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달리면서 인간이 되었다"

2011. 3. 27. 09:11C.E.O 경영 자료

왕 대접받으려면 100m 달려봐라?

"우리는 달리면서 인간이 되었다"

조선일보 | 김한수 기자 | 입력 2011.03.26 03:08

 

러닝
토르 고타스 지음|석기용 옮김|책세상|744쪽|3만2000원

1896년 4월 10일 오후 5시쯤, 그리스 아테네 의 스타디움에 모인 7만 관중은 환호성을 올렸다. 좀 전에 자전거 탄 독일 인이 스타디움에 와서 " 호주 선수가 선두"라고 외쳐 풀이 모두 죽어 있던 판이었다. 이때 말 탄 그리스 장군이 나타나 "그리스 선수가 선두를 탈환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날 오후 2시, 40㎞ 떨어진 마라톤 마을에서 출발한 그리스 출신의 스피리돈 루이스는 프랑스 , 호주 선수를 잇따라 제쳤다. 길가의 시민들은 코냑, 오렌지를 그에게 건넸고, 심지어 즉석 청혼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스타디움에 들어서자 구경하던 국왕과 왕자도 내려와 루이스 옆에서 함께 뛰었다. 사람이 몰리는 통에 결승선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출발한 지 2시간 58분 30초 만에 루이스는 결승선을 통과했다. 동네 샘물을 떠서 9마일 떨어진 아테네에 내다 팔던 23살 루이스에게 국왕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라"고 했다. 루이스는 "물을 나르는 데 필요한 좀 더 나은 마차와 힘센 말"이라고 했다. 그는 선물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간 뒤 다시는 달리기 시합에 나서지 않았다. 제1회 근대올림픽의 마라톤 풍경은 이랬다.

노르웨이 의 저술가인 저자는 동서고금의 다양한 자료를 섭렵해 달리기를 통해 본 인류문명사를 매력적으로 정리했다. 생물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달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지구가 사바나 기후로 변하면서 달릴 능력을 가진 종(種)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체력적 이점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에서 근대 이전까지 달리기는 '전령(傳令)'의 몫이었다. 잉카제국 '차스키'라는 전령은 제국을 종횡으로 달리며 기밀사항과 물건을 함께 배달했고, 중세까지도 전령의 달리기 속도에 사형수의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의식(儀式)적인 달리기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2세는 대관식에 앞서 자신이 왕이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신하와 백성 앞에서 150야드를 달렸고, 30년 후에도 다시 같은 거리를 달렸다.

달리기에 관한 한 '프로'가 '아마추어'보다 먼저 시작됐다.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달리기는 '게임'이 된다. 열풍을 주도한 것은 영국 미국 . 산업혁명의 종주국 영국에서는 경주자들이 전국을 돌면서 '내기 달리기 시합'을 벌였고, 골드러시의 미국 역시 사금(砂金)을 상품으로 내건 달리기 시합이 유행했다. 이길 듯 질 듯 안달나게 하다가 마지막 순간 겨우 이긴 척하는 '야바위 선수'도 등장했다. 일부 업자는 잘 달리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고용해 이국적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들은 '프로선수'로 불렸고 온갖 속임수와 사기가 난무했다. 당시 달리기 인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프로 달리기'의 혼탁함이 극심해지자 '영국 신사'들이 나서 아마추어 달리기를 부추겼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 신사들은 육상을 통해 기독교적인 신사를 양성하고자 했다. 존 체임버스가 1866년 런던에서 설립한 아마추어육상클럽(AAC)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정신은 제국주의 정책과도 맞아떨어졌다. 프랑스의 쿠베르탕이 주도한 올림픽경기는 아마추어 중심의 달리기 열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제국주의에 따른 국제화 추세, 운송수단과 언론의 발전은 국제적으로 '통일'된 기준의 스포츠 대회를 필요로 했던 것. 그래서 나온 게 마라톤대회다.

하지만 프랑스의 미셸 브레알이란 사람이 제안한 마라톤에 대해 쿠베르탱조차 회의적이었다. 1회에 한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인기가 폭발했다. 결국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국제적 스타가 탄생했고, 다양했던 달리기 거리가 정확히 측정되고 국제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달리기를 육성해 파보 누르미 같은 선수를 길러낸 핀란드, 일본에서 시작돼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까지 유행했던 역전(驛傳)경주, 인종의 편견을 딛고 일어선 제시 오웬스, 에티오피아 의 유명한 아베베 비킬라, 20세기 후반 전 세계를 휩쓴 조깅 열풍, '마(馬)군단'으로 불리는 육상스타를 배출한 중국 의 마준렌 코치에 이르기까지 달리기의 역사를 수놓았던 수많은 일화가 생생하다.

그렇다고 모두가 달리기를 좋아하고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1986년 뉴욕마라톤을 보고 이렇게 비판했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 날의 광경이다. 틀림없이 이들 마라톤 주자들도 승전보를 품고 달리는 꿈을 꾸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초인적이지만 쓸모없는 노력에 관한 모호한 메시지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원시인과는 매우 다른 의미에서 단지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을 위해 달리고 걷는다. 아마도 다음번 조깅의 물결은 중국에 몰아칠 것이다."