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거리는 없고… 손님은 끊기고… "이렇게 한가하기는 처음"<

2010. 9. 18. 20:57C.E.O 경영 자료

일거리는 없고… 손님은 끊기고… "이렇게 한가하기는 처음"<세계일보>
  • 입력 2010.09.17 (금) 20:09, 수정 2010.09.18 (토) 13:56
'온기' 없는 명절… 한가위 앞둔 '서민들의 하루' 르포
  • 가진 자, 가지지 못한 자 할 것 없이 마음은 설렌다. 고향, 부모님, 친구들 생각에….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했던가. 이내 입가에 스민 미소는 사라진다. 얇아진 지갑, 가벼워진 장바구니, 허탕친 구직 발걸음에…. 어느 시절 형편이 나은 적 있었겠는가마는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팍팍한 삶이다. 특히 스스로 삶을 ‘하루살이’로 부르며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일용직 근로자와 시장 상인, 대리운전 기사 등이 그들이다. 16일부터 17일 새벽까지 세계일보 취재팀이 그들의 생생한 삶을 하루 동안 들여다 봤다. 그들은 온돌방 가장 웃목에서 찬 경기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16일 여명 서울 남구로역 주변 인력시장에 수많은 일용직 노동자가 몰려 있다. 그날 그날 일거리만 있어도 행복한 이들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되돌렸을까. 날은 금세 밝았다. 이들의 얼굴까지 활짝 밝아질 날을 기다려 본다.
    남제현 기자
    # 아침, 구로 인력시장

    새벽부터 1000여명 북적… “오늘도 허탕치나” 한숨만

    성인 남자 수십명이 어스름 속에 서울 남구로역 주변을 서성거렸다. 인력사무소 수십개가 밀집한 이곳 일대는 서울지역 최대 인력시장으로 꼽힌다. 30분 남짓 지나자 순식간에 역 인근이 일감을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눈대중을 해보니 족히 1000명은 돼 보인다. 여기저기서 일꾼을 부르는 각 업체 소장들의 고함소리가 이른 새벽을 깨웠다. 활기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A인력사무소 대표는 “추석 대목이라 그나마 일감이 몰리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분위기가 살지를 않는다”고 말했다.

    하릴없이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모인 남자들은 “9∼10월이 대목인 건설경기가 죽을 쑤면서 일용직 인력시장은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을 드나든 지 9년째라는 황모(43)씨는 대뜸 “태풍이 또 올라온다면서요”라고 묻더니 “비가 오면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지긋지긋하다”며 하늘을 한 번 흘겼다.

    옆에 있던 나모(45)씨도 “(비가 오면)기능공들은 내부작업이라도 하지, 우리 같은 잡부는 추석상도 못 차릴 판”이라고 거들었다. 가을 초입까지 지속하고 있는 날씨의 심술이 농·어민뿐 아니라 도시 서민들의 삶까지 애처롭게 하고 있는 셈이다.

    시침이 7시를 넘어가자 잡담소리마저 잦아들었다. 김모(57)씨는 “못해도 사흘은 일을 나가야 일주일을 사는데…참”이라고 내뱉더니 길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만 무심히 짓이겼다. 그는 1998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은 이후 거의 매일 이곳으로 출근했다고 한다. 숙소는 금천구 가리봉동에 하루 5000원짜리 만화방인데, 성인 남성 20명 정도가 그곳을 잠자리로 이용한다고 했다.

    인력업체도 속이 쓰리긴 마찬가지다. 특히 속칭 ‘스메키리’라고 불리는 유보임금에 불만이 컸다. B업체 대표는 “수년 전만 해도 한 달 일하면 다음 달 5일, 늦어도 10일까지는 임금이 들어왔는데, 지금은 빨라야 그 다음 달 말이고 40∼50일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투덜댔다.

    하루 송출인력이 400여명인 남부인력개발㈜의 원광용 이사는 “일당 받아 사는 사람들이라 회사에서 선지급하는 금액만 한 달 평균 7억원선에 달한다. 그런데 돈이 늦게 들어오니 우리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내년이 더욱 두렵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올해에는 그나마 지난해와 재작년 발주된 건설 물량이 있었으나 건설경기 침체로 내년엔 인력시장에 한파가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는 한숨이었다.
    ◇추석 대목을 맞고서도 서민들의 고단한 삶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16일 새벽 서울지역 최대 인력시장인 남구로역 주변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무심히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왼쪽). 낮 시간 활기를 잃은 서울 동대문시장 주변에서는 일감 주문을 기다리다 지친 지게꾼들이 지게에 의지해 쉬고 있다(가운데). 기다림은 밤 12시를 넘긴 시각에도 계속된다. 서울 강남구 교보타워 사거리에선 수백명의 대리운전기사들이 손님들의 ‘콜’을 먼저 받기 위해 PDA(개인휴대단말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오른쪽).
    남제현 기자
    # 낮, 동대문시장

    배달용 오토바이 30대 짐꾸러미 하나없이 허탕
    지게꾼들 “예전엔 얘기나눌 짬도 없었는데” 한숨

    오후 2시쯤, 개미들처럼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동대문시장. 시장에 사람이 많아 ‘그래도 동대문은 역시’라는 느낌이 착각이었음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원체 많아 착시현상을 일으켰을 뿐 손님 발길은 뚝 끊어졌다는 게 ‘동대문 개미’들의 하소연이었다.

    통일상가 옆에 짐꾸러미 하나 올리지 못한 채 죽 늘어선 배달용 오토바이 30여대가 분위기를 대변했다. 이곳에서 오토바이 퀵서비스를 관리하는 박모(68)씨는 “8년째 이 일을 하는데 추석을 앞두고 이렇게 한가하기는 처음”이라며 “오토바이 한 대당 하루 대여섯 탕을 뛰어줘야 하는데, 요샌 많아야 네 탕이다. 추석 대목인데 일거리가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대문 시장의 퀵서비스 활동량은 시장 경기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이곳 퀵서비스는 외부 공장에서 옷감이나 액세서리 등을 들여오고, 동대문시장 내 제조업체에서 만든 옷을 다시 곳곳의 도·소매 시장과 상가에 나른다. 그야말로 동대문과 서울 각지의 물류를 흐르게 하는 동맥이나 다름없다.

    박씨는 “기본요금이 5000원이고, 영등포 등 거리가 되면 1만2000원을 받는다”며 “기사들이 사무실에 매주 6만5000원씩 내고 일하는데, 의류 생산 자체가 줄어 기사들 일감도 그만큼 줄었다”고 걱정했다.

    현대식 오토바이 배달꾼 못지않게 재래식 지게꾼은 더욱 울상이다. 매년 이맘때처럼 자기 키보다 높이 짐을 쌓아 거미줄 같은 골목과 계단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지게꾼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문 전화만을 목놓아 기다리며 한담을 나누는 지게꾼들이 눈에 띌 뿐이다. 평화시장에서만 25년째 짐 나르는 일을 한 명모(48)씨는 “예전 같으면 명절을 1∼2주 앞둔 대목 땐 이렇게 이야기 나눌 짬도 안 날 정도로 정신 없었다”며 “외환위기(IMF) 때만큼은 아니어도 시장에 활기가 없다”고 했다. 그는 “기본 2500원을 받는데,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무거운 짐은 1만2000원까지 받기도 한다”며 “1주일마다 정산하는데, 20만원을 벌까 말까 한다”고 털어놨다.

    평화시장 1층에서 단체복 가게를 하는 권모(40)씨는 “각 회사에서 가을 야유회다 운동회다 해서 단체복 주문이 밀려들 철인데, 정말 뚝 끊겼다”면서 “하루 얼마 벌었는지 계산해 본 지가 꽤 됐다. 요새는 개시 자체가 힘들다”며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켰다.

    # 밤, 강남 교보타워빌딩 주변

    청년부터 초로의 노인까지 대리기사 수백명
    “기사 수는 많아지고 가격은 떨어지니 죽을 맛”

    새벽 1시 어느 거리보다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강남역 주변에선 왁자지껄하는 젊은 남녀가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강남 교보타워빌딩 주변에는 ‘고단한 인생’이라고 자처하는 수백명의 다른 무리가 있었다. 저마다 PDA(개인휴대단말기)를 든 채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건장한 청년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남자까지, 심야 대리운전 기사들이다.

    ‘넘버 원’ 유흥가가 가깝고 대리 운전기사만 태우는 셔틀버스가 정차하는 곳이라 매일 이 시각 교보타워빌딩 주변은 대리운전 기사들로 북적인다. 간간이 ‘콜’(대리운전 신청)을 접수하고 총알같이 뛰어가는 사람만 반짝 생기가 날 뿐 대부분 표정이 썩 밝지 않다.

    5년차 대리운전 기사인 이상목(48·가명)씨에게 한 동료 기사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갈수록 일도 없는데, 오늘 ‘페널티’(대리운전 기사가 요청이 들어온 대리운전을 접수한 직후 취소할 때 부과되는 벌금, 보통 1회에 500원)만 3000원 먹었어요.”

    그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이씨는 “기사는 늘어나고 일은 고만고만해서 죽을 맛이다. 곧 추석이라 바짝 해서 좀 벌어야 할 텐데…”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녁 8시부터 일을 시작한다는 이씨의 하루 평균 수입은 10만원 정도. 한 번 타는 데 3000원 하는 셔틀버스비와 식비, 페널티 비용 등을 빼면 손에 쥐는 금액은 6만∼7만원이라고 한다. 그는 “여름이 원래 비수기인데 비까지 많이 내려 그냥 쉰 날이 많았다. 9월부터 추석 연휴 전까지 좀 만회하려 했는데, 경기가 별로라 그런지 예년보다 못하다”고 털어놨다.

    이씨 옆에 있던 다른 기사도 “‘콜’수가 조금 늘었으나 기사가 많고 가격은 떨어져서 수입은 갈수록 줄고 있다”며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라 올핸 배 한 개, 사과 한 개 이렇게 사야 할 판이라고들 한다”고 푸념했다. 비슷한 시각 강남의 선릉역 부근에서 만난 대리운전 7년차의 박철호(가명·50)씨는 “실직자나 퇴직자들이 일을 찾다 대리 운전에 나서는데, 이 바닥이 결코 만만치 않다. 한 달도 못 버티고 그만두는 사람이 태반”이라고 전했다. 그는 대리운전 업체의 횡포도 기사들 고통을 가중시킨다고 했다. 일반 직업소개소에서는 수수료를 10%만 떼는데, 대리운전 업체들은 20∼30%를 떼간다는 것. 게다가 업체에 불만이라도 제기하면 기사가 해당 업체에 들어오는 콜을 못 보게끔 ‘록’(Lock·잠금)을 걸어 일감을 안 준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서울경기인천지역 대리운전노동조합 이상훈 위원장은 “대리운전 보험비도 매달 6만원씩 내는데, 회사마다 대인 대물보상 한도가 천차만별이어서, 보험에 들었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라며 “승객이 안전하게 집에 갈 수 있고 기사들이 최소한 벌이를 하도록 정책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귀전·조현일·유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