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부동산업체인 ERA코리아에 따르면 강남지역 빌딩의 평균 공실률은 올 1분기 기준으로 12.1%를 기록하고 있다. 이 회사 장진택 이사는 "IMF 당시에도 강남 공실률은 10%를 넘지 않았다"면서 사상 최악이라고 표현했다. 이렇다 보니 미래에셋벤처타워·신영빌딩·트리스빌딩 등 테헤란로의 대표 빌딩들조차 3300㎡(약 1000평)가 넘는 사무공간이 비어 있다. 현지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대로변 대형 빌딩은 그나마 상황이 낫다"면서 "이면도로변 중소형 빌딩은 6개월 넘게 절반 이상 빈 건물도 여럿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연면적 1000㎡ 이하 소형 건물 공실률은 15%로 5000㎡ 이상 대형 건물(7%)의 2배에 달한다.
◆고개 숙인 건물주, 큰소리치는 세입자
지난달 초 강남역 인근 D빌딩에 입주한 F치과는 임차료를 한 푼도 내지 않고 있다. 5층에 430㎡를 쓰고 있는 이 치과는 보증금 2억원, 월 1700만원에 3년 계약을 했다. 그러나 입주 당시 건물주가 "3개월치 임대료를 받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공실률이 높아지면서 그동안 큰소리를 쳤던 강남 빌딩 소유주들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작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빈 사무실이 늘어나면서 올 들어 2~3개월 임대료 무료는 기본이고, 사무용 가구를 공짜로 제공하거나 관리비를 깎아주면서까지 '세입자 모시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역삼역 인근 S공인중개 관계자는 "임대료를 20~30%씩 깎아달라거나 인테리어를 새로 해달라는 등 세입자 요구조건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형 세입자 속속 빠져나가
강남 빌딩 시장이 고전하는 이유는 그동안 임차시장의 3대 큰손이던 IT업체와 금융사, 기획부동산 등이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고 속속 문을 닫거나 강남을 빠져나가고 있는 탓이다.
2000년대 이후 테헤란로를 장악했던 IT업체는 이미 3~4년 전부터 임대료가 싼 구로동이나 분당 등 신도시로 떠나고 있다. 보험사 역시 최근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상당수 지점이 통폐합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들 보험사의 경우 직원만 30~50명에 달하고 지점 1곳당 사용면적도 150㎡ 이상으로 큰 편이어서 건물주 입장에서는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텔레마케터만 100여명 이상 고용하며 1개층을 통째로 쓰기도 했던 이른바 '기획부동산'도 작년 하반기 이후 부동산 경기침체로 수십곳이 문을 닫았다. 기획부동산은 전화 등을 통해 토지를 판매하는 업체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업들도 강남에서 임대료가 싼 지역으로 옮기거나 사무실 면적을 줄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강남지역에 여전히 신규 빌딩이 계속 들어서고 있기 때문에 경기 회복이 이뤄지기 전에는 공실 해소가 쉽지 않다는 것. ERA코리아 장진택 이사는 "그룹 본사나 금융사 본점, 대형 로펌 등 대기업이 입주한 대형 빌딩은 큰 문제가 없다"면서도 "지금처럼 사무직 노동자가 줄어드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오피스 임대시장 불황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정운찬 총리 "IMF 10년… 방향 없는 변화 속 갈등만 심화"
[유하룡 기자 you11@chosun.com ]
[박종필 인턴기자 jppark29@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