 준공된 옛 마포용강 시범아파트가 2002년 7월부터 약 1년간의 대수선을 거치며 장수 아파트로 거듭났다. 대림산업은 앞으로 공급하는 단지는 나중에 재건축이 아닌 리모델링을 통해 주택수명을 얼마든지 연장해갈 수 있도록, 애초부터 그렇게 설계한다는 방침이다.

롯데건설이 최근 분양한 경기 용인시 중동 '신동백 롯데캐슬 에코'아파트(2,770가구)도 애초부터 주택 수명 연장을 염두에 두고 향후 리모델링이 가능한 기둥식구조(실내 기둥으로 건물 하중을 지탱하는 구조)로 지어진다.

쌍용건설이 서울 당산동에서 시공중인 '쌍용예가'(옛 당산평화아파트) 리모델링 현장은 올 7월 완공을 목표로 막바지 내부공사가 한창이다. 72~111㎡(22~34평)형 284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살던 옛 아파트의 모습은 사라졌고, 전에 없던 넓은 지하주차장까지 들어서는 그럴싸한 단지로 변신 중이다. 1978년 준공된 당산평화아파트가 30년 만에 리모델링을 통해 앞으로 100년은 더 이어갈 새 삶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쌍용건설이 지난해 하반기 남양주시 별내지구에서 분양한 '쌍용예가'(652가구)도 입주자 취향대로 실내 구조를 변경할 수 있는 기둥식 가변형 설계로 시공 중이다. 장동운 쌍용건설 건축기술부장은 "철근콘크리트 골조로 지어지는 현대 주택은 기본적으로 최소 50~60년 이상은 쓸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며 "가구원수의 변화에 따른 침실수와 거실ㆍ부엌 크기 등만 자유롭게 변화를 줄 수 있다면 100년 이상 가는 장수 주택의 꿈도 멀리 있는 것 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올해(민간은 2012년)부터 짓는 장기전세아파트부터 기둥식 구조를 도입, 리모델링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지속가능형 공동주택안'을 내놓았다. 20~30년마다 헐고 새로 짓는 주택이 아닌, 100년은 가는 장수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제도적 한계

기존 골조를 유지해 시공하는 리모델링외에, 신축되는 장수 주택의 전형적인 시공형태는 외부 골조가 먼저 시공돼 건물로 인정을 받은 후에 각 세대별로 가변형 내장재를 얹게 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일괄적으로 사용승인(준공허가)을 하는 현행 주택공급 절차를 감안하면 이 같은 '2단계' 공급 방법은 현실과 맞지 않다. 결국 일반화한 대표 평면으로 사업승인을 받은 뒤, 나중에 사업계획변경승인을 통해 설계를 수정해서 일괄사용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럴 경우에는 승인 면적의 10% 이내에서만 변경이 가능하다는 한계에 부닥친다.

리모델링에 대한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다. 양영규 쌍용건설 리모델링부장은 "리모델링의 경우 전후(현관에서 발코니쪽 방향) 증축만 허용되고 측면은 금지돼 있어 설계상 제약을 크게 받고 있다"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평면설계가 가능할 수 있도록 소소한 부분부터 제도적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림산업 관계자는 "주택을 헐지 않고 구조 변경만으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가변형 시공과 리모델링은 사실상 가장 친환경적인 건축 모델"이라며 "리모델링에 대해 조세ㆍ금융 지원이 이뤄지고, 전용 60㎡ 이하 소형주택에 대해서는 증축 비율도 올려준다면 사업이 훨씬 활발히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원 : 롯데건설


● 전문가 진단

윤영선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기획조정실장

"유럽 주택시장에선 리모델링이 50% 넘어"
양적ㆍ외형적 성장을 거듭해온 우리나라 주택 시장이 최근 들어 주택의 품질과 성능, 사회ㆍ경제적 내재 가치 등에 방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에 맞춰 주택의 공급도 점차 주거 수준을 개선하는 동시에, 도시 경쟁력도 함께 제고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런 개념에서 볼 때 리모델링은 주거환경 개선과 도시기능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최적의 주택공급 수단으로 꼽을 만하다. 특히 리모델링은 노후 주택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동시에, 자원 낭비를 최소화하는 친환경적이란 측면에서 녹색성장 코드와도 부합된다.

장수(長壽) 주택 건설을 지향해온 선진국의 경우, 리모델링이 이미 주택시장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사회ㆍ경제적 가치가 상당하다. 실제 서유럽 주요 15개 국가의 주택시장에서 리모델링이 차지하는 비중은 51% 정도로 신축 비중보다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 정부는 리모델링 사업을 21세기 유망 신건설시장으로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도 리모델링에 대한 편협했던 인식이 점차 넓어지고 있지만 아직 미흡할 뿐 아니라 적용 사례도 일부 단지에 국한되는 정도다. 여전히 주택 개축은 건물을 완전히 헐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 재건축에 치중돼 있다.

장수 주택 구현이 가능한 리모델링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이를 받아들이려는 시장의 이해와 건설업계의 기술 개발 노력 등이 선행돼야 할 뿐 아니라 정부의 제도적 지원도 뒷받침돼야 한다.




전태훤기자 besam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